3월10일 학생독립만세운동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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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충청남도 당진시 면천면 성상리 772-1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충남 당진시 면천면 성상리 772-1 면천초등학교 옆 면천읍성내 3월10일 학생 독립만세운동 기념비를 찾아가는 중에 만난 면천읍성
옛 면천초등학교 옆 면천공립보통학교 3월 10일 학생 독립만세운동 기념비
3월10일 독립만세운동 거사록
서기 1919년(단기 4252년) 3월 1일 서울에서는 대한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날 원용은은 가족과 함께 상경하여 20여일만에 서울시민들이 태극기를 손에 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도로를 점령하고 시가행진을 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특히 서울시내 남.녀 학생들이 독립운동에 참여하며 일반대중의 선두에서 열광적으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광경을 보고 크게 감동을 받아 벅찬 감격과 울분을 가슴에 안고 귀향하여 우리도 독립운동을 해야된다는 결심을 굳게 가졌다. 원용은은 면천보통학교 제4학년 재학생의 신분으로 동급생 박창신과 만나 은밀히 거사를 모의하고 주동적인 역할을 분담하기로 의논한 다음 각학년 급장과 비밀리에 논의하고 전교생에게 주지시켰다. 원용은은 태극기와 현수막을 제작하며 모든 준비를 서룰렸고 독립운동의 노래 가사는 서울에서 강선필이 가져와서 원규상을 시켜 등사기를 이용 수백배의 인쇄물을 만들어 학생들은 물론 주민들에게 배부할 계획을 세웠다. 또한 단독으로 사재 죽당목(옷감)을 구입하여 자기 집에서 비밀리에 태극기를 만들고 현수막도 제작했다. 5미터 이상되는 대나무로 깃대를 만들어 동문 밖 면천향고 뒷산에 숨겨놓았으며 한편 박창신은 인접한 당진, 덕산 공립보통학교 학생들에게 우리 거사에 함께 참가하자는 밀서를 보냈다. 그때 밀서 내용 가운데 만약 우리와 뜻을 같이 않는다면 인면수심(사람의 탈을 쓰고 짐승의 마을 가진 인간)이라고 격려와 더불어 몸시 충격적인 모독이며 협박적인 문구가 담겨 있었다. 그러나 이 밀서는 두학교에서 반려되었고 그 후일에 타교학생까지 선동한 죄로 벌을 받게 되었다. 드디어 3월 10일 각각 하교하여 오후 4시경 면천 동분 밖의 저수지를 지나 송림골짜기에 전교생 96명이 모두 모였다. 이때 원용은은 서울에서 본 광경을 상세히 설명하고 우리도 다같이 한마음으로 독립만세를 부르자고 역설했다. 그리고 미리 준비해 둔 태극기와 현수막을 꺼내어 대나무 깃대에 높이 달고 대한독립만세라고 대서특필한 3.3미터 길이의 현수막을 앞에 들고 행동개시에 들어갔다. 그때 나 이종원은 4학년 급장이었고, 박성은은 부급장이었는데 당시 보통학교 학제는 4년제이므로 4학년생은 최고학년 상급생이요 동시에 최고학년의 급장 명령이라면 절대 복종이다. 총 책임자인 나는 부급장 박성은과 전체 지휘 통솔을 맡았다. 나는 대열 맨 앞에서 박성은은 대열 뒤에서 이탈자와 낙오자 없도록 일사불란하게 대오를 이끌고 행동하게 되었다.
주동자인 원용은과 박창신 두사람이 협혁하여 깃대를 높이 들고 선두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할때 날씨는 매우 청명하였으나 바람이 일기 시작하여 태극기는 창공높이 휘날리고 장폭으로 만들어진 현수막은 승천하는 용의 모습이고 꼬지치듯 펄럭인ㄴ 모양은 마치 개선장군이 승전고를 우리면서 입성하는 광경과도 흡사했다. 이렇게 질서정연하고 늠름한 긱세로 행진할때 덕산공립보통학교 심상렬선생님이 퇴근길에 대열앞으로 다가왔다. 그는 갑지기 두손을 번쩍 들어 그 당시 보통학교 교사로서는 감히 생각도 못할 행동으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그 순간 마치 호랑이등에 날개를 달아준 격이 되었다. 그로 인해 우리 전교생은 용기백배 더욱 열광적으로 대한독립만세를 힘차게 부르며 학교 정문앞까지 행진했다. 학교에서는 퇴근 준비하던 교사들이 깜짝 놀라 달려나오고 대열앞을 막으며 저지하려 했지만 그 위세는 너무나도 당당하여 막지 못하였다. 우리는 다시 만세를 부르며 주재소(경찰지서)앞을 통과하려 할때 경찰들이 출동하여 강격히 저지하므로 할수없이 해산할수밖에 없었다. 이때 태극기와 현수막은 여지없이 빼앗기고 말았다. 우리는 흩어졌다. 다시 모여 조를 현성하고 맨손으로 만세를 부르려하는데 박래윤, 안인식, 이흥로, 이돈하선생님들이 급히 달려놔와 목매는 소리로 총맞지 말고 어서 도망가라고 호통치는 바람에 사방으로 분산할 무렵 죽기치(다케사끼)라는 포악한 일본인이 총을 들고 추격해 왔으나 큰 위기는 모면하고 각자 흩어져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원용은은 일부 학생들과 또 다시 모여 몽산과 아미산에 올라 만세를 불렀다. 저녁무렵 산을 내려오며 마을사람들을 찾아 다니며 독립운동의 당위성을 설명했다. 그리고 원용은은 몸이 불편하여 자리에 눕고 말았다. 그 다음날 안인식 담임선생은 인편에 은밀히 연락하여 당분간 등교하지말고 집을 피해 있으라는 통지를 보냈으나 원용인은 가족들이 간곡히 만류해도 듣지않고 하루 지난후 불편한 몸으로 등교하여 자진체포되었다. 그 다음날 공주에서 헌병청 경무부장이 헌병대 몇명과 기마병까지 인솔하여 삼엄한 경비를 하였고 경찰들은 사건의 진상과 배후자 검거에 급급했다. 그러나 배후자가 따로 없고 원용은은 혼자했다고 주장하는데 박창신도 자진출두하여 함께 조서를 받고 공주 형무소에 이감되어 4개월만에 석방되었다. 이상은 지금으로 부터 59년전에 원용은외 95명의 3.10 독립만세운동을 선동하여 면천공립보통학교 학생이 충남에서 제일 먼저 독립만세를 부른 전후상황의 기록을 한 취당 이종원선생의 거사록이다.
3월 10일 학생 독립만세운동 기념비 건립기
일제 강점기 망국의 한을 품고 서기 1919년 3월 10일 면천공립보통학교 전교생이 독립만세운동을 결행하였으니 충청남도내에서 최초의 학생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일제의 학정과 만행에 견디다 못해 광복에 대한 열정이 복바쳐 온갖 두려움을 무릅쓰고 분연희 일어나 열광적으로 독립만세를 불러 한민족의 기개를 보여준 거사였다. 그 날의 함성은 천지를 진동하였으며 우리들 가슴에 조국애 정신을 심어주었고 독립이란 강한 불빛을 비추어 주었다. 우리 민족사에 찬연히 빛날 한국인의 웅지를 유감없이 발휘하신 선배들의 영혼이 깊게 서린 면천초등학교 은행나무아래 군자정앞에 님들의 거사가 있은지 90년이 지난 오늘 기념비를 세운는 것은 망국의 한과 광복에 대한 열정을 품고 투쟁하신 선배들의 장엄한 애국정신을 표상화하여 널리 선양하고 장차 후세들이 대오각성하여 민족의 자부심과 국가관을 정립하며 겨레의 염원인 조국통일과 민족정기가 면면히 어어져 우리나라를 길이길이 번영하는 부강국으로 만들어 보전코자 하는데 있다.
이 기념비 건립이 있기까지는 선배님들의 독립운동사를 발굴하여 2008년 2월 10일 면천공립보통학교 3.10학생독립만세운동 기념사업회를 창립하여 제1회 독립만세운동 재현행사를 주도하는등 강인한 집념으로 불철주야 심혈을 기울인 유병근 자문위원장의 공로가 지대하였고, 금년 충청남도지사, 당진군수, 면천초등학교 동문과 애국의 뜻을 같이 하는 인사들의 보조와 후원이 있었기에 이루어 진것이다. 이 기념비는 조국독립 선도자이신 선배님들의 고귀한 희생정신이 담겨져 있음으로 민족적 활로의 정신적 지주가 되도록 영원히 보존되어야 한다.
면사무소 앞에 있는 풍락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