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동항리 268-2
- 탐방로그
- 경기 안성시 양성면 동항리 268-2에 위치한 3.1독립운동항쟁지비(양성면)를 찾아왔다. 3.1독립운동항쟁지비는 동항사거리 부근에 위치해 있었다. 3.1독립운동항쟁지비 옆에는 안성 독립운동 역사마을 표지판이 세워져 있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수형자 명단 : 오윤선,김종상,오경근,오복영,김백춘,오세경오세학,오창선,윤종건,함천봉,남상훈,홍정표,홍병각,박천봉,손정봉,고인제,오윤선,최관길,조볗훈,김영하,이부성,권중옥
태형자 명단 : 오창문, 장순석,남진우, 이창식, 오용근, 이사득,남상억,오태환,육유종,김수창,오화근,이오준,조용정,오영근,오홍근,김춘만,김성재,정운영,이성윤,배윤근,박억쇠,이치삼,이치순,조순교,박관옥,황영연,안기봉,심의태,유진권,오철영,오정환,오충근,이교정,최완철,오탁영,남상윤,남상윤,심의철,심의식,유복만,유병세
태형자 명단 : 오창문, 장순석,남진우, 이창식, 오용근, 이사득,남상억,오태환,육유종,김수창,오화근,이오준,조용정,오영근,오홍근,김춘만,김성재,정운영,이성윤,배윤근,박억쇠,이치삼,이치순,조순교,박관옥,황영연,안기봉,심의태,유진권,오철영,오정환,오충근,이교정,최완철,오탁영,남상윤,남상윤,심의철,심의식,유복만,유병세
3.1독립운동항쟁지
기미년(1919년) 3.1독립운동은 일제로 부터 국권을 회복하려고 봉기한 민족의 항쟁이다. 그 중에서도 양성의 항쟁은 일제가 민중대표 33인을 재판할떄 원용한 전국 3대 실력 항쟁지로 손꼽혔다(독립운동사 자료집 제5집 13쪽). 양성의 3.1운동은 3월11일 오전 11시 양성공립보통학교 전교생이 갑자기 교정에서 부른 독립만세가 기폭제가 되어 4월1일 밤 양성과 원곡면민 약2천여명의 군중이 동항리에 집결하여 독립만세를 외친것이다. 선열들은 독립만세를 부르며 경찰관주재소 면사무소 우편소를 파괴 방화하고 일본인을 축출하는 등 우리나라에서 가장 대표적 3.1독립항쟁을 펼쳤다. 이에 독립투쟁의 금자탑을 세운 선열의 숭고한 호국정신과 정신문화 유산을 승화시켜 호국의 얼과 긍지를 후세에 심어 불멸의 씨앗이 되게 하려고 이 표석을 세운다.
1997년 6월 6일
1997년 6월 6일
안성시를 찾았다.
경기 안성시 양성면 동항리 268-2 동항사거리 3.1독립운동항쟁지비를 찾아왔다.
경기 안성시 양성면 동항리 268-2 동항사거리 3.1독립운동항쟁지비를 찾아왔다.
3.1독립운동항쟁지
양성의 3.1독립운동
이 고장의 3.1독립운동은 전국적으로 가장 치열하였다.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과 원곡면은 일제가 민족대표 33인을 재판할때 황해도 수안군 수안면, 평안북도 의주군 옥상면과 함께 인용하였던 전국 3대 실력항쟁지이다. 이곳의 3.1운동은 1919년(기미년) 3월 11일 오전 11시에 양성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의 독립만세로부터 시작되었다. 학생들은 남진우(보생전문학교학생)와 고원근(양성보통학교 졸업생, 선린상업학교 학생)의 주도로 당시 결찰관 주재소가 지척에 있고, 일본인 교장과 교사가 제지하는데도 이를 뿌리치고 일제히 독립만세를 부르고 그후에도 계속하여 교정과 뒷동산에서 만세를 외쳤다.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4월 1일 밤에는 각 마을의 주민들이 면소재지인 동항리에 집결하여 만세를 외쳤다. 이때 군중들은 마침 성은고개를 넘어 온 원곡면민들과 합세하여 약2천여명의 무리를 이루어 만세를 외치며 경찰관 주재소를 파괴 불사르고 계속하여 면사무소로 달려가 기물, 집기, 서류를 끌어내 불지르고 우편소 전화선을 끊고 전주를 절단하여 통신을 차단시켰고 기물 서류를 파괴 방화하였다. 그들은 계속하여 일본인 잡화상과 고리대금업자의 집을 습격하여 불태우고 파괴하는 등 격렬한 항일 독립투쟁을 전개하였다.이날의 항쟁으로 361명이 검거되고 127명이 옥고를 치루었다. 그중에서 24명이 순국하였다 또한 일본 경찰관과 헌병대가 주모자를 색출하는 과정에서 9채의 가옥이 불에타고 40명이 태장 60~90대를 맞는 등 막대한 피해의 고난을 당하였다.양성의 3.1독립운동은 보통학교 학생들로부터 시작하여 각 마을에 퍼졌고 원곡면과 동맹한 지역 연합적 성격을 띤 전국적으로 대표적인 항일독립투쟁의 실력항쟁이다.
이 고장의 3.1독립운동은 전국적으로 가장 치열하였다.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과 원곡면은 일제가 민족대표 33인을 재판할때 황해도 수안군 수안면, 평안북도 의주군 옥상면과 함께 인용하였던 전국 3대 실력항쟁지이다. 이곳의 3.1운동은 1919년(기미년) 3월 11일 오전 11시에 양성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의 독립만세로부터 시작되었다. 학생들은 남진우(보생전문학교학생)와 고원근(양성보통학교 졸업생, 선린상업학교 학생)의 주도로 당시 결찰관 주재소가 지척에 있고, 일본인 교장과 교사가 제지하는데도 이를 뿌리치고 일제히 독립만세를 부르고 그후에도 계속하여 교정과 뒷동산에서 만세를 외쳤다.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4월 1일 밤에는 각 마을의 주민들이 면소재지인 동항리에 집결하여 만세를 외쳤다. 이때 군중들은 마침 성은고개를 넘어 온 원곡면민들과 합세하여 약2천여명의 무리를 이루어 만세를 외치며 경찰관 주재소를 파괴 불사르고 계속하여 면사무소로 달려가 기물, 집기, 서류를 끌어내 불지르고 우편소 전화선을 끊고 전주를 절단하여 통신을 차단시켰고 기물 서류를 파괴 방화하였다. 그들은 계속하여 일본인 잡화상과 고리대금업자의 집을 습격하여 불태우고 파괴하는 등 격렬한 항일 독립투쟁을 전개하였다.이날의 항쟁으로 361명이 검거되고 127명이 옥고를 치루었다. 그중에서 24명이 순국하였다 또한 일본 경찰관과 헌병대가 주모자를 색출하는 과정에서 9채의 가옥이 불에타고 40명이 태장 60~90대를 맞는 등 막대한 피해의 고난을 당하였다.양성의 3.1독립운동은 보통학교 학생들로부터 시작하여 각 마을에 퍼졌고 원곡면과 동맹한 지역 연합적 성격을 띤 전국적으로 대표적인 항일독립투쟁의 실력항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