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영 위혼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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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충청남도 금산군 금산읍 하옥리 291-3
탐방로그
김태영의 원혼을 위로하기 위하여 위혼비를 세웠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애국지사 김태영 위혼비
이분은 왜정말기 여러 동지들과 일심회라는 항일단체를 조직하여 특수군용열차 접곡과 일본요인 암살을 모의하고 반일 유인물 살포와 만주의 조선독립군과 연계하여 지하 활동을 하다가 1944. 1.11 왜경에 체포되어 2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전주형무소에서 복영중 모진 고문과 가혹행위로 1945.7.20 원통하게 옥사한 항일투사이므로 그 숭고한 애국정신을 기리고 삼가 원혼을 위로하기위하여 위혼비를 세웁니다.
군수 김현근 애민선정비
반만년의 역사상 처음으로 군민이 직접 선출한 목민관이 탄생하였으니 그 분이 바로 금산군수 김현근이시다. 공은 김수로왕의 후예이며 평장사상공의 19세손으로서 1938년 11월 3일 금산군 금산읍 상옥리 143번지에서 아버지 김상석과 어머니 김옥선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성품이 인자하고 온화한 얼굴에는 항시 미소가 담겨 있었고 더불어 사는 지헤와 봉사정신이 투철하였다. 충남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뜻한바 있어 고향에 머물면서 각종 봉사활동을 하였으며 금산군 산림조합장과 금산군정 자문위원과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금산군협의회장 등 10여개 사회봉사단체장을 역임하면서 많은 업적을 남기시었고 특히 금산군민에게 심어준 새마을정신은 후세에 길이 이어 갈것이다. 1991년 7월 9일부터 1995년 6월 30일까지 4년간 충청남도의회 건설분과위원장과 상임운영위원장을 역임하면서 도정 발전에 헌신 하였고 어려운 이웃을 위하여 주례를 서 주어
3,000여 쌍의 젊은이에게 행복한 삶을 인도하였으니 공의 인품이 얼마나 너그러우며 얼마나 많은 사람을 품에 안고 있었는가를 가히 알 수 있다. 너그러운 마음으로 한없이 봉사하면서 살았기에 많은 사람을 얻었고 (관즉득중) 금산군민의 사랑을 받았으며 1995년 7월 1일 금산군민의 열화 같은 성원을 받아 민선 초대군수로 당선되었다. 1998년 2월 1일까지 2년 7개월간 금산군정을 맡아 보면서 새벽 4시부터 밤 늦게까지 금산군 골골을 누비며 민정을 살피시고 현장을 점검하였고 많은 정책을 개발하여 군정발전에 혼신의 노력을 다하였으며 민생을 구휼함에 있어 환,과,고,독의 사궁을 최우선으로 하였으니 성현의 덕을 본받은 애민선정이였다. 인삼산업법 개정, 인삼 종합전시관 건립, 인삼연구소설치, 대전, 통영간 고속도로휴게소 유치와 중국길림성 안도현과의 자매결연을 통한 국제시장 개척과 사회복지를 위하여 1,080명의 여성자원봉사대를 조직하여 군민복지증진에 기여한 공은 홍조 근정훈장(4418호)과 대통령 표창(1763호)과 함께 청사에 길이 빛날 것이다. 아! 이 무슨 기구한 운명의 장난인가? 그토록 사랑하던 군민과 산적한 군정을 두고 공은 1998년 2월 1일 09시에 원효암에서 순직하였으니 운명이라 하기에는 너무나 허망하다. 공의 부음을 전해들은 군민들은 오열하였으며 군민의 곡지통지 속에 장례는 금산군민장으로 엄숙히 거행하였다. 매섭게 추운 일요일 이른 아침에 과로에 지친 몸을 돌보지 아니하고 비가 샌다는 요사를 확인하러 갔다가 변을 당하였으니 구학에 죽는것을 서슴치 아니한 지사와 살신성인 하는 인인에 비할바이니 공의 숭고한 애민정신과 목민정신을 후세에 전하여 영세불망케 함이 도리이다. 이에 유생 이병화는 삼가 비문을 짓고 금산군기관단체장과 금산유림과 공을 기리는 현친회원이 합심하여 뜻을 모아 이 비를 세운다.
2003년 7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