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룡의 독립운동가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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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충청남도 계룡시 신도안면 남선리 1296
탐방로그
계룡의 독립운동가 비는 충청남도 신도안면 신도안문화공원 내에 위치해있다. 계룡시는 광복단 비밀결사대가 태동한 지역이며 대표적인 독립유공자로는 한훈, 배영직, 김지수, 양기하가 있다. 네 분 외에도 40여분의 독립유공자가 배출된 곳이다. 계룡의 독립운동가 비 옆에는 한훈, 배영직, 김지수, 양기하의 건국훈장 독립장이 쓰여진 비석이 함께 세워져 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배영직(1882~1926. 대통령 표창)
충남 계룡 사람이다. 1919년 충남 계룡시 두마면에서 만세시위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옥고를 치렀다. 평소 민족의식이 투철했던 그는 부친 배대석과 함께 농촌자력갱생운동을 펼쳐왔고 인근의 빈민들에게 양곡을 나누어 주는 등 선행을 베풀어 주민들로부터 두터운 신망을 얻고 있던 중, 1919년 4월 1일 향리인 두마면 두계장터에서 만세시위운동에 참여하여 독립만세를 고창하는 등 활동하였다. 그는 이 일로 징역 6월을 받아 옥고를 치렀으며 그 후 1924년에도 만세시위를 하다가 체포되어 군산형무소에서 2년간 옥고를 치르고 출옥한 지 3일 만에 고문 여독으로 사망하였다고 한다. (일본군의 만행으로 가옥이 전소되어 사진자료 없음)
김지수(1845~1911. 건국훈장 애국장)
충남 계룡시 두마면 두계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광산 사계 김장생의 11대손으로 과거에는 뜻을 두지않고 사람으로서의 도리를 마음으로 터득하고 몸으로 실천하는 위기지학(爲己之學)에만 몰두했다고 하며 가문의 전통인 예학(禮學)에 밝아 인근 유림들에게 예학의 종주로 추대될 정도였다고 한다. 1900년 중추원의관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였으며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병탄한 후 지역의 원로인 그를 회유하기 위하여 노인은사금(老人恩賜金)을 주자 온갖 위협에도 불구하고 이를 단호히 거절하였다. 일제 헌병대가 그를 체포하려고 하자 망국의 한을 품은 채 자결하였다. (사진자료 없음)
계룡시 신도안면 남선리 1296 신도안문화공원 내 계룡의 독립운동가를 찾았다.
근래 만들어져서 주소가 정확하지 않고, 공원이름도 네비게이터에 등록이 않되어있다..
신도안 문화공원
이 공원은 국토교통부 개발제한구역 주민지원 사업비 지원을 받아 충청남도.계룡대근무지원단의 협조로 계룡시에서 조성하였습니다. 2014.12. 계룡시장
계룡의 독립운동가
계룡시는 도시의 규모는 작으나 광복단 비밀결사대가 태동한 지역이며 한훈, 배영직, 김지수, 양기하 외에도 40여분의 독립유공자가 배출된 충혈의 고장이다.
양기하(1878~1932. 건국훈장 독립장)
양기하(1878~1932. 건국훈장 독립장)
양기하(1878~1932. 건국훈장 독립장)
충남 계룡 사람이다. 구한말에 공주군수를 역임하였으며 1910년 일제에 의하여 국권이 침탈되자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만주로 망명한 후 교육사업에 전념하여 젊은이들에게 항일민족의식을 심어주었고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난 후에 대한독립단에 가담하여 항일운동에 적극 참여하였으며 1920년에는 광복군 사령부 선전부장, 정보국장 등으로 항일투쟁을 하였다. 1921년 상해로 가서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었고, 한국노병회 조직, 임시정부 직속 통일군정부인 참의부 조직 등의 활동과 이후 1930년을 전후해서 조선혁명당에 참여하여 혁명군을 조직, 무장항일투쟁을 지휘하였다. 양세봉, 고이허와 함께 남만에서의 마지막 무장항일투쟁의 역사를 장식한 지도자였으나, 1932년 관전현(寬甸縣)에서 일.만 군경대의 습격을 받고 장렬히 전사 순국하였다.
한훈(1890~1950. 건국훈장 독립장)
한훈(1890~1950. 건국훈장 독립장)
한훈(1890~1950. 건국훈장 독립장)
충남 청양 사람이다. 1906년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민종석 의병진에 가담하여 활약하였고, 그 후 고향인 청양을 떠나 신도안으로 이주해 항일운동의 근거지로 삼아 활동하였으며 악질 친일 직산군수를 사살하고 만주로 망명하였다. 경술국치 이후에 국내 항쟁을 목적으로 귀국하여 1913년 12월에 채기중, 유창순, 유장열, 장두환 등과 같이 풍기에서 대한광복단을 조직 광복단원으로서 전라도 오성에 있는 일본 헌병부대를 습격하는 한편, 일본군 수명을 사살하는 등 계속 활동하다가 동지들이 체포되자 재차 만주로 망명하엿으나 조국광복을 향한 의지로 다시 귀국하여 대한광복회에서 활동하였다. 1920년 8월에는 미국 하원의원단이 내한한다는 소식을 듣고 일본 총독 등 고관들을 암살하기 위해 결사대를 조직하였으나, 김상옥 등의 암살단과 합류하여 계획을 추진하던 중 체포되어 19년 6개월이라는 긴 세월을 옥고에 시달리다가 형집행정지처분으로 풀려나 신도안에 은거하면서 학병 거부자와 탈출병 등을 은신시키면서 이들에게 배일사상을 고취하는 활동을 하다가 광복을 맞았다. 해방 후 광복단을 재건해 광복정신에 기초한 자주적 독립국가의 완성을 위하여 노력하였으며, 6.25 동란 중에 북한군에게 납치 피살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