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덕리출신 항일독립항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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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한림읍 귀덕1리 복지회관
탐방로그
귀덕리출신 항일독립항쟁기는 귀덕리 출신의 독립운동가 7인의 독립운동 항쟁기를 기록한 사적이다. 본 사적에 기록된 인물로는 조봉호, 조대수, 홍원표, 김대원, 고태리, 홍성옥, 고경수가 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애국지사 김대원(金大元)

지사는 1910년 1월 25일 북제주군 한림읍 귀덕리 818번지에서 아버지 김창우 어머니 박두오의 독자로 태어났으며 슬하에는 4남2녀를 두었다. 지사는 광주고등보통학교 4학년 재학중인 1929년 6월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과 함께 대한독립을 주창하는 비밀결사인 독서회를 조직하였다. 동회는 광주지역의 항일학생운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하기 위한 것으로 전 회원을 5개조로 편성하였는데 지사는 조직교양부의 책임위원에 선임되어 항일의식을 고취하는데 앞장섰다.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지사는 광주고보생 가두시위 대열의 최선봉에서 대한독립의 당위성을 주창하였다가 일경에 피체되었다. 광주학생독립만세 시위에 대해서 1930년 5월 대구복심법원은 금고 4월 집행유예 5년형을 언도하였다. 또한 독서회 운동에 대해서는 1930년 10월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위반으로 징역 3년형이 언도되었으며 1931년 6월 대구 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르었다. 조국광복 후 지사는 초대 도의회 의원으로 피선되어 나라와 지역사회 발전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러나 늘 일제의 모진 고문 후유증에 시달렸으며 1958년 7월 19일 49세의 젊은 나이에 서거하셨으며 유해는 대전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정부에서는 지사의 공훈을 기리어 1968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애국지사 고태리(高泰利)

지사는 1912년 9월 24일 북제주군 한림읍 귀덕리(중동)에서 아버지 고창주 어머니 김여해의 4남 2녀중 4남으로 태어나 형님 태형, 태정, 태원, 누님 태인, 태신이 계셨으며 구우공립보통학교(현 한림국민학교)를 졸업한 뒤 1928년 4월 1일 제주농업학교에 입학하여 공부에 열중하면서 반일사상을 갖고 늘 우리나라의 독립을 논의하여 오던 중 졸업을 앞두고 1931년 3월 6일 일제 식민지 학교가 김원요를 퇴학, 양두옥, 신창진을 유급시키자, 7일 김원요는 퇴학 처분 이유를 담임 교사에 따지다가 일본경찰에 구속되고 9일 이에 분개한 고태리 지사 외 여섯분은 지사를 선두로 일제의 식민지 교육을 철폐해야겠다고 교무실로 달려가서 일본군 육군소위 출신인 모리다 등 일본인 교사들에게 실력으로 항쟁하니 뒤이어 전교생이 궐기했으며 일본경찰이 출동하여 고태리 지사를 비롯 김두진, 홍계표, 양치삼, 고운석, 신찬익, 양두옥, 신창진, 현도선 등 아홉분을 체포하여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 검사분국으로 송치, 1931년 8월 29일 고태리 지사에게는 징역 1년 2월이 언도되고 대구복심법원에 항소, 1932년 3월 1일 징역 1년 2월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고 1년간의 옥고를 치른 후 석방되었으나 일본경찰의 혹독한 고문 후유증으로 의식불명인채 1개월 후인 1932년 4월 9일 20세의 나이로 영면하여 어도리 지경에 안장되었다. 지사께서 순국하시자 갓 결혼했던 부인 조신생도 울화증으로 시달리다가 4년 후 뒤따라 영면하였다. 지사의 공훈을 기리어 정부는 1995년 8월 15일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애국지사 홍성옥(洪成玉)

지사는 1913년 6월 9일 북제주군 한림읍 귀덕리(성로동)에서 아버지 홍일병과 어머니 김중랑 사이에 2남 중 장남으로 태어나 슬하에 3남 2녀를 두었고 1929년 3월 구우공립보통학교(현 한림국민학교)를 졸업한 뒤 1929년 4월 5일 제주농업학교에 입학하여 공부에 열중하면서 반일사상을 갖고 늘 우리나라의 우리나라의 독립을 논의하여 오던 중 1931년 3월 6일 졸업을 앞둔 선배들을 사상이 불순하다는 이유로 퇴학 및 유급시키자 이에 항의 선배 여러분이 식민지 교육철폐 등을 외치며 실력으로 항쟁하다 경찰에 구속되자 분개한 후배들은 1931년 3월 10일 이두일, 양공팔, 고경수, 홍성옥 지사 외 일곱분이 제주시 이도리 광양송림에 모여 위와 같은 책임이 일본교장 삼기승장에 있으므로 교장에게 항의하고 식민지 교육철폐, 민족차별 반대, 구속된 선배들을 석방하라는 내용을 담은 격문을 붙이기로 결의한 후 그날 저녁에 교장 관사로 가서 실력으로 항쟁하고 곳곳에 격문을 붙이다 경찰에 열두분이 체포되어 아홉분이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 검사국으로 송치되어 1931년 8월 3일 실형이 언도되자 항소하여 1931년 10월 22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5년이 언도되어 7개월여의 옥고를 치른 후 석방되었으며 생업에 종사하다 1972년 4월 23일 광주광역시에서 영면하여 광주광역시 조선대학교 뒷산에 안장되었다. 지사의 공훈을 기리어 정부는 1993년 8월 15일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애국지사 고경수(高京守)

지사는 1916년 8월 1일 북제주군 한림읍 귀덕리(중동)에서 아버지 고문봉 어머니 진을생의 5남 1녀중 장남으로 태어나 누님 유아, 동생 경우, 경노, 경하, 경욱이 있었으며 1926년 3월 신우공립보통학교(현 애월국민학교)를 졸업한 뒤 1929년 4월 5일 제주농업학교에 입학하여 공부에 열중하면서 반일사상을 갖고 늘 우리나라의 독립을 논의하여 오던 중 1931년 3월 6일 졸업을 앞둔 선배들을 사상이 불순하다는 이유로 퇴학 및 유급시키자 여러 선배들이 이에 항의 식민지 교육철폐 등을 외치며 실력으로 항쟁하다 경찰에 구속되자 이에 분개한 후배들은 1931년 3월 10일 이두일, 홍성옥, 양공팔, 고태리 지사 외 일곱분이 제주시 이도리 광양 송림에 모여 위와 같은 조치에 관한 책임이 일본교장 삼기승장에 있으므로 이에 항의하고 식민지 교육철폐, 민족차별 반대, 구속된 선배들을 석방하라는 내용을 담은 격문을 곳곳에 붙이기로 결의한 후 그날 저녁에 교장 관사로 가서 실력으로 항쟁하고 곳곳에 격문을 붙이다 경찰에 체포되어 아홉분이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 검사분국으로 송치되어 1931년 8월 3일 징역 10월 집행유예 4년이 언도되어 5개월여의 옥고를 치른 후 석방되었으나 일본경찰의 혹독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1935년 4월 7일 19세의 나이로 영면하여 금악리 지경에 안장되었다. 지사의 공훈을 기리어 정부는 1995년 8월 15일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시혜기념비 / 이민회관건립송덕비 / 이민회관건립송덕비 / 재일교포(관서지구) 송덕비 / 재일(동경지구)교포 송덕비
고 북제주군수 신공 철주 영사비
신철주 공은 1938년 평산 신씨 계생공의 자로 태어나 마을 이서기를 시작으로 1964년 공직에 입문 30년이 되던 1994년 북제주군의 마지막 관선 군수를 역임하고 1995년 민주주의의 꽃인 지방자치시대를 맞아 주민들의 절대적 지지속에 민선 초대 군수에 이어 2대 3대 군수로 당선되어 군 발전과 주민복지 증진을 위해 모든 열정을 바치셨다.
대동단결의 정신으로 군민을 위해 최선을 다하시다 누적된 과로로 홀연히 순직하시니 그 때가 공직생활 42년째를 맞는 2005년 6월 22일로 향년 67세로 임기 1년여를 남겨둔 시점이었다.
공은 전국군단위 인구 7위, 일반 예산규모 1위를 비롯 국가 시책 및 여성동권 시대 민족정기 선양사업, 민원행정, 재난 안전관리 등 군수 재직 11년간 8회에 걸쳐 대통령상을 수상하셨고, 또한 언론사와 순수민간단체가 주관이 되어 전국 248개 광역 및 기초자치단체를 대상으로 예산, 문화, 환경, 복지능 9개의 전 부문에서 최고의 평가를 받아 한국지방자치경영 종합대상을 수상하는 최고의 업적을 이루시었다.
특히 노인과 장애인 여성등 주민복지를 군정의 최우선 역점시책으로 추진하여 주민의 삶과 질을 크게 향상시키셨고 제주항일 기념관과 제주해녀박물관 건립 정월 대보름 들불축제 제주돌문화공원 조성 저지문화예술인마을 조성 등 제주역사와 문화를 대표하는 기념비적인 사업을 추진하여 외형적 성과뿐만 아니라 군민의 정신문화와 문화예술 진흥을 위해서도 고군분투하셨다.
어느 누가 우러러 추앙하지 않을 수 있으랴. 10만군민의 충복이자 큰 스승이셨던 공은 이 시대의 진정한 행정가로써 공의 리더쉽과 도덕성은 동시대를 살아온 군민과 공직자 모두에게 오래오래 회자되며 만고의 귀감으로 남게 되리라.
우리 귀덕리 주민들은 이처럼 제주 행정사에 큰 기둥으로 우뚝서서 역사의 귀감으로 남은 삶을 우리 마을을 빛낸 가장 자랑스런 인물로 선정하고 그 혼을 대대손손 이어 기리고자 주민 모두의 뜻과 사모의 정을 모아 순직 1주년에 즈음하여 여기 영사비를 세운다.

2006년 8월 1일
김재칠 선생 감사비 / 단성비 / 귀덕1리 복지회관 건립기념비
제주시 한림읍 귀덕1리 복지회관 내 귀덕리 출신 항일독립항쟁기(抗日獨立抗爭記)를 찾아왔다.
귀덕리 출신 항일독립항쟁기.
순국선열 조봉호, 애국지사 조대수, 애국지사 홍원표, 애국지사 김대원, 애국지사 고태리, 애국지사 홍성옥, 애국지사 고경수
순국열사 조봉호(趙鳳鎬)

선열은 1884년 5월 12일 북제주군 한림읍 귀덕리(중동)에서 아버지 조만형(趙萬馨)과 어머니 김진실(金眞實) 사이에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 슬하에 2남으로 노득, 피득을 두었으며, 손(노득의 자)으로 태신, 애순, 증손(태신의 자)으로 재혁, 내양, 내영, 은혁, 은탁을 두었다. 선열께서는 일찍이 평양 숭실학교에서 수학한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서 1919년 5월에 독립희생회 연락원 김창규가 임시정부 선포문, 해외통신문 등을 가지고 와서 제주 교회 김창국 목사, 조봉호 선열, 최정식, 김창언과 접촉하면서 독립희생회를 조직하여 줄 것과 전국적으로 5천만원을 독립군자금으로 모금하고 있으니 회원은 1인당 2원을 헌납하여 줄 것을 요청받아 즉석에서 응낙하여 임시정부 선포문과 해외통신문 등을 등사하여 전도내에 배포하며 군자금 모집 활동을 폈다.
그러나 1919년 7월에 이 사실이 일경에 발각되어 선열과 최정식, 김창국, 문창래 등 관련자 60여명이 피체당하였으나 선열께서는 사건의 중대성과 동지들의 희생을 최소화하기 위하여 스스로 제주내의 군자금 모집 총책임자라고 자처하였다. 이에 따라 1919년 11월 12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형이 확정되어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가혹한 고문의 여독으로 1920년 4월 28일 옥중 순국하였으나 유해를 인수하지 못하였다. 정부에서도 선열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 건국포장 및 사라봉 모충사에 선열의 기념비를 건립하였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애국지사 조대수(趙大秀)

지사는 1906년 9월 20일 북제주군 한림읍 귀덕리(하동)에서 아버지 조휴주 어머지 김병오 사이에 3남 중 2남으로 태어나 1920년 3월 제주농업학교를 졸업하여 당시 식산은행 은행원으로 근무하면서도 항일사상을 갖고 1927년 4월 제주시 삼도리 고병희 집에서 강기찬, 고영희, 김형수와 함께 무정부주의 항일독립운동 노선의 독서회를 조직하여 매월 30전씩 거출 여러 서적 및 간행물을 구입 윤독하면서 항일사상을 높혔으며 1927년 10월에는 소비조합을 조직하여 일본상품 불매운동을 펴는 한편, 1927년 5월에는 독서회의 운영을 우리계란 조직으로 개편하였는데 우리계는 표면상 우의돈독, 애경상문, 생활향상을 표방하고 있었으나 이면에는 무정부주의사상에 의한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한 단체였다. 이러한 항일사상을 널리펴기 위하여 1929년 9월에는 각 동리에 야학을 설치하였다. 이러한 활동이 일경에 탐지되어 1930년 6월 동지들과 같이 피체되어 동년 12월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4년형을 언도받고 항소하여 1931년 7월 14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르고 귀향하여 상업에 종사하시다 1948년 12월 24일 영면하여 제주시 용강동지경에 안장되었다. 정부에서는 지사의 공훈을 기리어 1980년 건국포장을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애국지사 홍원표(洪元杓)

지사는 1909년 6월 2일 북제주군 한림읍 귀덕리(중동)에서 아버지 홍순옥과 어머니 김순랑의 4남 3녀중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동생으로는 동표, 국표, 덕낭, 덕호, 소춘이 있다. 지사는 1929년 3월 15일 제주농업학교 3년을 졸업하고 광주농업학교 4학년에 편입하였고, 재학중 1929년 6월 동교생 송두현(애월 금성 출신)등 20여명과 함께 모여 독립과 사회과학 연구를 목적으로 '항일 학생 결사 광주농업학교독서회'를 조직하였다. 지사는 동회를 통하여 항일정신을 고양하던 중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 독립운동에 가담하였고 그 후 동조직이 발각되어 1930년 1월 일경에 피체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그러나 지사는 모진 고문속에서도 뜻을 굽히지 않았고 일제는 학교 제적 및 1930년 10월 18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 유지법 및 보안법 위반의 이유로 징역 2년 6월을 선고했고, 다시 1931년 6월 1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확정하여 옥고를 치르게 했다. 그후 지사는 일본으로 건너가 1934년 11월 대판을 중심으로 다시 동지를 규합하여 '관서지방 협의회 재건준비위원회'를 구성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다가 1935년 12월 또 다시 일경에 피체되어 1936년 7월 대판지방재판소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고 귀향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혹독한 고문과 옥고의 후유증으로 1939년 2월 7일 30세의 젊은 나이에 영면하여 귀덕리 상대왕 지경에 안장되었다.
지사의 공훈을 기리어 정부에서도 1982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