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충사 의병항쟁기념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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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건입동 387-4
탐방로그
제주도 제주시 건입동 397-4 사라봉 공원 모충사에 있는 제주의병항쟁기념탑, 김만덕 할망 추모비, 김만덕의 묘를 찾았다.
모충사는 조국 독립을 위해 일본에 항쟁하다 순국한 열사와 의녀 김만덕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사당이다.
도민들의 성금을 모아 세운 사라봉 공원 내에 건립되었으며, 이 곳에는 의병항쟁기념탑, 순국지사 조봉호 기념탑, 김만덕 할망기념탑이 서 있다.
모충사 정문으로 들어와 걸어오면 상기한 세 기념탑의 안내판이 나란히 서 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격문(檄文)

사람에 세상에 태어나서 가장 소중한 것을 나라의 은혜에 대한 충성이요, 부모에 대한 효도이다. 만약 자식된 자로서 부모의 곤궁함을 구하지 못한다면 불효가 되는 것이요, 나라의 위급함을 걱정하여 나서지 않는다면 이는 불충이 되는 것이니, 이는 비록 사람이라 하더라도 금수(禽獸)와 다를 바가 없다.지금 교활한 왜적(倭賊)이 병자년(1876, 고종 13) 수호조규(修好條規) 이래 나라의 주권을 강탈하려 하고 있다. 이제 왜적의 무리가 우리 강산을 짓밟고 있으니 그대로 두면 이 강산을 송두리째 삼킬 것이요, 우리는 왜적의 노예가 될 것이니 이 어찌 좌시할 수 있으랴! 오호라! 천도(天道)가 무심하리오. 경향(京鄕) 각지에서 충의지사(忠義志士)들은 국권수호를 위하여 총궐기하였다. 이에 우리 제주도민도 진충보국(盡忠報國)하고, 자손 만대에 선롱(先壟)을 지키게 할 때가 왔다. 피끓는 충의지사여, 죽음으로써 왜적을 격퇴하고 국권을 회복하여 성은에 보답할 자는 의성(義聲)으로 합창하여 생사를 같이하자. 열혈의 충의용사는 팔뚝을 걷어붙이고 총궐기하라.

의병장(義兵將) 고승천(高承天)
의병장(義兵將) 이중심(李中心)
의병행장(義兵行狀)

1908년 고사훈(高仕訓 일명 承天(승천), 景志(경지)), 김석윤(金錫允 일명 석명(錫命), 勤受(근수)) 등에 의해 은밀히 추진된 제주의병은 1909년 2월 25일(음 2월 6일) 광양동 조병생(趙丙生)의 집에서 궐기하였다. 고사훈과 이중심(李中心)이 의병장에 추대되었으며, 거사일은 1909년 3월 3일(음 2월 12일)로 정해졌다. 이날 의병 창의자들은 '왜적을 격퇴하고 국권회복을 달성하자'는 내용의 격문과 삼읍(三邑) 이장(里長)에게 구체적인 행동지침과 '이에 응하지 않는 이장은 3족을 멸할 것'이라는 내용도 담은 통문(通文)을 화북에서 시작하여 동쪽으로 제주를 일주하며 전달하였다. 의병장 고사훈은 김만석(金萬石) 등과 대정군 영락리·신평리를 시발로 의병규합에 돌입했고, 이중심은 김석윤 등과 제주 중면(中面, 현 제주시) 중심으로 의병을 규합해 합세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의병을 규합하여 관덕적으로 향하던 고사훈·김만석이 3월 1일 광청리(현 안덕면 동광리)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고, 격문과 통문도 명월리에서 경찰에 압수되면서 제주의병은 모병단계에서 좌절되고 말았다. 일본 경찰은 의병운동이 파급을 우려하여 끝까지 항거하는 고사훈·김만석을 1909년 3월 4일 총살시켰다. 그리고 김석윤은 1심에서 10년 유배형을 받았으나, 지방유지들의 구명운동에 힘입어 2심(1909.7.22)에서 무죄 석방되었다. 이중심·노상옥(盧尙玉)·조병생·양만평(梁萬平)·양남석(梁南錫)은 도외로 탈출하였으며, 한영근(韓永根)·김재돌(金在乭)은 체포되었으나 무죄로 풀려났다. 한편 의병항쟁의 격문을 받은 구우면 두모리장 김재형(金栽瀅)은 출병에 대비하였다 체포돼 3년 유배형을 선고받았고, 신좌면 대흘리장 부우기(夫祐基)는 경찰에 연행되어 온갖 고초를 당하였으매 창의자들과 더불어 이들의 뜻도 길이 전하고자 한다.
제주의병항쟁기념탑
제주의병항쟁

제주의병항쟁은 1909년 2월 25일, 의병장 고사훈(高仕訓 일명 承天(승천), 景志(경지)), 이중심(李中心 일명 錫公(석공))과 격문 작성자로 창의에 실질적인 역할을 담당한 김석윤(金錫允 일명 석명(錫命), 勤受(근수)) 그리고 김만석(金萬石 일명 光一(광일))·노상옥(盧尙玉)·김재돌(金在乭)·양남석(梁南錫)·조병생(趙丙生)·양만평(梁萬平)·한영근(韓永根) 등 10명의 발의로 벌어졌다.
제주의병항쟁은 만인(萬人)의 의병을 규합, 1909년 3월 3일을 기하여 관덕정 광장에 집결, 일본인 관리를 축출하고 국권을 회복하고자 하였지만 모병단계에서 비밀이 탄로나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제주의병항쟁은 제주항일운동사에서 볼 때 일본 침략에 항거하는 도민의 주체적 대응이었으며, 이를 계기로 항일의식을 더욱 고취시켰다는 점에서 그 의의는 자못 크다.
이 의병항쟁기념탑은 바로 이러한 의병 창의자들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고, 이를 영원히 후세에 전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다.
제주 제주시 건입동 397-4 사라봉공원 모충사에 있는 제주의병항쟁기념탑, 김만덕 할망 추모비, 김만덕의 묘를 찾아왔다.
모충사는 조국독립을 위해 일본에 항쟁하다 순국한 열사와 의녀 김만덕을 기리기 위해 도민들의 성금을 모아 세운 사라봉 공원내에 있는 사당으로, 이곳에는 의병항쟁 기념탑, 순국지사 조봉호 기념탑, 김만덕 할망 기념탑이 서 있는 곳이다.
건립문
절해 고도 탐라섬이 백의민족과 더불어 유구한 역사를 함께 하고 있읍니다. 찬란과 퇴영, 기쁨과 독립과 발전이라는 역사의 수레바퀴에 탐라섬은 같은 숨결을 돌렸읍니다.
여기 탐라섬의 아름다운 자연환경속에 영원한 삶의 길을 걷고 있는 도민들은 역사속에 살아남아 자손만대에 귀감이 되는 고귀한 탐라의 넋을 길이 빛내고자 모충사를 마련한 것입니다.
풍전등화와 같은 비운의 강토를 빼았기지 않으려고 젊은 넋을 나라에 바친 의병들, 일본의 핍박속엣도 나라의 독립을 되찾으려고 몸부림 친 지사들, 그리고 굶주림에 지쳐 쓰러지는 백성을 홀로 구한 의로운 처녀! 이 얼마나 귀중한 우리 제주도민의 자랑이 아니겠읍니까.
우리 도민들에게 평화로운 낙원을 가꿀수 있는 삶의 터전을 지켜준 그 넋들을 우리가 잊는다면 그 누가 제주의 발전과 그리고 이 나라를 위해 피어린 싸움을 하겠읍니까.
선조들이 남겨준 기개높고 의로운 살신성인하는 정신과 선조들의 애국애족하는 마음을 흠모하고 배우며 실천에 옮겨 자랑스런 이 나라를 굳게 지키면서 발전시키는 것만이 우리 후손들이 해야할 항구적 사명인 것입니다.
제주도민은 선조의 뜻을 받들어 영원히 발전해 나갈것을 선조앞에 다짐하는 것입니다.
이에 선조의 충절과 더불어 나라와 겨레의 무궁한 발전을 위하는 도민의 정성을 모아 여기 양지바른 사라봉기슭에 제주의 얼을 빛내렵니다.
순국지사 조봉호기념비, 제주의병항쟁, 의녀반수 김만덕 묘 3 사적의 안내판이 같이 있지만 순서를 조절하였다.
제주의병항쟁기념탑
제주의병항쟁기념탑
휘호 대통령 박정희
봉헌의 글

국운이 쇠진하여 국권이 일본의 손에 넘어가려는 역사의 비운 앞에서 백의민족의 피를 이어받은 제주 젊은이들이 그 울분을 참을 수 있겠느뇨
장하도다! 제주 한라의 신비로운 기상과 더불어 자라는 우리 선조들이여? 선조들의 그 거룩한 뜻은 결코 헛되이 흘려 버릴 수 없는 귀중하고 영원히 간직하여야 할 애국애족의 산 교훈이라고 그 누가 믿지 않겠느뇨.
우리의 삶의 터전을 지키고 풍요한 역사를 창조해 가는 원동력은 원조들이 흘리고 떠나간 그 값진 생명이 있었기에 이루어지는 것이며 선조들이 남기고 간 훌륭한 교훈이 있었기에 제주의 참된 역사가 끊임없이 전진해 가는도다.
조국과 민족의 생명을 건지기 위해 목숨을 다 마친 선조들이여! 이제 제주도민은 선조들의 넋을 영원토록 받들고자 이 탑을 여기에 세우노니 고이 잠들지어라.

서기 1971년 1월 1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