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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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전라북도 진안군 진안읍 군하리 356(군하리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이재명 의사 추모의 글
죽음보다 못한삶이 허다한 세상에 죽음으로 영생을 얻은 의인이 여기있다. 진안이씨 22세손으로서 1888년에 태어나 열여섯되던해 성운의 뜻을 품고 태평양을 건넜다. 나라와 겨레가 왜적에게 짓밞혔던 1907년 공립협회 일원으로 돌아왔다.
매국노 이완용의 가슴에 비수를 꽂아 식어가던 민족정기에 불씨를 지핀 대한국인 이재명의사 왜구의 종이되어 비굴한 삶을 잇느니 장렬한 의거로 죽음을 택한 애국의 붉은 횃불이 되어 이렇게 타고 있다. 몸은 비록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갔으나 야만의 섬나라 불학무식한 자야 너는 兇(흉)자만 알고 義(의)자는 모르노냐? 나는 흉행을 한것이 아니라 의행을 한것이다. 내 생명은 뺏앗을지 몰라도 내충혼만은 결코 빼앗지 못할것이다. 사자후를 토하던 대한청년의 그 푸른 기개는 우리의 가슴에 영원히 살아있다. 오호라 삶은 무엇이며 죽음은 무엇인가? 잘못살면 죽음만 못하고 잘죽으면 도리어 길이 사나니 목숨을 던져 대의를 얻은 늠연한 생전의 그 모습을 님의 관향인 이 고을에 새겨 세워 천추의 사표로 삼으려한다.
이재명 의사 동상 건립취지문
1909년 12월 22일 오전 11시 30분 서울 명동대로에서 매국노 이완용을 응징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시며 나라 위해 목숨 바치신 이재명 의사에게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은 추허되었건만 훈장받을 후손 한 사람이 없음을 심히 안타까워하던 진안이씨 대종중과 이 고장의 뜻있는 분들이 오직 한마음 되어 2000년 3월 3일 이재명의사추모사업회를 창립하고 이어 동상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수희동참의 헌성을 다한바 국비, 도비, 군비, 자체부담으로서 동상을 건립하고 마침내 오늘 뜻깊은 제막의 날을 맞이하게 되었다.
의사는 진안을 관향으로 하는 유일한 성씨인 진안이씨 22세손이신바 님의 시조를 모신 영모재 앞에 우리고 장에서는 역사상 처음으로 순국의사의 동상을 세우고 의사의 높고 거룩한 나라사랑 겨레사랑의 정신을 후세만대에 전하고 실천할 것을 다짐하노니 우리 모두는 모름지기 옷깃을 여미고 삼가 경의를 표할지이다.
서기 2001년 월 일 사단법인 이재명의사추모사업회
고문 정세균 임수진, 이사장 안일, 이사 이충국 정인철 김정길 김봉권 성일근, 감사 송신환, 사무국장 이대열, 동상건립추진위원회, 위원장 이경선, 위원 이영갑 이성길 이정호 이두환 이요선 이수원 이석죽
안내문
이재명 의사(李在明 義士)는 1888년 평북 선천에서 출생은 하였으나 원래의 고향은 대대로 삶을 이어오고 있는 진안이 뿌리이기 때문에 이곳 진안이씨 제각 영사제 앞에 이 고장에서는 처음으로 순국 의사이신 이재명 의사의 동상을 세우게 되었다.
의사는 진안이씨 22세손으로서 1904년 "하와이"를 거쳐 도미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중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국권회복을 위하여 생명을 바칠 것을 결심하고 1907년 10월에 귀국하였다.
의사는 을사오적의 괴수 매국노 이완용을 제거하는 것이 국권수호의 첩경이라 결심하고 기회를 엿보던 중 1909년 12월 22일 오전 11시 30분 경 벨기에'의 황제 '레오폴트 2세'의 추도식에 참석하고 명동성당에서 나오는 이완용을 비수를 들고 달려들어 잡아 눕히고 허리 어깨 등을 세 번이나 찔러 유혈이 낭자하였다.
의사는 이완용이 죽은 줄로 알고 연거푸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던 중 일경에게 왼쪽 넓적다리를 찔리어 중상을 입고 피체(被逮)되었다.
매국노 이완용은 즉시 병원으로 운반되어 일경의 치료로 잔명을 보존, 경술 합병서에 날인까지 하고 일제의 일등공 신이 되어 부귀영화를 누렸으며 의사는 서울지방재판소에서 심판을 받게 되었다.
재판 첫날부터 모여드는 군중은 인산인해를 이루었으며, 재판은 공개되어 영, 미, 불 등 외국인사들도 다수 방청하였다.
재판장 塚原(총원)이 “피고와 같이 兇行(흉행)한 사람이 몇이나 되는가?"하고 물음에 의사는 눈을 부릅뜨고 “야만섬나라 불학무식한 놈아! 너는 兇(흉)자만 알았지 義(의)자를 모르느냐. 나는 兇行(흉행)이 아니고 義行(의행)을 한 것이다.”하고 고함치자 재판정 내외 방청석은 물을 끼얹은 듯 정숙하였다.
이튿날 재판이 계속되어 재판장은 “그러면 피고의 일에 찬성한 사람은 몇이나 되는가" 하니 의사는 "찬성한 사람은 이천만 민족이다”할 때 창안 창밖으로부터 "옳다"하는 소리가 폭발하였다.
7일째 의사는 이완용의 8조목에 걸친 죄악을 일일이 설파한 다음 자리에 앉으니 검사는 의사에게 사형을 구형하였고, 1910년 5월 18일 재판장 塚原(총원)이 사형을 언도하였다.
의사는 항소하였으나 재판장 楠(남)이 사형을 언도하자 재판장을 꾸짖고 “법이 불공평하여 나의 생명을 뺏기는 하나 나의 충혼을 뺏지는 못할 것이다." 하며 1910년 12월 23일 조용히 서대문 형무소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몸은 비록 가셨으나 의사의 거룩한 애국애족의 정신은 영원히 우리들의 가슴속에 살아 있으리라.
이 의거의 동모자로 수난한 이는 아래와 같다.
조창호, 이동수, 김정익 - 징역 15년, 전태선, 김병록, 김용문 - 징역 10년, 박태은 – 징역 7년, 김이걸, 이응삼, 김동현 - 징역 5년, 이연수 - 징역 1년 6월
1962년 3월 1일 이재명 의사에게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복장)이 추서되었다.
사단법인 이재명의사추모사업회
의사는 평양 선천출신이다. 의사의 본관인 진천이씨 문중에서 이곳 진안이씨의 시조의 사당앞에 동상을 건립하였다.
전북 진안군 진안읍 군하리 356 진안이씨 제각 앞 이재명의사 동상을 찾아왔다.
하지만 네비게이터가 갈 수 없는 도로 건너편으로 안내를 한다.
진한읍 군하리 463으로 설정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이재명 의사 동상 -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
이재명 의사 동상(李在明義士銅像)은 의사(義士)의 숭고(崇高한 애국충정(國情)을 기리고 후세들의 애국심(心) 함양과 민족정기(民族正氣)를 바로세우고자 이재명 의사의 관향(貫鄕)인 진안이씨(安氏) 제각 영사제(思齊) 앞(진안군 진안읍 군하리 356-1번지)에 (사)이재명의사추모사업회(李在明義士追慕事業會) 주관으로 2001년 4월 30일 건립하였으며 동상의 높이는 4.5m이고 부지면적은 990㎡(300평)이다.
이재명 의사는 1886년 평남 평양에서 진안이씨 22세손으로 출생하여 1904년 미국노동이민회사의 이민모집에 응하여 하와이에서 농부로 일하다 1906년 3월 미국으로 건너가 한인독립운동단체(韓人獨立運動團體)인 공립협회(共立協會)에 가입하여 활동하던 중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1907년 10월 귀국하여 같은 민족으로서 일제에게 나라를 파는데 앞장섰던 매국노(賣國奴)들을 먼저 처단하는 것이 국권수호의 첩경(捷徑)이라 생각하고 을사5적의 괴수인 매국노 이완용을 제거하기로 결심하였다.
이재명 의사는 1909년 12월 22일 명동성당에서 벨기에 황제 레오폴트 2세 추도식에 참석하고 나오는 이완용을 처단하려고 비수를 들고 달려들었으나 분하게도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일경에게 피체(被逮)되었다. 중상을 입은 매국노 이완용은 불행하게도 잔명을 유지하여 1910년 매국조약(賣國條約)에 도장을 찍었고 이재명 의사는 서울지방재판소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다.
이재명 의사는 재판정에서 매국노 이완용과 일제의 죄목을 통렬히 꾸짖으며 국권수호(國權守護)를 위하여 매국노 이완용 처단의 정당성을 역설하였고 애국적인 변호사 안병찬의 변호에도 불구하고 1910년 5월 18일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 자리에서 이재명 의사는 최후 진술을 통해 "너희 법이 불공평하여 나의 생명은 빼앗지만 나의 충혼(忠魂)은 빼앗지 못할 것이다. 지금 나를 교수형에 처한다면 나는 죽어 수십만의 이재명으로 환생하여 너희 일본을 망하게 할 것이다"라고 일제에게 준엄한 경고를 하고 1910년 9월 30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殉國)하셨다.
정부에서는 의사의 공훈(功勳)을 기리어 1962년 3월 1일 건국훈장(建國勳章) 대통령장(大統領章)을 추서하였고 2001년 12월 이달의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로 선정하여 의사의 공적을 되새겨 보는 계기를 가졌다.
국가보훈처(國家報臨處)에서는 이재명 의사의 공적을 영구히 기리기 위해 이 시설을 2003년 5월 31일 현충시설(顯忠施設)로 지정하였으며 국권수호(國權守護)를 위해 목숨을 바치신 의사의 숭고한 애국충정(愛國衷情)은 민족혼(民族魂)의 상징으로 우리들의 가슴속에 영원히 살아 숨쉴 것이다.
시설구분 : 독립운동관련시설 / 관리번호 : 51-1-8 / 지정일 : 2003.5.31. / 관리자 : 이수원
이재명(李在明, 1887-1910)은 평양 일신학교를 마친 뒤 1904년 미국 노동이민 모집에 응모해
하와이에서 농장 노동자로 일하다가, 1906년 다시 미국 본토로 건너갔다.
미국에서 공립협회에 가입해 활동하던 그는 1907년 7월 정미 7조약의 강제 체결소식을 듣고 비분강개하여 귀국길에 올랐다.
국권회복을 위해 일제 침략 원흉과 매국노를 처단할 것을 결심한 이재명은
1909년 1월 순종황제의 서도(西道) 순시에 동행하는 이토 히로부미 한국통감을 암살할 계획을 세웠으나
안창호의 만류로 그만두고, 항일투쟁을 위해 원산을 거쳐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갔다.
순국선열 이재명 의사 추모동상 모신 곳
이재명(李在明, 1887-1910)은 평양 일신학교를 마친 뒤 1904년 미국 노동이민 모집에 응모해
하와이에서 농장 노동자로 일하다가, 1906년 다시 미국 본토로 건너갔다.
미국에서 공립협회에 가입해 활동하던 그는 1907년 7월 정미 7조약의 강제 체결소식을 듣고 비분강개하여 귀국길에 올랐다.
국권회복을 위해 일제 침략 원흉과 매국노를 처단할 것을 결심한 이재명은
1909년 1월 순종황제의 서도(西道) 순시에 동행하는 이토 히로부미 한국통감을 암살할 계획을 세웠으나
안창호의 만류로 그만두고, 항일투쟁을 위해 원산을 거쳐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갔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의 이토 암살 소식에 고무되어 다시 귀국한 그는 평양에서 동지들과 함께
친일매국노 이완용, 송병준, 이용구 등을 암살할 계획을 세웠다.
기회를 엿보던 중 1909년 12월 22일 종현천주교회당(명동성당)에서 있을 벨기에 황제 레오폴트 2세의 추도식에
이완용이 참석한다는 신문보도를 접하고, 군밤장수로 가장하여 성당 문밖에서 기다리다가
식을 마치고 나오는 이완용을 찔러 복부와 어깨에 중상을 입혔다.
현장에서 대한독립만세를 부른 뒤 일제 경찰에 체포된 이재명은 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910년 9월 13일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이재명의사 동상 건립취지문
1909년 12월 22일 오전 11시 30분 서울 명동대로에서 매국노 이완용을 응징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시며 나라위해 목숨바치신 이재명의사에게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은 추허되었건만 훈장받을 후손 한사람이 없음을 심히 안타까워하던 진안이씨 대종중과 이 고장의 뜻있는 분들이 오직 한마음되어 2000년 3월 3일 이재명의사추모사업회를 창립하고 이어 동상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수희동참의 헌성을 다한바 국비, 도비, 군비, 자체부담으로서 동상을 건립하고 마침내 오늘 뜻깊은 제막의 날을 맞이하게 되었다.
의사는 진안을 관향으로 하는 유일한 성씨인 진안이씨 22세손이신바 님의 시조를 모신 영모재앞에 우리고장에서는 역사상 처음으로 순국의사의 동상을 세우고 의사의 높고 거룩한 나라사랑 겨레사랑의 정신을 후세만대에 전하고 실천할것을 다짐하노니 우리 모두는 모름지기 옷깃을 여미고 삼가 경의를 표할지이다.
의거후 사면을 둘러보면서, “나는 여러 동포들을 구제하기 위하여 이 일을 한 것인데 너희들은 어찌 구경만 하고 있느냐?
오늘 나는 나라의 원수를 갚았으니 통쾌하다”고 외쳤다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