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제학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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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전라북도 진안군 성수면 도통리 352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이곳 삼우당은 명문 탐진최씨의 터로 효제의 가풍이 면면히 이어나온 곳이며 또 을사조약 직후에 의열에 불타던 최제학 선생이 그 스승 면암 최익현 선생을 받들고 호남 최초로 의병 활동을 준비하던 곳이다. 선생의 자는 중열이요 호는 습재다. 1882년 3월에 아버지 성호와 어머니 흥덕장씨의 차남으로 이곳 목동에서 태어나시었다. 일찌기 불류재 이기회의 문하에 들었고 연재 송병선 송사 기우만 선생을 받들던 중 면암을 뵈옵고 흠모하여 사제간의 의리를 맺었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에 통분한 선생은 곧 면암과 송사를 찾아 구국의 계책을 품의하고 다음
해 정월에 수남 고석진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킬 방책을 마련한 뒤 면암의 뜻을 받들어 돈헌 임병찬과 초기 의병활동 주도세력을 규합할 때 돈헌은 태인의 종석 여막을 거점으로 하고 습재는 면암을 이곳 삼우당에 모시고 주서 이호용과 장수 태수 정휴탁 임실 태수 조규하 운봉 주서 박봉양 영남 면우 곽종석 화개 강두령 등과 연락하여 뜻을 모으며 형인 약천 재태와 함께 가산을 팔아 군자금을 마련하였다. 나이 25세에 소모장이 되어 순창으로 무기를 옮길 때 상여를 꾸며 일제의 눈을 피하였으니 그같은 지혜와 용기에 대하여 그때 사람들이 말하기를 면암이 없으면 습재도 없고 습재가 없었더라면 면암도 있을 수 없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녹슬은 창칼이 저들의 신예 무기를 대항할 수 있었으랴. 이때에 패전과 동시에 일광 정시해는 순국하고 왜적에게 끌려간 면암은 3년 돈헌은 2년의 형을 비롯하여 선생과 수남도. 4개월의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출옥한 선생은 대마도로 면암을 찾아 간병하다가 면암이 순국하시니 장례를 극진히 모시었다. 고향에 돌아와 고산 윤자신과 함께 다시 의병을 일으키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기회를 노려 방랑하다가 1915년 가을에 지리산 하동 청암에 들어가 은거하던 중 1959년 가을에 한 많은 일생을 마치시니 향년이 78세였다. 실로 선생은 대한제국 말기의 쓰라린
역사속에 그리고 나라를 잃은 통분속에 또 대한민국 건국 초기의 혼란속에 충렬과 정의에 몸부림 치다가 돌아가셨으니 이 의롭고 빛나는 일생을 기리어 작은 이 돌에 선생의 행적 일부나마 새겨 이 나라 자손 만대에 길이길이 전하고자 한다.

1988년 12월 20일
대한민국순국선열유족회장 최창규 지음
광복회원 정상렬 씀
판독이 거의 불가능하다.
자료에 의하면 우당팔경이 각자되어 있는데
봉포유운,낙산낙조,주소귀범,유천어화,목동초가, 지곡모연, 선대명월,인봉적설 등이라고 한다.
기념비 뒷편 바위에 많은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樂和(낙화) 石門(석문)
최제학선생의 아버지 3형제 이름이 새겨져 있다.
崔冀鎬(최기호)는 백부, 成鎬(성호)는 아버지, 明鎬(명호)는 작은 아버지가 되신다.
耽津崔氏(탐진최씨) 杖?之所(장?지소)
三友堂(삼우당)
진안을 찾아 성수면 도통리 묵동마을 삼우당터에 있는 습재 최제학선생 기념비를 찾아왔다.
위치를 문의하기 위해 성수면 사무소로 갔다.
마을을 찾아가자 손쉽게 찾을 수 있었다.
GPS상의 주소는 전북 진안군 성수면 도통리 352이다.
습재선생의 묘소는 경남 하동군 청학동에 있다.
애국지사 습재 최제학 선생 기념비
애국지사 습재 최제학 선생 기념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