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전라북도 정읍시 이평면 평령리 527
- 탐방로그
- 재실 앞에 안내판이 있지만 훼손이 심하여 거의 읽을 수가 없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김도삼 선생은 의성김씨 시조 석(錫)의 29세 손이며 임진왜란 때 의병장 오봉 제민의 11세 손으로 초명은 진정 일명 도삼이요 호는 도암 자는 치대이다. 1856년 병진년 4월 18일 정읍시 이평면 산매리에서 父 김창재 母 도강김씨의 장남으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총명하여 어떤 서적이든 한 번만 보면 암송하고 젊은 시절에는 고부향교 장의(掌議)를 역임하였으며 집필에도 능하여 박식(博識)이라 하였고 기골이 장대한 몸에 날쌘 동작으로 동학 농민군을 지휘하니 관군과 일본군의 간담을 써늘하게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김도삼 선생은 의성김씨 시조 석(錫)의 29세 손이며 임진왜란 때 의병장 오봉 제민의 11세 손으로 초명은 진정 일명 도삼이요 호는 도암 자는 치대이다. 1856년 병진년 4월 18일 정읍시 이평면 산매리에서 父 김창재 母 도강김씨의 장남으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총명하여 어떤 서적이든 한 번만 보면 암송하고 젊은 시절에는 고부향교 장의(掌議)를 역임하였으며 집필에도 능하여 박식(博識)이라 하였고 기골이 장대한 몸에 날쌘 동작으로 동학 농민군을 지휘하니 관군과 일본군의 간담을 써늘하게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또한 선생은 전봉준 정익서 등과 삼 장두(狀頭)로 1893년 11월 배들평야 농민들과 함께 갑오농민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던 보세 감면을 고부군수 조병갑에게 진정하였으나 오히려 난민의 주동자로 다스려 형벌에 체하고 3 장두의 집을 모두 불태웠다. 갑오농민혁명 당시에는 정치와 기강이 해이되고 서구세력의 거센 물결에 밀려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해 있는 나라와 백성을 구하기 위하여 제폭구민 보국안민의 기치아래 혁명결의의 내용을 각리 집강에게 보내고자 사발통문을 직접 작성하여 혈서로써 맹세하니 서명자 20명 중의 한사람이다. 각지에 격문을 부치고 의병을 소집한바 선생의 인품과 뜻을 추앙하여 수천명이 모여들어 이평면 두지리에 소재한 말목장터 감나무 밑에서 고부 관아를 습격키로 모의 죽창을 만들어 무장을 시키고 대오를 2진으로 편성하여 1진은 도사인 전봉준장군이 인솔 정익서 등과 영원면 후지리를 경유하고 2진은 부도사인 김도삼 선생이 인솔 산매리와 도계리를 거쳐 천치재를 넘어 고부에서 합세하여 고부 관아를 기습하니 조병갑 군수는 줄랑행랑을 쳤었다. 고부관아를 점령한후 억울하게 옥에 갇혀있든 죄수를 풀어주고 창고에 가득한 식량을 나누어 주니 그 은헤에 감격 하였고 의병들은 무기고를 부수고 총기로 재 무장을 시키니 사기가 충천 하였다. 이후 동학 농민군으로 다시 편성하여 선두에서 지휘 삼례까지 승승장구 진격하였으나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붙잡혀 1895년 1월 26일 전라 감영에서 40세의 나이로 천추의 한을 품고 옥사 하였으니 갑오농민 혁명의 주도적 역활을 한 선구적인 인물이다. 유족으로는 부인 밀양박씨와 두 아들 영락 정락을 두었고 증손 태수가 대를 이어가며
또한 선생은 전봉준 정익서 등과 삼 장두(狀頭)로 1893년 11월 배들평야 농민들과 함께 갑오농민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던 보세 감면을 고부군수 조병갑에게 진정하였으나 오히려 난민의 주동자로 다스려 형벌에 체하고 3 장두의 집을 모두 불태웠다. 갑오농민혁명 당시에는 정치와 기강이 해이되고 서구세력의 거센 물결에 밀려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해 있는 나라와 백성을 구하기 위하여 제폭구민 보국안민의 기치아래 혁명결의의 내용을 각리 집강에게 보내고자 사발통문을 직접 작성하여 혈서로써 맹세하니 서명자 20명 중의 한사람이다. 각지에 격문을 부치고 의병을 소집한바 선생의 인품과 뜻을 추앙하여 수천명이 모여들어 이평면 두지리에 소재한 말목장터 감나무 밑에서 고부 관아를 습격키로 모의 죽창을 만들어 무장을 시키고 대오를 2진으로 편성하여 1진은 도사인 전봉준장군이 인솔 정익서 등과 영원면 후지리를 경유하고 2진은 부도사인 김도삼 선생이 인솔 산매리와 도계리를 거쳐 천치재를 넘어 고부에서 합세하여 고부 관아를 기습하니 조병갑 군수는 줄랑행랑을 쳤었다. 고부관아를 점령한후 억울하게 옥에 갇혀있든 죄수를 풀어주고 창고에 가득한 식량을 나누어 주니 그 은헤에 감격 하였고 의병들은 무기고를 부수고 총기로 재 무장을 시키니 사기가 충천 하였다. 이후 동학 농민군으로 다시 편성하여 선두에서 지휘 삼례까지 승승장구 진격하였으나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붙잡혀 1895년 1월 26일 전라 감영에서 40세의 나이로 천추의 한을 품고 옥사 하였으니 갑오농민 혁명의 주도적 역활을 한 선구적인 인물이다. 유족으로는 부인 밀양박씨와 두 아들 영락 정락을 두었고 증손 태수가 대를 이어가며
묘소는 천태산 율목동에 자리하였으나 주변의 개답으로 150주기를 맞아 그 뜻을 기리고 후세에 교훈을 주기위해 정성을 모아 선영하에 모시니 부디 안면(安眠)하시기를 기원하면서 이 기적비를 세운다.
건립일 : 2000년 3월 1일
건립자 : 정읍시 이평면장
갑오농민혁명계승사업회 갑오농민혁명유적탐구회
글 김동언 글씨 지수 이학용
건립일 : 2000년 3월 1일
건립자 : 정읍시 이평면장
갑오농민혁명계승사업회 갑오농민혁명유적탐구회
글 김동언 글씨 지수 이학용
안내판에 300m라 되어있어서, 도로를 따라 더 들어가자 재실 앞에 안내판이 보였다.
안내판이 있지만 거의 읽을 수가없다.
김도삼선생 기적비
김도삼선생은 의성김씨 시조 석(錫)의 29세 손으로 초명은 진정 호는 도삼 자는 치대이며, 1856년 1월 18일 정읍시 이평면 산매리에서 태어났다.
1893년 11월 갑오동학농민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던 전봉준 장익서 등 배들평야 농민들과 함께 보세감면 진정서를 고부군수 조병갑에게 진정하였으나 오히려 난민의 주동자로 다스려 구속하고 옥고를 치르다 3장두(狀頭)라 하였다.
혁명 결의의 내용을 각리 집강에게 보내기 위하여 비밀 통문을 직접작성 서명하니 사발통문 서명자 20명중의 한사람으로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일본군에 붙잡혀 전주형무소에서 40세의 나이로 옥사하셨으니 1950년 이전 보관서류는 폐기되어 공초록을 볼 수 없지만 갑오동학농민혁명의 주도적인 역할을 한 선구적 인물이다.
유족으로는 중손 태수가 대를 이어가며 묘소는 천태산하 율목동에서 2000년 3월 1일에 정성을 모아 선영하에 모셨다.
김도삼선생은 의성김씨 시조 석(錫)의 29세 손으로 초명은 진정 호는 도삼 자는 치대이며, 1856년 1월 18일 정읍시 이평면 산매리에서 태어났다.
1893년 11월 갑오동학농민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던 전봉준 장익서 등 배들평야 농민들과 함께 보세감면 진정서를 고부군수 조병갑에게 진정하였으나 오히려 난민의 주동자로 다스려 구속하고 옥고를 치르다 3장두(狀頭)라 하였다.
혁명 결의의 내용을 각리 집강에게 보내기 위하여 비밀 통문을 직접작성 서명하니 사발통문 서명자 20명중의 한사람으로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일본군에 붙잡혀 전주형무소에서 40세의 나이로 옥사하셨으니 1950년 이전 보관서류는 폐기되어 공초록을 볼 수 없지만 갑오동학농민혁명의 주도적인 역할을 한 선구적 인물이다.
유족으로는 중손 태수가 대를 이어가며 묘소는 천태산하 율목동에서 2000년 3월 1일에 정성을 모아 선영하에 모셨다.
재실 너머로 묘소가 있는 곳으로 나가는 문이 보인다.
金道三先生紀蹟碑(김도삼선생 기적비)
김도삼선생은 의성김씨 시조 석(錫)의 29세 손으로 초명은 진정 호는 도삼 자는 치대이며, 1856년 1월 18일 정읍시 이평면 산매리에서 태어났다.
1893년 11월 갑오동학농민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던 전봉준 장익서 등 배들평야 농민들과 함께 보세감면 진정서를 고부군수 조병갑에게 진정하였으나 오히려 난민의 주동자로 다스려 구속하고 옥고를 치르다 3장두(狀頭)라 하였다.
혁명 결의의 내용을 각리 집강에게 보내기 위하여 비밀 통문을 직접작성 서명하니 사발통문 서명자 20명중의 한사람으로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일본군에 붙잡혀 전주형무소에서 40세의 나이로 옥사하셨으니 1950년 이전 보관서류는 폐기되어 공초록을 볼 수 없지만 갑오동학농민혁명의 주도적인 역할을 한 선구적 인물이다.
유족으로는 중손 태수가 대를 이어가며 묘소는 천태산하 율목동에서 2000년 3월 1일에 정성을 모아 선영하에 모셨다.
김도삼선생은 의성김씨 시조 석(錫)의 29세 손으로 초명은 진정 호는 도삼 자는 치대이며, 1856년 1월 18일 정읍시 이평면 산매리에서 태어났다.
1893년 11월 갑오동학농민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던 전봉준 장익서 등 배들평야 농민들과 함께 보세감면 진정서를 고부군수 조병갑에게 진정하였으나 오히려 난민의 주동자로 다스려 구속하고 옥고를 치르다 3장두(狀頭)라 하였다.
혁명 결의의 내용을 각리 집강에게 보내기 위하여 비밀 통문을 직접작성 서명하니 사발통문 서명자 20명중의 한사람으로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일본군에 붙잡혀 전주형무소에서 40세의 나이로 옥사하셨으니 1950년 이전 보관서류는 폐기되어 공초록을 볼 수 없지만 갑오동학농민혁명의 주도적인 역할을 한 선구적 인물이다.
유족으로는 중손 태수가 대를 이어가며 묘소는 천태산하 율목동에서 2000년 3월 1일에 정성을 모아 선영하에 모셨다.
金道三先生紀蹟碑(김도삼선생 기적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