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개남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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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전라북도 정읍시 산외면 동곡리 669-1
탐방로그
정읍시 산외면 동곡리 669-1 지금실마을에 위치한 김개남 장군의 묘소를 찾았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여기 상두산 품안에 포근히 안긴 하늘아래 첫마을 윗 지금실이 자리잡고 있다. 지금 이 마을 어귀에 우리의 위대한 지도자 김개남장군의 영혼이 쉬고계시다. 장군은 1853년 음력 9월 15일 도강김씨인 아버지 대흠과 어머니 익산이씨 사이에 셋째아들로 태인현 윗 지금실에서 태어나시니 어릴적의 이름은 영주였다. 장군이 태어나 자랄적에 외국 침략자들은 우리의 이권을 앗아가고 탐학한 지배자들은 온갖 부정을 저질르며 민중을 압제하고 있었다. 장군은 의혀심이 남달른 천성을 지녔고 귀천을 가리지 않고 사람을 사귀었으며 무저져 내리는 나라와 민중을 구제하려 나라와 고통에 신음하는 민중을 구제하기위해 의기를 떨쳐 동학에 입도하여ㅏ. 1894년 3월 광제창생 보국안민의 기치를 내걸고 나라와 민중을 구제하려 일어나니 반봉건 반침략의 횃불이 삼천리 강산에 타올랐드며 의기는 하늘에 뻗혔고 함성은 산하를 울렸다. 장군은 전봉준 손화중과 함께 삼대지도자로 추대되었고 장군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은 백산 황토재 황룡강에서 무도한 자들이 보낸 군대를 여지없이 무찌르고 이어 호남의 수부 전저성을 점령하였고 장군은 청과 일본의 군대가 개입하는 절박한 정세에서 만부득이 관군화 화해하고 남원에 웅거 전라좌도를 호령하였다. 장군은 그해 6월부터 10월까지 남원에서 무도한 벼슬아치와 양반 토호를 징치하고 헐벗고 굶주린 이들에게 옷과 양식을 나누어 주었다. 벼슬아치들은 벌벌 떨고 민중들은 춤을 추었도다. 이때 장군은 남조선을 개벽한다는 뜻으로 이름을 개남으로 바꾸니 그의 신념은 차돌같고 그의 용기는 하늘에 뻗혔다. 일본 침략자들이 다시 동학농민군에게 총부리를 겨누자 전봉준장군은 공주로 김개남장군은 청주로 지쳐올라가니 민중은 십만대군의 저 눈빛을 보고 함성을 들었도다. 두 장군은 침략자들의 대포앞에서 통한의 눈물을 뿌리고 발길을 돌리니 우리 민족 다시 깊은 수렁을 빠져구나 장군은 종송리(지금의 정읍군 산내면 종성리) 에서 무도한 자들에게 잡혀 전주 서교장에서 처형당하니 때는 1894년 음력 12월 초사흘 이었다. 어이할꼬 이날 하늘도 찡그리고 강산도 울었으리 장군의 유체는 효시되고 또 참혹하게 버려진바 거두는 사람도 없었다. 겨우 아내와 아들은 살아남아 숨을 죽이며 엣일을 아련히 전해주었다. 이제 백년이 넘어서다. 후손과 민주인사가 뜻을 모아 장군과 첫째부인 연안이씨 가묘로 영혼을 모시고 둘째부인 전주이씨와 합장을 해 보니시 보는 이는 옷깃을 여미고 위대한 민족지도자를 추모할 진저 외아들 익홍과 김씨부인 사이에 형제가 태어났고 환옥에게서 아들 상기 종기 성기 진기 딸 순이 공순 귀례 영님이가 환섭에게서 아들 인기 인영 딸 귀남 그리고 봉기가 태어났으니 번성하도다 장군께서는 이제 편안히 여기에 쉬시며 민족통일의 그 날을 굽어보시리. 1995년 3월1일
정읍시 산외면 동곡리 669-1 지금실마을 김개남 장군의 묘소
김개남 장군 묘
김개남 장군은 1853년 9월 15일 정읍시 산외면 동곡리 지금실에서 도강 김씨 대현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894년 3월 백산에서 전봉준, 손화중과 함께 사생을 맹서하는 창의문과 백성을 도탄에서 건지고 국가를 반석 위에 두겠다는 격문을 사방으로 보내며 동학농민군을 이끌었으며 전주화약을 맺은 뒤 남원성을 중심으로 집강소를 설치하고 전라 좌도를 평정한 후 폐정개혁을 추진하였다. 이 때 「영주」라는 본명을 "남쪽을 연다"는 뜻의 「개남」으로 바꿨다.
그해 9월 2차 기포때 관군의 요충지인 청주병영을 공격하다 실패하여 태인으로 내려와 재기를 준비하던 중 산내 종성리에서 임병찬의 고발로 관군에게 붙잡혀 서울로 압송 도중 12월 3일 전주에서 마흔둘의 나이로 유명을 달리했다.
시신을 거두지 못해 무덤마저도 없었으나 1995년 4월 김개남 장군이 살았던 이 곳에 그의 가묘와 묘비를 세웠다.
김개남 장군 묘
김개남 장군은 1853년 9월 15일 정읍시 산외면 동곡리 지금실에서 도강 김씨 대현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894년 3월 백산에서 전봉준, 손화중과 함께 사생을 맹서하는 창의문과 백성을 도탄에서 건지고 국가를 반석 위에 두겠다는 격문을 사방으로 보내며 동학농민군을 이끌었으며 전주화약을 맺은 뒤 남원성을 중심으로 집강소를 설치하고 전라 좌도를 평정한 후 폐정개혁을 추진하였다. 이 때 「영주」라는 본명을 "남쪽을 연다"는 뜻의 「개남」으로 바꿨다.
그해 9월 2차 기포때 관군의 요충지인 청주병영을 공격하다 실패하여 태인으로 내려와 재기를 준비하던 중 산내 종성리에서 임병찬의 고발로 관군에게 붙잡혀 서울로 압송 도중 12월 3일 전주에서 마흔둘의 나이로 유명을 달리했다.
시신을 거두지 못해 무덤마저도 없었으나 1995년 4월 김개남 장군이 살았던 이 곳에 그의 가묘와 묘비를 세웠다.
동학농민혁명 도강 김씨 개남 장군 묘비
여기 상두산 품안에 포근히 안긴 하늘아래 첫마을 윗 지금실이 자리잡고 있다. 지금 이 마을 어귀에 우리의 위대한 지도자 김개남장군의 영혼이 쉬고계시다. 장군은 1853년 음력 9월 15일 도강김씨인 아버지 대흠과 어머니 익산이씨 사이에 셋째아들로 태인현 윗 지금실에서 태어나시니 어릴적의 이름은 영주였다. 장군이 태어나 자랄적에 외국 침략자들은 우리의 이권을 앗아가고 탐학한 지배자들은 온갖 부정을 저질르며 민중을 압제하고 있었다. 장군은 의혀심이 남달른 천성을 지녔고 귀천을 가리지 않고 사람을 사귀었으며 무저져 내리는 나라와 민중을 구제하려 나라와 고통에 신음하는 민중을 구제하기위해 의기를 떨쳐 동학에 입도하여ㅏ. 1894년 3월 광제창생 보국안민의 기치를 내걸고 나라와 민중을 구제하려 일어나니 반봉건 반침략의 횃불이 삼천리 강산에 타올랐드며 의기는 하늘에 뻗혔고 함성은 산하를 울렸다. 장군은 전봉준 손화중과 함께 삼대지도자로 추대되었고 장군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은 백산 황토재 황룡강에서 무도한 자들이 보낸 군대를 여지없이 무찌르고 이어 호남의 수부 전저성을 점령하였고 장군은 청과 일본의 군대가 개입하는 절박한 정세에서 만부득이 관군화 화해하고 남원에 웅거 전라좌도를 호령하였다. 장군은 그해 6월부터 10월까지 남원에서 무도한 벼슬아치와 양반 토호를 징치하고 헐벗고 굶주린 이들에게 옷과 양식을 나누어 주었다. 벼슬아치들은 벌벌 떨고 민중들은 춤을 추었도다. 이때 장군은 남조선을 개벽한다는 뜻으로 이름을 개남으로 바꾸니 그의 신념은 차돌같고 그의 용기는 하늘에 뻗혔다. 일본 침략자들이 다시 동학농민군에게 총부리를 겨누자 전봉준장군은 공주로 김개남장군은 청주로 지쳐올라가니 민중은 십만대군의 저 눈빛을 보고 함성을 들었도다. 두 장군은 침략자들의 대포앞에서 통한의 눈물을 뿌리고 발길을 돌리니 우리 민족 다시 깊은 수렁을 빠져구나 장군은 종송리(지금의 정읍군 산내면 종성리) 에서 무도한 자들에게 잡혀 전주 서교장에서 처형당하니 때는 1894년 음력 12월 초사흘 이었다. 어이할꼬 이날 하늘도 찡그리고 강산도 울었으리 장군의 유체는 효시되고 또 참혹하게 버려진바 거두는 사람도 없었다. 겨우 아내와 아들은 살아남아 숨을 죽이며 엣일을 아련히 전해주었다. 이제 백년이 넘어서다. 후손과 민주인사가 뜻을 모아 장군과 첫째부인 연안이씨 가묘로 영혼을 모시고 둘째부인 전주이씨와 합장을 해 보니시 보는 이는 옷깃을 여미고 위대한 민족지도자를 추모할 진저 외아들 익홍과 김씨부인 사이에 형제가 태어났고 환옥에게서 아들 상기 종기 성기 진기 딸 순이 공순 귀례 영님이가 환섭에게서 아들 인기 인영 딸 귀남 그리고 봉기가 태어났으니 번성하도다 장군께서는 이제 편안히 여기에 쉬시며 민족통일의 그 날을 굽어보시리. 1995년 3월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