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전라북도 정읍시 덕천면 하학리 산3-5
- 탐방로그
- 갑오동학혁명기념탑은 정읍시 덕천면 하학리 산3 황토현전적지 기념관 뒷편에 위치해 있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除暴救民(제폭구민) 保國安民(보국안민)
甲午東學革命記念塔(갑오동학혁명기념탑)
甲午東學革命記念塔(갑오동학혁명기념탑)
除暴救民(제폭구민) 保國安民(보국안민)
甲午東學革命記念塔(갑오동학혁명기념탑)
甲午東學革命記念塔(갑오동학혁명기념탑)
갑오동학혁명기념탑 명문
제폭구민 보국안민과 척왜를 기치로 동학교문의 대혁가 전봉준선생의 영도 아래에서 일어난 갑오동학혁명은 우리민족의 진로에 커다란 광명을 비쳐주었다. 전봉준 선생은 동학의 조직망을 통하여 농민대중을 안어들여 우리역사상에 처음보는 대규모의 민중전선을 이룩하고 위국위민의 뚜렸한 지도이념밑에서 줄기차게 싸웠던것이니 그의 의의와 영향은 진실로 지대한바가 있다. 이 혁명은 우리 농민대중에게 정치적 의의를 꺠우쳐 주었으며 고루하고 불합리한봉건체제의 낡은 권위를 뒤흔들어 국민생활의 근대화를 촉진시켰고 제국주의 일본의 침략에 민족전선으로서 항전하여 우리의 민족정기를 현양시켜 뒷날 3.1운동의 선구를 이루었다. 이 갑오동학혁명의 거룩한 업적과 숭고한 정신을 그 뉘라서 추앙치 아니하며 찬양치 아니하랴. 갑오동학혁명이야말로 필히 세계 역사 위에 빛날 것이다.
제폭구민 보국안민과 척왜를 기치로 동학교문의 대혁가 전봉준선생의 영도 아래에서 일어난 갑오동학혁명은 우리민족의 진로에 커다란 광명을 비쳐주었다. 전봉준 선생은 동학의 조직망을 통하여 농민대중을 안어들여 우리역사상에 처음보는 대규모의 민중전선을 이룩하고 위국위민의 뚜렸한 지도이념밑에서 줄기차게 싸웠던것이니 그의 의의와 영향은 진실로 지대한바가 있다. 이 혁명은 우리 농민대중에게 정치적 의의를 꺠우쳐 주었으며 고루하고 불합리한봉건체제의 낡은 권위를 뒤흔들어 국민생활의 근대화를 촉진시켰고 제국주의 일본의 침략에 민족전선으로서 항전하여 우리의 민족정기를 현양시켜 뒷날 3.1운동의 선구를 이루었다. 이 갑오동학혁명의 거룩한 업적과 숭고한 정신을 그 뉘라서 추앙치 아니하며 찬양치 아니하랴. 갑오동학혁명이야말로 필히 세계 역사 위에 빛날 것이다.
위대한 동학혁명정신을 영원히 추앙하기 위하여 지난 8월 25일 전주에서 갑오동학혁명기념탐 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하자 강호의 많은 정성이 이에 미쳐 9월 6일에 착공을 보았고 기후 순조로운 공사 진척으로 여기에 뜻을 이루게 됨을 기뿌게 생각하나이다.
정읍시 덕천면 하학리 산3 황토현전적지 기념관 뒷편 갑오동학혁명기념탑.
안내판이 없어서 밖으로 나와서 돌아서 들어가야 한다.
안내판이 없어서 밖으로 나와서 돌아서 들어가야 한다.
갑오동학혁명기념탑(甲午東學革命紀念塔) / 위치 : 정읍시 덕천면 하학리 황토현전적지
국가문화재 자격 제295호인 황토현전적지에 세워진 이 탑은 제폭구민과 보국안민, 척왜양을 주장하며 일어선 독학농민혁명정신을 기리고, 후손에게 길이 전하기 위해서 1963년 8월에 결성된 '갑오동학혁명기념탑 건립추진위원회(위원장 : 가람 이병기)'에 서 동년 10월 3일에 세웠다.
1894년 1월 10일(양력 2월 15일) 고부봉기와 함께 시작된 동학농민혁명은 동년 3월 백산대회를 통해 동학농민군의 진용을 갖추었고, 이곳 황토현에서 동학농민군과 전라감영군이 맞선 최초의 전투가 벌어졌다. 1894년 5월 10일(음력 4.6) 저녁 무렵 시작되어, 5월 11일(음력 4.7) 새벽에 종료된 전투는 동학농민군의 대승으로 끝났다. 이를 계기로 동학농민군은 자신감을 갖게 되었으며, 혁명은 전국으로 들불처럼 확산되었다.
이 탑을 세울 당시는 '동학란'이라 불리던 시절로 '농민'의 존재와 역할보다는 '동학'의 상징성이 강하던 시절이었다. 그런 까닭에 '농민'이 빠졌으나 최초로 '혁명'이라는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기념탑 건립의 의의를 갖는다. 전서체로 새겨진 '보국안민'의 '보'는 '輔'가 맞으나 안보(安保)를 강조하던 시대 상황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保'로 새겨졌다.
국가문화재 자격 제295호인 황토현전적지에 세워진 이 탑은 제폭구민과 보국안민, 척왜양을 주장하며 일어선 독학농민혁명정신을 기리고, 후손에게 길이 전하기 위해서 1963년 8월에 결성된 '갑오동학혁명기념탑 건립추진위원회(위원장 : 가람 이병기)'에 서 동년 10월 3일에 세웠다.
1894년 1월 10일(양력 2월 15일) 고부봉기와 함께 시작된 동학농민혁명은 동년 3월 백산대회를 통해 동학농민군의 진용을 갖추었고, 이곳 황토현에서 동학농민군과 전라감영군이 맞선 최초의 전투가 벌어졌다. 1894년 5월 10일(음력 4.6) 저녁 무렵 시작되어, 5월 11일(음력 4.7) 새벽에 종료된 전투는 동학농민군의 대승으로 끝났다. 이를 계기로 동학농민군은 자신감을 갖게 되었으며, 혁명은 전국으로 들불처럼 확산되었다.
이 탑을 세울 당시는 '동학란'이라 불리던 시절로 '농민'의 존재와 역할보다는 '동학'의 상징성이 강하던 시절이었다. 그런 까닭에 '농민'이 빠졌으나 최초로 '혁명'이라는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기념탑 건립의 의의를 갖는다. 전서체로 새겨진 '보국안민'의 '보'는 '輔'가 맞으나 안보(安保)를 강조하던 시대 상황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保'로 새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