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강원특별자치도 강릉시 성산면 관음리 산51
- 탐방로그
- 한동안 위치를 알 수 없었던 청포 최선재 선생 공적비 위치를 알게 되어서 다시 강릉을 찾았다. 주소가 쉽게 검색되지 않아 어려움을 겪었지만 최선재 선생의 증손이 되시는 최근중 선생에게 연락을 드렸더니 직접 안내를 해주셨다. 최근중 선생에 의하면 선조들의 묘소를 한 곳으로 모으셨다고 한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蝶走蜂飛箇箇忙采花離落正斜陽
접주봉비개개망채화이락정사양
老牛解紛紜態但臥看山鼻息長
노우해분운태단와착산비식장
나비와 벌이 바삐 날듯이 제각기 바빠 갈길을 재촉하여 꽃피고 새우는 정든 고향에 돌아가니 어느듯 저녁무렵이 다 되었구나.
마장에 매인 황소도 주인의 황급한 모습을 알고 있기라도 하듯 누워서 먼산만 바라보며 씩씩거리고 있네
접주봉비개개망채화이락정사양
老牛解紛紜態但臥看山鼻息長
노우해분운태단와착산비식장
나비와 벌이 바삐 날듯이 제각기 바빠 갈길을 재촉하여 꽃피고 새우는 정든 고향에 돌아가니 어느듯 저녁무렵이 다 되었구나.
마장에 매인 황소도 주인의 황급한 모습을 알고 있기라도 하듯 누워서 먼산만 바라보며 씩씩거리고 있네
청포 최선재 선생 공적비를 찾기 위해 강릉을 찾았다.
주소는 강원 강릉시 성산면 관음리 산 51이 맞다.
선조들의 묘소를 한 곳으로 모으셨다고 한다.
강릉최씨(시조 휘 문한)판서공파
섬석계 주천택 묘원
섬석계 주천택 묘원
애국지사 강릉최공 휘 선재 지묘
휘 선재공 자 순경 호 청포는 휘 영길공의 장자이며 1895년 10월 4일 생하고 1953년 8월 19일 졸하다. 항일독립운동가로 강릉 기미3.1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여 10개월형의 옥고생활하셨고 1992년 4월 13일 대한민국 건국포장을 추서받았음 ...후략...
안내를 해 주신 분은 증손이 되시는 최근중 선생이시다.
애국지사 청포 최선재 공적비
기미년 즉 24세 3.1운동 당시 옥중 삼백일을 보내면서 읽은 문답책자인 독습한어지남이니 십년이 몇번 돌아오더라도 자손은 잃어버리지말고 잊어 버리지 말아야 한다.
見義勇進(견의용진)
올바른일이라 판단하면 당당하고 용맹스럽게 나가라
기미년 즉 24세 3.1운동 당시 옥중 삼백일을 보내면서 읽은 문답책자인 독습한어지남이니 십년이 몇번 돌아오더라도 자손은 잃어버리지말고 잊어 버리지 말아야 한다.
見義勇進(견의용진)
올바른일이라 판단하면 당당하고 용맹스럽게 나가라
애국지사 휘 선재공의 자는 순경이며 호는 청포이고 한학자이며 유학자이시다. 한말 국운이 쇄잔하여 일본의 침략마수로 병자년 강화도 조약의 조인 임오년 임오군란(제물포조약)의발생 갑오년 갑오경장 을미년 을미사변(민비시해)과 단발령 공포 갑진년 한일협정조약 을사년 을사보호조약 정미년 한일 신협약 경술년 한일합방조약등의 늑약으로 민족의 자주권과 국권침탈에 통탄하여 국권회복을 위해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나 투쟁하니 강릉에서도 을미의병과 정미의병이 발발하여 일본에 타격을 주었다. 공은 담산의 조대현, 김진숙, 유산의 종형제 최선근, 최선호, 초당의 최신집, 최진규,최돈옥,최영방, 박장실, 깁봉공, 유옥일, 정동면(경포동)의 유식화등과 유도진흥동지회를 조직하여 충효사상을 바탕으로 한 애국애족정신을 선양하고 강릉청년회 감리교회 안경록 담임목사 강릉보통학교 학생 이명의등과 제휴 주동하여 1919년 4월 2일 장날을 이용 태극기와 독립선언문을 만들어 오후 4시경 장터에 모인 군중 수백명을 규합 대한독립만세를 소리높이 외치며 만세시위를 전개중 이에 놀란 일본경찰이 달려와 제자하자 "적들아! 오늘부터 조선을 물러가라! 우리는 자유민임을 세계만방에 표명하노라!"하며 소리 높이 외치며 대항하다가 주동자로 일본경찰에 피검되어 함흥지방법원 강릉지청에서 보안법위반으로 징역 10월을 선고(매일신보 1919.4.14)받고 함흥감옥(원산분)에서 옥고를 치렀으며 출옥 후 국내에서 항일독립운동의 어려움을 예상하고 중국과 만주를 염두에 두고 기초를 다지고자 한어지남으로 중국말과 글 풍습을 독습하였다. 구국에 대한 열정으로 전념하여 양양의 애국지사 이종협과 편지를 교환하여 유대를 강화하였고 공자가어 상 하권(1906년 상해교경산방 간인)과 초서 소동파 만강홍사, 초서미남
궁십칠첩등의 서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상황을 파악한 것으로 사료된다. 3.1독립만세 운동의 연장으로 민족지도자들이 연합하여 결성한 신간회(1927)가 전국으로 확산될 때 신간회 강릉지회 7인의 설치준비위원(조선일보 1927.11.9)으로 창립에 기여하였으며 제1회 간사회(1927.12.3)에서 선전부 총무간사로 피선되고 즉석에서 회비로 일금 3원을 자진출연(조선일보 1927.12.8)하였다. 총무간사회(1929.1.27)에서 재정부 총무간사(동아일보 1929.2.4)로 피선되었고 정기총회(1930.12.20)에서 개선된 집행위원(조선일보, 동아일보 1930.12.25)에 피선되었으며 일본의 탄압으로 신간회 중앙본부가 해산되어 강릉지회도 3년여후 해산시까지 민족의 애국애족정신을 함양 고취하는데 전력하였다.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하고자 가족과 함께 전전하여 삼척군 삼척읍 읍중리로 이주하여 계속 항일계몽운동에 전념하니 일본경찰의 감시자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삼척경찰서의 조사를 받은 신분장지문대장(1943.11.8)이 입증하여 국권회복과 자주독립을 위하여 신명을 바친것이다. 조국이 광복된 후 3.1절과 광복절 기념식에는 성덕, 강릉초등학교 등에서 애국정신 선양에 진력하였음을 지금도 당시 강연을 듣던 인사들은 회고하기도 한다. 이에 대한민국정부에서 건국사업에 이바지 한바 크므로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선조의 위업을 돼새기면서 후세들은 옷깃을 여미고 부끄러움 없는 삶을 살아갈 것과 어떤 역경과 고행이 따른다 하여도 선조의 업적과 덕행을 본받을 것을 다짐하면서 후손으로 깊은 감사의 마음과 자긍심을 가질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