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해산 추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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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전라북도 장수군 번암면 노단리 465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전북 장수군 번암면 노단리 465 번암중학교와 초등학교 교문입구에 있는 전기홍 의병장 추모비각, 의사 전해산추모비를 찾아왔다.
전해산 대동의병장은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대동창의단을 조직하여 순창, 고창, 정읍, 함평, 나주, 영광 등지에서 71회 전투에서 수백명의 왜병을 살상하고 일시 귀향중 왜병에 체포되어 대구형무소에서 1910년 7월 19일 옥사하였으며,
그 해 9월 8 일 시신이 번암면 원촌마을 생가로 운구되자 부인 김해김씨도 자결했다.
그 후 장수유림에서는 의사 전해산 추모비를 세웠다.
전해산 대동의병장은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대동창의단을 조직하여 순창, 고창, 정읍, 함평, 나주, 영광 등지에서 71회 전투에서 수백명의 왜병을 살상하고 일시 귀향중 왜병에 체포되어 대구형무소에서 1910년 7월 19일 옥사하였으며,
그 해 9월 8 일 시신이 번암면 원촌마을 생가로 운구되자 부인 김해김씨도 자결했다.
그 후 장수유림에서는 의사 전해산 추모비를 세웠다.
의사의 성은 전씨요 천안인이니 명은 기홍이요 자는 수용이요 호는 해산으로 서기 1879년 기묘 10월 18일 출생하였다. 의사는 문학에 능통하고 품행이 단정한분으로서 부인 김씨와 장수군 번암면 대론리에서 거주하였다. 당시 국운이 불한하여 외세의 침입으로 우리국권이 폭풍앞의 등화처럼 흔들이다가 일제의 강압으로 말미아마 을사조약의 치욕을 당하자 의사는 의분한 나머지 부모와 애처를 고결하고 분연궐기하여 결사코 국권을 회복코저 이등박문에게 일제의 부당성에 대한 규탄문을 발송하고 방백수령을 비롯한 모든 공무원에게
도 부역협조하지말라는 통문을 발송함과 동시에 의병을 모집하여 호남일대를 전전하면서 일헌에 항전하여 무수한 전과를 거두던중 서기 1909년 기유 10월 일헌에 체포되어 광주감옥에 7개월간 심한 고문과 무고를 겪으면서도 백절불굴하고 그들의 취조관과 법관에게 도리혀 대성질책하다.
결국 사형선고를 받아 서기1910년 경술 5월 대구에 이송되어 동년 7월 18일 사형집행을 당하였고 동년 9월 9일 향리에 반구되었다.
한편 부인 김씨는부군의 체포됨에 제하여 추호도 당황하지 아니하고 시부모에게 효양과 상장지도를 하든중 부군의 흉음에 접하을때 역시 엄연한 태도로서 조국을 위하여 순사한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반관되자 관전에서 일곡후 자결하였다. 아 장하도다. 당시 고관자들도 외세에 아부하여 안일과 부귀의 탐뵥에 변변하였거늘 연소한 일원의 포의한사로세 일절의 사정을 버리고 최후 일각까지 구국에 헌신한 의사의 위충고절은 우리나라 삼충오렬에도 뒤지지 않을것이다.
일찍부터 애국충성에 열열하여 동분서주하시다가 후예없이 순절하였음으로 향리사람들이 의사부부를 번암면 대론리 원촌도로변에 초라한 무덤으로 매장하니 무덤은 황초로 변하여 학정 36년간 쓸쓸히 지내오든중 815광복절을 맞아 장수 유림들은 의사의 묘를 보수하고 간갈을 세웠다.
또한 이곳에 의사의 추모비각을 건립하여 기 애국정신을 길이 이어받을수있는 터전을 마련
하고저 다년부심하든중 금반정부로부터 이의 건립자금20만원의 보조를 받고 유지의 성금을 모아 이 비각을 건립하게된 것이다.
본관은 의사의 사적을 이 비석에 약기하여 기 충정을 요천수 맑은물과 더부러 영세에 전하고저 한다.
서기 1972년 11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