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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라북도 장수군 계북면 양악리 13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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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문은 제자인 한갑수님이 쓰고, 비석 및 석물은 문하생은 김승곤(전 한극학회장)과 건국대학교 제자들에 의해 세워졌으며, 부인이신 장수황씨 정숙 여사를 왼편에 모셔 합장하였으며 봉분을 둘러세운 돌들에는 한글 자음들이 새겨져 있는데 이것은 아들이신 정손모님이 고안하였다고 한다. 근처에는 선생의 기념관이 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애국지사.한글학자 건재 정인승 선생 묘비 안내
애국지사.한글학자 건재 정인승 선생 묘비 안내
2006년 정부의 애국지사 묘지 이장사업의 일환으로 건재 정인승 선생의 유해를 경기도 남양주시 모란공원에서 국립 대전 현충원 애국지사 3묘역으로 안장하였고, 묘지에 있던 비석 및 석물은 장수군 계북면 양악리 129번지 선생님의 생가 터인 이곳으로 장수군민들이 힘을 모아 이전하였습니다. 비문은 제자인 한갑수님이 쓰고, 비석 및 석물은 문하생은 김승곤(전 한극학회장)과 건국대학교 제자들에 의해 세워졌으며, 한글 자음 봉분 둘레석은 아들 정손모가 고안하였습니다. 이 장소는 선생님의 고귀한 정신과 자취를 간직한 곳으로 군민과 후손들에 의해 나라사랑.한글사랑의 뜻이 영원히 계승 발전될 것입니다.
2008년 6월 일 장수군수
2006년 정부의 애국지사 묘지 이장사업의 일환으로 건재 정인승 선생의 유해를 경기도 남양주시 모란공원에서 국립 대전 현충원 애국지사 3묘역으로 안장하였고, 묘지에 있던 비석 및 석물은 장수군 계북면 양악리 129번지 선생님의 생가 터인 이곳으로 장수군민들이 힘을 모아 이전하였습니다. 비문은 제자인 한갑수님이 쓰고, 비석 및 석물은 문하생은 김승곤(전 한극학회장)과 건국대학교 제자들에 의해 세워졌으며, 한글 자음 봉분 둘레석은 아들 정손모가 고안하였습니다. 이 장소는 선생님의 고귀한 정신과 자취를 간직한 곳으로 군민과 후손들에 의해 나라사랑.한글사랑의 뜻이 영원히 계승 발전될 것입니다.
2008년 6월 일 장수군수
정인승 약력
▷ 1897.5.19 : 장수군 계북면 양악리 129번지에서 출생
▷ 1925.3.3 :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 문학과 졸업
▷ 1925.4.1~1935.8.31 : 전라북도 고창 고등보통학교 교원 재직
▷ 1942.10.1~1945.8.17 :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함흥형무소에 수감되어 이극로, 최현배, 이희승과 함께 옥고를 치름
▷ 1945.11.1~1985.8.30 : 전북대학교 연세대학교 건국대학교 중앙대학교 등 국내 유수의 대학에 재직 및 강의
▷ 1957.10.9 : 한글학회 큰 사전 완성(최초의 한글사전)
▷ 1961.2.6~1961.9.30 : 전북대학교 총장 재직
▷ 1962.10.11 : 중앙대학교 명예문학 박사 학위 수여
▷ 1966.3.15~1986.7. : 대한민국 학술원 회원
▷ 1972.3.11984.8.31 : 건국대학교 대우 교수로 재직
▷ 1975.9.22 : 연세대학교 명예문학 박사 학위 수여
▷ 1979.1.16~1980.8.28 : 한글학회 '한글 맞춤법 통일안' 수정 위원
▷ 1986.7.7 : 별세
▷ 주요저서 및 수상 경력
사전 편찬에 관한 전반적인 문제(한글 제36호, 한글학회, 1936.8.1), 한국독본(1946.3.1), 표준 중등 말본(1949.9.15), 한글 문답(1950.1.30), 표준 옛글(1955.3.20), 표준 문예독본(1955.6.20), 표준 중등 말본(1956.3.15), 표준 고등 말본(1956.3.15), 의문해설한글 강화(1960.7.5), 표준문법(1968.2.20) 등이 있으며, 큰 사전 편찬 공로상(1957.10.9), 국어 운동 특별 공로상(1957.10.9), 대한민국학술원장(1959.7.17), 교육공로표창장(1961.9.30), 건국 공로 훈장(1961.3.1), 조국 근대화 공로훈장 모란장(1970.8.15)을 수여 받은바 있음
1996.10 : (문화체육부) 『10월의 인물』로 선정
장수군
▷ 1897.5.19 : 장수군 계북면 양악리 129번지에서 출생
▷ 1925.3.3 :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 문학과 졸업
▷ 1925.4.1~1935.8.31 : 전라북도 고창 고등보통학교 교원 재직
▷ 1942.10.1~1945.8.17 :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함흥형무소에 수감되어 이극로, 최현배, 이희승과 함께 옥고를 치름
▷ 1945.11.1~1985.8.30 : 전북대학교 연세대학교 건국대학교 중앙대학교 등 국내 유수의 대학에 재직 및 강의
▷ 1957.10.9 : 한글학회 큰 사전 완성(최초의 한글사전)
▷ 1961.2.6~1961.9.30 : 전북대학교 총장 재직
▷ 1962.10.11 : 중앙대학교 명예문학 박사 학위 수여
▷ 1966.3.15~1986.7. : 대한민국 학술원 회원
▷ 1972.3.11984.8.31 : 건국대학교 대우 교수로 재직
▷ 1975.9.22 : 연세대학교 명예문학 박사 학위 수여
▷ 1979.1.16~1980.8.28 : 한글학회 '한글 맞춤법 통일안' 수정 위원
▷ 1986.7.7 : 별세
▷ 주요저서 및 수상 경력
사전 편찬에 관한 전반적인 문제(한글 제36호, 한글학회, 1936.8.1), 한국독본(1946.3.1), 표준 중등 말본(1949.9.15), 한글 문답(1950.1.30), 표준 옛글(1955.3.20), 표준 문예독본(1955.6.20), 표준 중등 말본(1956.3.15), 표준 고등 말본(1956.3.15), 의문해설한글 강화(1960.7.5), 표준문법(1968.2.20) 등이 있으며, 큰 사전 편찬 공로상(1957.10.9), 국어 운동 특별 공로상(1957.10.9), 대한민국학술원장(1959.7.17), 교육공로표창장(1961.9.30), 건국 공로 훈장(1961.3.1), 조국 근대화 공로훈장 모란장(1970.8.15)을 수여 받은바 있음
1996.10 : (문화체육부) 『10월의 인물』로 선정
장수군
애국지사.한글학자 건재 정인승 선생 묘비 안내
2006년 정부의 애국지사 묘지 이장사업의 일환으로 건재 정인승 선생의 유해를 경기도 남양주시 모란공원에서 국립 대전 현충원 애국지사 3묘역으로 안장하였고, 묘지에 있던 비석 및 석물은 장수군 계북면 양악리 129번지 선생님의 생가 터인 이곳으로 장수군민들이 힘을 모아 이전하였습니다. 비문은 제자인 한갑수님이 쓰고, 비석 및 석물은 문하생은 김승곤(전 한극학회장)과 건국대학교 제자들에 의해 세워졌으며, 한글 자음 봉분 둘레석은 아들 정손모가 고안하였습니다. 이 장소는 선생님의 고귀한 정신과 자취를 간직한 곳으로 군민과 후손들에 의해 나라사랑.한글사랑의 뜻이 영원히 계승 발전될 것입니다.
2008년 6월 일 장수군수
2006년 정부의 애국지사 묘지 이장사업의 일환으로 건재 정인승 선생의 유해를 경기도 남양주시 모란공원에서 국립 대전 현충원 애국지사 3묘역으로 안장하였고, 묘지에 있던 비석 및 석물은 장수군 계북면 양악리 129번지 선생님의 생가 터인 이곳으로 장수군민들이 힘을 모아 이전하였습니다. 비문은 제자인 한갑수님이 쓰고, 비석 및 석물은 문하생은 김승곤(전 한극학회장)과 건국대학교 제자들에 의해 세워졌으며, 한글 자음 봉분 둘레석은 아들 정손모가 고안하였습니다. 이 장소는 선생님의 고귀한 정신과 자취를 간직한 곳으로 군민과 후손들에 의해 나라사랑.한글사랑의 뜻이 영원히 계승 발전될 것입니다.
2008년 6월 일 장수군수
전북대학교 총장. 학술원 원로 회원 / 한글학회 명예이사. 건국대학교 교수
문학박사 동래 정인승 선생 묘소 / 부인 장수황시 정숙 여사를 왼편에 모심
문학박사 동래 정인승 선생 묘소 / 부인 장수황시 정숙 여사를 왼편에 모심
전북대학교 총장. 학술원 원로 회원
한글학회 명예이사. 건국대학교 교수
문학박사 동래 정인승 선생 묘소
부인 장수황시 정숙 여사를 왼편에 모심
한글학회 명예이사. 건국대학교 교수
문학박사 동래 정인승 선생 묘소
부인 장수황시 정숙 여사를 왼편에 모심
일제의 침략 마수가 우리의 국권을 빼앗은 뒤로부터 그들의 간악한 정책이 나날이 그 도를 더해가더니 드디어 우리의 얼,말,글을 말살함으로써 우리를 뿌리없는 겨레로 만들려고 하자 이에 맞서서 겨레의 얼,말,글을 지키고 가꾸고 펴기 위하여 일생을 고스란히 불사르신 애국자 한 분이 여기 잠들어 계시니 국어학자이신 동래정공 인승(東萊 鄭公 寅承)이 바로 그 어른이시다. 공은 1897년 음력 5월 19일 전북 장수군 계북면 양악리에서 아버님 상조(相朝)공과 어머님 송성녀(宋姓女) 여사와의 사이에 둘째 아드님으로 태어나시니 보윤공 휘 지원(甫尹公 諱 之遠)의 29세손이 되시며 세조 예종 성종 3조에 걸쳐 성리학의 대가로 명성을 떨치셨고 이조판서 및 의정부 좌찬성을 역임하셨으며 돈화문 현판을 쓰심으로 명필로도 이름이 높으신 호 허백당(號 虛白堂) 시 익혜(諡 翼惠) 동래군(東萊君) 휘 난종(諱 蘭宗)의 16세손이 되시며 효로써 이름이 높으셨던 동지중추부사 휘 존성(諱 存聖)의 현손이 되시고 도청 휘 태유(諱 泰綏)의 증손이 되시며 중추원의관 자 덕윤(字 德允) 호 숙당(號 潚唐) 휘 기섭(諱 基燮)의 손이 되신다. 현부의 출중한 재덕과 치밀하게 파고드는 공의 성격이 공으로 하여금 뒷날 위대한 학자가 되게 한 원동력으로 작용하였음이 분명하리라. 1901년 향리 서당에서 한문 수학으로 비롯된 공의 배움의 길은 1925년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시던 날까지 발군의 성적으로 일관하시었다. 1925년에서 1935년까지 11년 동안 전북 고창고등보통학교 영어교사로 계시는 동안 일제가 우리의 말을 교과목에서 삭제해 버린 뒤였으나 공은 버젓이 국어시간을 교과목 가운데 편입해 놓으시고 가장 소중하고 가장 우선적인 교과목임을 주장 사시면서 심혈을 기울여 강의를 계속하시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일제는 공을 지체없이 교단에서 물러날 것을 강요하였다. 공은 자주 한글학회로 가시어서 국어사전 편찬에 정력을 쏟으시였다. 1936년에서 5년동안 「한글 맞춤법 통일안」 수정 및 기초위원 또는 한글학회기관지인 「한글」의 편집과 발행 업무를 주관하시었다. 1942년 10월에는 한글학회 활동이 「치안유지법 위반」이 된다는 이유로 함흥형무소에 수감되시어서 광복될때까지 영어의 생활을 겪으셨다. 1945년 9월부터 「우리말 큰사전」이 나올때까지 편집책임을 맡으시었고 31년에 걸쳐 한글학회 이사로 계시는 동안 문교부 문법용어 제정위원, 중앙대학교 교수, 문교부 국어심의위원으로 활약하셨으며 1961년 2월에는 「전북대학교 총장」의 중책을 맡으시어 정년으로 퇴임하시었다. 그 뒤에 문교부 한글전
용특별심의회 전문위원이 되셨으며 1962년 10월에는 중앙대학교로부터 명예문학박사학위를 받으시었고 1964년에서 8년 동안 건국대학교 교수로 계시었다. 1966년 대한민국 학술원회원 1970년 문교부 국어조사연구위원 1972년에서 13년 동안 건국대학교 대우교수 1974년 한글학회 명예이사 1975년 9월에는 연세대학교로부터 명예문학박사학위를 받으시었다. 그 뒤에 재단법인 한글학회이사 학술원 원로회원 한글학회 고문 등의 명예직을 받으시었다. 1986년 7월 7일 노환으로 눈물겹도록 외롭고 고달프면서도 의롭고 거룩하신 생애를 고요히 마치셨으니 향년 90세에 이르시었다. 90 향수를 누가 짧다 하리요. 이는 공의 생애가 너무도 외롭고 고달팠기에 슬프고 너무도 의롭고 거룩하였기에 애석하기 그지 없는 일이다. 건국공로훈장 국민훈장 노란장을 비롯 학술원장 노산문학상 외에 수많은 공로상을 받으시었다. 저서로는 「한글 독본」 「표준 중등 말본」 「표준 옛글」 「표준 문예 독본」 「표준 고등 말본」 등이 있다.
묘소 주변에 있던 둘레석이다. 한글 자음으로 형상화하였다.
건재 정인승 선생 유허비
건재 정인승 선생 유허비
일제로부터 우리의 얼.말.글을 지키고 가꾸기 위하여 일생을 불사르신 정인승 선생은 1897년 5월 19일, 장수군 계북면 양악리 양악마을에서 상조공과 송성녀 여사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셨는데, 동래군 휘 난종의 16세손이시며 동지중추부사 휘 존성의 현손과 중추원 의관 휘 기섭의 손이시다. 1925년에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시고 11년간 고창 고등보통 학교 교사로 계시는 동안 일제의 강압 속에서도 국어 교육을 고집하시다 끝내 교단을 물러난 뒤에 한글학회지 「한글」의 편집과 발행업무를 주관하셨다. 1942년 10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함흥형무소에 수감되어 옥고를 치르시다 광복으로 출감하셨다. 1945년 9월부터 「우리말 큰사전」이 나올 때까지 편집 책임을 맡으셨고, 31년에 걸쳐 한글학회 이사로 계시면서 문교부 문법용어제정위원과 중앙대교수를 역임했으며 중앙대와 연세대에서 명에문학박사 학위를 받으셨다. 학술원 원로 회원이신 선생은 전북대학교 총장직에서 정년퇴임하신 뒤에도 문교부 한글전용심의회전문위원을 맡으시는 등 평생을 우리글 가꾸시는 일을 하시다 1986년 7월 7일, 향년 90세로 거룩하신 생애를 마치셨다. 건국공로 훈장을 비롯하여 많은 포상과 「한글독본」 외 많은 저서를 남기셨다.
서기 1997년 5월 일 장수오의열현양사업회 근제 / 장수군수 김상두 후원 장수문화원장 김진영 근기 남원후인 양기홍 근서
일제로부터 우리의 얼.말.글을 지키고 가꾸기 위하여 일생을 불사르신 정인승 선생은 1897년 5월 19일, 장수군 계북면 양악리 양악마을에서 상조공과 송성녀 여사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셨는데, 동래군 휘 난종의 16세손이시며 동지중추부사 휘 존성의 현손과 중추원 의관 휘 기섭의 손이시다. 1925년에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시고 11년간 고창 고등보통 학교 교사로 계시는 동안 일제의 강압 속에서도 국어 교육을 고집하시다 끝내 교단을 물러난 뒤에 한글학회지 「한글」의 편집과 발행업무를 주관하셨다. 1942년 10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함흥형무소에 수감되어 옥고를 치르시다 광복으로 출감하셨다. 1945년 9월부터 「우리말 큰사전」이 나올 때까지 편집 책임을 맡으셨고, 31년에 걸쳐 한글학회 이사로 계시면서 문교부 문법용어제정위원과 중앙대교수를 역임했으며 중앙대와 연세대에서 명에문학박사 학위를 받으셨다. 학술원 원로 회원이신 선생은 전북대학교 총장직에서 정년퇴임하신 뒤에도 문교부 한글전용심의회전문위원을 맡으시는 등 평생을 우리글 가꾸시는 일을 하시다 1986년 7월 7일, 향년 90세로 거룩하신 생애를 마치셨다. 건국공로 훈장을 비롯하여 많은 포상과 「한글독본」 외 많은 저서를 남기셨다.
서기 1997년 5월 일 장수오의열현양사업회 근제 / 장수군수 김상두 후원 장수문화원장 김진영 근기 남원후인 양기홍 근서
우리의 얼.말.글을 일제로부터 지키고 가꾸기 위하여 일생을 불사르신 정인승 선생은 1897년 5월 19일, 장수군 계북면 양악리 양악마을에서 상조공과 송성여 여사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셨는데, 동래군 휘 난종의 16세손이시며 동지중추부사 휘 존성의 현손과 중추원 의관 휘 기섭의 손이 되신다. 1925년에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시고 11년간 고창 고등보통 학교 교사로 계시는 동안 일제의 강압 속에서도 국어 교육을 고집하시다 끝내 교단을 물러난 뒤에 한글학회지 "한글"의 편집 및 발행업무를 주관하셨다. 1942년 10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함흥형무소에 수감되어 옥고를 치르시다 광복으로 출감하셨다. 1945년 9월부터 우리말 큰사전이 나올 때까지 편집 책임을 맡으셨고 31년에 걸쳐 한글학회 이사로 계시면서 문교부 문법용어 제정위원과 중앙대교수를 역임했으며 중앙대와 연세대에서 명에문학박사 학위를 받으셨다. 학술원 원로 회원이신 선생은 전북대학교 총장직에서 정년퇴임하신 뒤에도 문교부 한글전용심의회전문위원을 맡으시는 등 평생을 우리글 가꾸시는 일을 하시다 1986년 7월 7일 향년 90세로 거룩하신 생애를 마치셨다. 건국공로 훈장을 비롯 많은 포상과 한글독본 외 많은 저서를 남기셨다.
서기 1997년 5월 일 장수5의열현양사업회 근제 2016. 재보수 서/ 장수군수 김상두 후원 장수문화원장 김진영 근기 남원후인 양기홍 근서
서기 1997년 5월 일 장수5의열현양사업회 근제 2016. 재보수 서/ 장수군수 김상두 후원 장수문화원장 김진영 근기 남원후인 양기홍 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