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오동학혁명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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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전라북도 임실군 운암면 쌍암리 617-5
탐방로그
전북 임실군 운암면 쌍암리 617-5 운암초중등 앞에 조성된 운암 3대운동기념비 중 갑오년 동학혁명을 기념하는 비이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萬石洑(만석보) 기슭에서 數千(수천)의 東學軍(동학군)을 編成(편성)하여 첫 烽大(봉기)를 든 것은 甲午正月(갑오정월) 10일, 20일께는 다시 大擧(대거)하여 白山을 占據(점거)하고 全州城(전주성)까지 陷落(함락)하여 政府側(정부측)과 和解(화해)하기에 이르렀다. 甲午 3월 25일에 起包(기포)한 北接大接主(북접대도주) 崔贊國都接主(최찬국도접주) 崔承雨接主(최승우접주) 金신종 李炳春(이병춘)은 任實(임실)에 執綱所(집강소)를 두고 12개조의 民政改革案(민정개혁안)으로 民弊(민폐)를 一掃(일소)하고 그 餘力(여력)을 오로지 地方組織(지방조직)에만 기울였다. 그런데도 不拘(불구)하고 軍國主義(군국주의) 日帝(일제)의 野慾(야욕)은 突然(돌연) 남의 나라 主權(주권)을 侵害(침해)하면서 競爭(경쟁) 相對(상대)의 淸國軍(청국군)을 敗走(패주)시키고 韓半島(한반도) 全域(전역)을 獨占(독점)하고자 날뛰게 되니 정영 國家(국가)의 命脈(명맥)이 風前燈火(풍전등화)가 되고 말았다. 이에 한동안 執綱所(집강소)를 設置(설치)하고 弊政改革(폐정개혁)과 地方(지방) 組織(조직)에 沒頭(몰두)했던 任實(임실)의 東學軍(동학군)도 다시 起包(기포)하여 南原(남원)의 都接主(도접주) 金洪基(김홍기)와 柳泰洪(유태홍)과 같이 南原(남원)에서 泰仁(태인) 金開南軍(김개남군)과 合流(합류)하고 甲午(갑오) 八月(8월)에는 東徒大將(동도대장) 全琫準(전봉준)과 全州(전주)에서 合勢(합세)하여 任實(임실)의 東學軍(동학군)은 參禮(삼례) 論山(논산)을 거쳐 公州城(공주성)을 攻略(공략)하게 되었다. 그러나 日本軍(일본군)의 增援部隊(증원부대)가 近代(근대)의 무서운 殺人武器(살인무기) 機關銃(기관총)으로 連續猛射擊(연속맹사격)을 퍼붓게 되니 惡戰苦鬪(악전고투) 三日(삼일)만에 任實東學軍(임실동학군)도 莫大(막대)한 犧牲者(희생자)를 내면서 戰友(전우)들의 屍山血河(시산혈하)를 넘고 넘어서 論山(논산) 方面(방면)으로 後退(후퇴)하였다. 甲午八月(갑오8월) 南原山東面(남원산동면) 後谷(후곡) 女院峙(여원치)에서 數千名(수천명)의 東學軍(동학군)이 戰死(전사)하였고 南原(남원)의 都接主(도접주) 金洪基(김홍기)는 甲午(갑오) 十二月 二十七日(12월 27일) 李應白(이응백)에게 逮捕(체포)되어 乙未(을미) 二月 十三日 (2월 13일) 斬首刑(참수형)을 당하고 崔承雨(최승우) 崔由河(최유하) 金學遠(김영원) 金榮遠(김영원) 韓永泰(한영태) 崔東弼(최동필)은 淳昌回文山(순창회문산)까지 敗走(패주)하여 이곳에서 蟄居生活(칩거생활) 6년 만에 겨우 生命(생명)을 維持(유지)하였다. 그러나 任實(임실)에서 東學軍(동학군)이 起包(기포)한지 九十年 (90년) 만에 새삼 東學革命(동학혁명)의 殉國精神(순국정신)을 오늘에 되살리면서 잠든 그님들의 넋을 달래기 爲하여 이 비를 세우노니 千秋萬代(천추만대)의 後孫(후손)들은 이 偉大(위대)한 革命精神(혁명정신)을 이어 받아 힘차게 宣揚(선양)하라.
甲午東學革命 接主 接司名單 (갑오동학혁명 접주 접사 명단)
北接大接主崔贊國(북접대접주최찬국).
道接主崔承雨(도접주최승우).
接主金榮遠(접주김영원). 金學遠(김학원). 韓永泰(한영태). 崔由河(최유하). 崔東弼(최동필). 許善種(허선종) 趙錫烋(조석효) 李炳春(이병춘) 朴京武(박경무). 林德弼(임덕필). 黃熙榮(황희영).李鍾勤(이종근) 林再洙(임재수). 梁경보. 嚴종성. 文吉鉉(문길현). 李萬化(이만화). 李용거. 李병용. 鄭士會(정사회). 韓君正.(한군정) 崔鳳頊(최봉욱) 崔鳳九(최봉구). 朴廷喚(박정환). 朴成根(박성근). 金茂龍(김무용). 朴準承(박준승). 楊化三(양화삼). 崔鳳商(최봉상).
接司(접사) 金敎弼(김교필). 李鍾鉉(이종현). 李龍洙(이용수).朴萬澤(박만택). 宋光浩(송광호). 金景煥(김경환). 申鶴來(신학래). 崔賢弼(최현필). 崔學弼(최학필). 崔權瑞(최권서). 萬成五(우성오). 崔宗箕(최종기). 李治悅(이치열). 全勇琦(전용기). 李龍必(이용필). 李昌化(이창화). 李白雨(이백우). 李鍾仁(이종인). 崔太瑞(최태서). 李化先(이화선). 鄭相容(정상용). 白弼煥(백필환). 李光儀 (이광의). 姜喜鎭(강희진). 鄭相悅(정상열). 金判奉(김판봉). 李鍾文(이종문)
接主(접주) 崔鎭學(최진학)

비문 출처 : 천도교 전주교구 카페
전북 임실군 운암면 쌍암리 617-5 운암초중등앞 운암 3대운동기념비(기미 3.1운동, 갑오 동학혁명, 무인 멸왜운동)

갑오동학혁명은 부패 척결과 내정 개혁을 기치로 갑오년(1894년) 동학 지도자들과 동학 교도 및 농민들에 의해 일어난 민중의 무장 봉기를 가리키며, 크게 1894년 음력 3월의 고부 봉기(제 1차)와 음력 9월의 전주·광주 궐기(제 2차)로 나뉜다.

무인멸왜운동은 1930년대 후반 천도교 구파를 중심으로 전개된 멸왜기도운동을 말한다.
1938년 무인년 일제가 관련자들을 체포하고 탄압해 세상에 알려지게 된 운동이기 때문에 무인멸왜운동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운암 3대 운동기념비
이 기념비는 동학농민운동과 3.1독립운동, 무민 멸왜운동을 기념하기 위하여 천도교 후손들의 대표인 최동안 김정갑 선생의 주도로 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1983년 6월 17일 후손들의 부담과 각계의 후원금에 힘입어 총공사비 1,170만원 들여 3대운동기념비를 건립하였다. 운암은 임실동학의 발상지로서 최찬국, 최승우, 김영원, 김학원, 한영태,송광호, 이용수, 이종필,최유하,신학래,최봉상등 많은 동학지도자들을 배출한 곳이기도 하며 운암에서 3.1만세운동이 가장 먼저 일어나 조직적인 참여로 6개월 여간 전 군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또한 멸왜 운동에는 박영창, 최종기, 김한경, 정상열, 박성언등이 105일 특별 기도를 봉행하였으며 그 후 5년간 통상 심고를 실행하여 오던 중 1938년 무인년에 해주에서 발각되어 황해도 경찰국에 검거되었으며 임실에서는 최종기, 김한경, 박성언 등이 검거되어 옥고를 치루었다. 멸왜운동은 8.15해방까지 비밀리에 전개되어 민족의 독립을 위한 초석을 다지는데 많은 기여를 하였음은 물론 후손들에게 나라사랑과 자주독립 정신의 표상이 되고 있다.
甲午東學革命 紀念碑(갑오동학혁명 기념비)
慶州(경주) 龍潭(용담)에서 發祥(발상)한 東學(동학)은 侍天主(시천주)의 價値觀(가치관)을 이 세상에 定立(정립)키 위하여 모진 强壓(강압)과 갖은 迫害(박해)를 받았고 殉道(순도)가 뒤 딸았다. 壬辰年(임진년)에 參禮(삼례)에서 蹶起(궐기)한 伸冤運動(신원운동)은 東學運動(동학운동)의 嚆矢(효시)인 同時(동시)에 世界史的(세계사적)으로 非暴力示威(비폭력시위)의 萌芽(맹아)이었다. 大神師(대신사)가 天命(천명)으로 無極大道(무극대도)를 받아 死地(사지)에 빠져 있는 人類(인류)를 救濟(구제) 하려다가 左道亂政(좌도난정)의 罪目(죄목)으로 斬刑(참형)을 당하신 것이 抑鬱(억울)함을 펴자는 것이 伸冤運動(신원운동)의 表面的(표면적)인 理由(이유)이고 先天(선천)의 그릇된 價値觀(가치관)에 基因(기인)하여 人間精神(인간정신) 深層(심층)에 깔려 있는 怨恨(원한)을 풀어서 侍天主(시천주)의 價値觀(가치관)으로 바꾸자는 것이 그 裏面的(이면적)인 理由(이유)이었다. 그러한데 대신사의 伸冤運動(신원운동)은 아직 이룩하지 못하고 世界의 存亡(존망)까지 몰고 온 兩極思想(양극사상)의 絶壁(절벽)에 부딛치고 있다. 그러므로 甲午東學革命運動(갑오동학혁명운동)은 壬辰年(임진년) 參禮(삼례)에서 처음 일어난 伸冤運動(신원운동)의 擴散(확산)이며 延長(연장)이었다. 民族的(민족적) 矛盾(모순) 斥洋斥倭(척양척왜)와 階級的(계급적) 矛盾(모순) 除暴救民(제폭구민)을 함께 克服(극복)키 위하여 後天開闢(후천개벽)의 革命情神(혁명정신)으로 武裝(무장)하고 接主(접주) 全琫準(전봉준)이 湖南(호남)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