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요정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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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전라북도 임실군 운암면 선거리 713-3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삼요정(三樂亭)
삼요정(三樂亭) / 관리번호 52-1-28 / 관리자 유족대표 / 국가보훈처지정 현충시설
- 삼요정(三樂亭)은 독립운동가이신 삼혁당(三革堂) 김영원(1853-1919)선생께서 1883년(계미년) 봄에 우국우민의 일념으로 사재를 내어 임실군 운암면 선거리 713-6번지에 건립한 민족정신과 애국교육의 역사적 현장이다. 임실지역 3.1독립운동의 중심인 삼요정(三樂亭)이라는 이름은 첫째, 산과 물이 잘 어울려 자연환경이 좋은 곳이고, 둘째. 학문을 연마하기에 좋은 곳이며 셋째, 애국정신을 고취하기에 좋은 곳이라는 뜻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 삼요정(三樂亭)은 김영원 선생의 우국우민의 이념의 실천을 위한 민족교육의 출발점이었고, 1904년(갑진년)에 전주에 창동학교(昌東學校)를, 1906년에 임실 청웅에 삼화학교(三和學校)의 건립으로 이어져 근대식 개화교육의 선봉이 되기도 하였다.
- 김영원 선생은 삼요정(三樂亭)의 문하생이었던 박준승, 양한묵 등 두 제자를 민족대표 33인으로 참여케하고, 그 자신은 전라북도 3.1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는 한편 임실지역 책임을 맡아 동지들과 함께 삼요정(三樂亭)에 모여 비밀연락 및 회합, 밀의 등 3.1독립만세운동을 계획 실행하다 왜경에 체포되어 1년형을 선고받았다. 뒤이어 체포된 동지들이 왜경의 혹독한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주모자가 김영원이라 자백하여 김영원 선생은 일제의 혹독한 고문으로 안타깝게 1919년 8월 26일 순국하셨다.
- 김영원 선생의 우국우민의 정신은 삼혁당(三革堂)이라는 호에서도 잘 나타나는데 삼혁당은 첫째, 반외세, 반봉건의 기치를 내건 동학혁명에 참여했고, 둘째, 1904년(갑진년)에 자신의 머리를 깍고 스스로를 혁명했으며 셋째, 민족독립을 위해 3.1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여 세번의 혁명을 이룩하였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 민족교육의 요람인 삼요정(三樂亭)은 김영원 선생의 옥중순국 후 독립운동의 발상지라는 이유로 일제에 의해 1921년 강제 철거되었다. 임실군에서는 김영원 선생의 민족교육과 애국애족의 출발지요 살아있는 역사교육의현장으로 삼고 그 숭고한 뜻을 기리고자 2002년 10월 29일 지금의 자리에 삼요정(三樂亭)을 복원하엿으며, 정부에서는 김영원 선생의 애국애족 정신을 기리어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국가보훈처에서는 삼요정(三樂亭)을 2003년 12월 8일 현충시설로 지정 관리하고 있다.
2008년 10월 일 건립 / 삼요정 - 약 200미터 김영원 선생 묘소 - 약 1킬로미터
삼요정 →
삼요정(三樂亭)
관리번호: 52-1-28 / 관리자: 유족대표 김창식 / 소재지: 임실군 운암면 선거리 713-3
삼요정은 김영원 선생이 올바른 민족정신을 배양하고 후학양성에 매진하고자 1883년 임실군 운암면에 건립하였으며, 이후 민족교육의 출발점이자, 1904년 전주에 창동학교, 1906년 임실 청웅에 삼화학교의 건립으로 이어지는 근대식 개화교육의 선봉이 되었다.
김영원 선생은 삼요정의 문하생이었던 박준승, 양한묵 등 두 제자를 민족대표 33인으로 참여시키고 그 자신은 전북 3.1독립운동을 주도하는 한편 임실지역 책임을 맡아 동지들과 함께 삼요정에 모여 비밀 연락 및 회합, 밀의 등 3.1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실행에 옮기던 중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1년형을 선고받았으며, 일제의 혹독한 고문으로 1919년 8월 26일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으며 국가보훈처에서는 삼요정을 2003년부터 현충시설로 지정.관리하고 있다.
3.1만세운동의 정신적 지주 김영원(金榮遠) 선생 / ○ 관리자 : 임실군 동학농민혁명 유족회
3.1독립만세운동의 정신적 지주인 삼혁당 김영원 선생은 철종4년(1853) 8월 5일 임실군 운암면 선거리 시목동에서 부 김성집과 모 진주하씨 사이에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자는 화경 도호는 원암이며 세 번째 호는 삼혁당이다. 본관이 경주인 김영원 선생은 3살 때 부친을 여의고 15살에 모친마저 별세하였다. 그러나 유년기부터 농사일을 하면서도 주경야독하는 향학열로 그의 학문은 제자백가설에 이르렀다. 김영원 선생의 학문은 20세를 전후하여 유학자로서의 자리를 잡았으며, 고종 15년(1878) 26세때 정읍군 칠보의 무성서원 장의로 선출되었고, 이듬해에 전라도 서원의 색장이 되었다. 김영원 선생은 이 무렵 대과에 급제한 웅지를 품었으나 뇌물과 매수로 합격되는 부정부패를 보면서 통분해하엿으나 모든 것을 접고 올바른 민족정신과 애국 교육을 위한 후학 양성에 매진하였다. 선생께서는 1883년(계미) 봄에 사재를 털어 우국우민의 일념으로 고향인 선거리 시목동 선무봉 아래에 기미면 3.1독립만세운동의 중심지였던 삼요정을 세웠다. 김영원 선생의 우국우민 정신은 삼혁당이라는 호에서도 잘 나타나는데 삼혁은 첫째, 반외세, 반봉건의 기치를 내건 동학혁명에 참여하였고, 둘째 1904년(갑진)에 자신의 머리를 깎고 스스로를 혁명하였으며, 셋째 민족 독립을 위해 3.1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여 세 번의 혁명을 이룩하였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임실지역 3.1독립운동의 중심지였던 '삼요정'이라는 이름은 첫째 산과 물이 잘 어울려 자연환경이 좋은 곳이고, 둘째, 학문을 연마하기에 좋은 곳이며, 셋째 애국정신을 고취하기에 좋은 곳이라는 뜻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 삼요정은 김영원 선생의 우국우민의 이념을 실천하기 위한 민족교육의 출발점이었다. 따라서 1904년(갑진)에 전주에 창동학교를, 1906년에 청웅면 고구리에 삼화학교를 건립하여 근대 개화교육의 선봉이 되기도 하였다. 김영원 선생은 삼요정의 문하생이었던 박준승, 양한묵 등 두 제자를 3.1독립만세운동의 민족대표 33인으로 참여케 하였고 그 자신은 전라북도 3.1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는 한편 임실지역 책임을 맡아 동지들과 함께 삼요정에 모여 비밀연락 및 행동요령 등을 밀의하고 실행에 옮기다가 왜경에 체포되어 1년형을 선고받았다. 뒤이어 체포된 동지들이 왜경의 혹독한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주모자가 김영원이라는 자백으로 인하여 선생은 다시 혹독한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안타깝게도 1919년 8월 26일 순국하였다. 민족교육의 요람인 삼요정은 김영원 선생의 옥중 순국 후 독립운동의 발상지라는 이유로 일제에 의하여 1921년 강제 철거되고 말았다. 임실군에서는 김영원 선생의 민족교육과 애국애족의 발상지요 살아있는 역사교육의 현장으로 삼고 그 숭고한 뜻을 기리고자 2002년 10월 29일 이곳에 삼요정을 복원하였으며, 정부에서는 김영원 선생의 애국애족정신을 기리어 1919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그 후 국가보훈처에서는 2003년 12월 8일 삼요정을 현충시설로 지정 관리하고 있다.
삼요정(三樂亭)
三樂亭 復元 紀念碑(삼요정 복원 기념비)
三樂亭 復元 紀念碑(삼요정 복원 기념비)
삼요정서(三樂亭序)
여기 선무봉 아래 감나무골(杮木洞) 아늑한 곳에 자리잡은 삼요정(三樂亭)은 이 고장 민족 교육의 요람이다. 나라가 외침으로 고통을 받고 있을 때인 계미년(1883년) 봄에 삼혁당(三革堂) 김영원(金榮遠, 1853~1919) 선생께서 사재를 내서 설립하여 이 고장의 자제들을 모아 교육시켰던 유서 깊은 곳이다. 그 이름의 유래는 첫째 산과 물이 잘 어울려 자연환경이 좋은 곳이고 둘째 학문을 연마하기에 좋은 곳이고 셋째 애국정신을 고취하기에 좋은 곳이라는 뜻이다. 옛 선비들이 그저 산수를 벗하여 음풍농월(吟風弄月)을 즐긴 요산요수(樂山樂水)가 아니라 민족이 처한 당면의 현실을 반영하였다. 이 세 가지가 바로 삼요정의 교육 이념이었다. 김영원 선생은 나라가 위기에 처한 시대에 임실군 운암면 선거리에서 태어나서 교육자이시며 혁명가이시며 독립투사의 처절한 삶을 살았다. 김영원 선생은 조실부모한 뒤에 학문 연마에 정진하여 이름 높은 선비로 무성서원의 장의를 맡아보았고 썩은 나라를 바로 잡고 외국 침략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동학의 보국안민(輔國安民) 척양척왜(斥洋斥倭)의 기치 아래 감연히 뛰어들었다. 그리하여 임실 접주로 여러 교도를 이끌고 삼례집회 보은취회에 참여하였으며 동학지도자들과 함께 동학의 공인과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 선생의 신원(伸寃)을 위해 서울 광화문 앞에서 상소운동을 전개하였다. 1894년 갑오년 봄, 동학농민혁명이 발발하자 김개남 대접주 최승우 도접주와 함께 백산 봉기에서 시작하여 농민군 주력부대에 합류하여 황토재 황룡천
전주 입성 전투에 앞장서 참여하였다. 이해 6월에 집강소(執綱所) 활동이 시작되자 최승우 도접주와 함께 임실 도소(都所)를 설치하고 온갖 폐정을 바로잡는 집강 업무를 수행하였으며 이어 7월 15일 남원대회에 동지들을 이끌고 참여하여 동학농민혁명의 기세를 올렸다. 7월과 8월 사이에는 임실 동학농민군 3천여 명을 이끌고 처절한 남원성 전투를 이끌었다. 2차 봉기가 일어날 시기인 10월 중순 전봉준 장군이 공주성을 공격하고 김개남 장군이 청주성을 공격할 때 양쪽에 병력을 나누어 보내고 최승우와 함께 남우너성을 지켰다. 11월 14일 민보군과 벌인 운봉전투에서 패전하고 이어 일본군이 들어오자 최승우 등 10여명의 접주들과 함께 회문산 속으로 들어가 6년동안 숨어살았다. 김영원 선생은 1900년경부터 동학 재건운동에 나섰으며 나라가 망해가자 상투머리를 자르고 교육운동에 나섰다. 평새으이 동지인 최승우(崔承雨) 선생의 지원을 받아 1904년 갑진(甲辰)년 전주에서 창동학교(昌東學校)를 설립하여 교장을 맡았으며 이어 1906년 임실군 청웅면에서 삼화학교(三和學校)를 설립하여 교장을 맡아 정열적인 교육자의 길로 나섰다. 창동학교와 삼화학교는 삼요정의 전통식 교육을 지양하고 근대식 개화교육으로 전환하였다. 마침내 나라가 일제에 병탄되자 김영원 선생은 비분강개하여 3일동안 단식하면서 일제에 항거하였다. 이때 아버지의 뜻을 충실히 받들던 장자 교민(敎民)이 분사하는 가정의 불행마저 겪었다. 천도교 본부에서 삼일만세운동을 계획할 때 이에 동참하여 박준승(朴準承) 양한묵(梁漢默) 등 두 제자를 민족대표 33인으로 내보내고 자신은 노구를 이끌고 내려와 전라북도의 만세운동을 주도하고 이어 임실군의 책임을 맡아 임실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김영원 선생의 수많은 동지와 제자들이 전주와 임실 등지에서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김영원 선생은 주모자로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전주 감옥에서 모진 고문을 받은 끝에 1919년 8월 26일에 옥사하셨다. 김영원 선생은 67세의 노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애국애족의 정신으로 일선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장렬하게 순국하였던 것이다. 그의 혁명 정신은 삼혁당이라는 호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삼혁당은 첫째 반봉건 반침략의 기치를 내건 동학농민혁명에 뛰어들었고 둘째 머리를 깎고 새로운 역사 대열에 동참하였고 셋째 민족독립을 위해 삼일만세 운동을 전개하여 세 번에 걸친 혁명을 이룩하였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일제는 이 거룩한 정신을 훼손하려 끝내 1921년 무도하게도 민족 교육의 요람인 삼요정을 강제로 헐어버렸다. 김영원 선생의 민족교육운동은 삼요정에서 출발하였으니 삼요정은 선생의 혼이 응결되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삶의 지표가 될 것이다. 더욱이 이곳에서 민족대표인 박준승 양한묵 등 두 애국자와 수많은 독립지사를 길러냈으니 민족의 표상이 되고도 남을 것이다. 우리 후손들은 애국애족의 민족정신을 이어받아 조국통일에 매진해야 할 것이다. 이제 헐어진지 80여 년 뒤에 이 고장의 뜻있는 인사들이 삼요정을 복원하여 자라나는 후손들에게 애국정신의 징표로 삼으려 하니 이를 기리는 바이다.
2002년 여름에 선열의 정신을 받들어 통일을 염원하며 이이화(李離和) 삼가 사적을 적다.
임실군 운암면 선거리 713-3 삼요정을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