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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라북도 임실군 성수면 오봉리 산1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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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실군 성수면 오봉리 산 130-1 소충사 기념관에 일제 강점기때 파손된 정재 이선생 유허비 원본이 전시되고 있다고 해서 찾았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유허비. 파손된 일부분 실물 전시
비석은 아들인 이원영을 비롯하여 뜻을 같이한 유지들이 세웠는데 비석 전면은 정재이선생유허비 (靜齋李先生遺墟碑)라고 되어있으며, 비문을 지어 1938년 11월 29일에 세웠다. 그러나 당시 세운 유허비는 일본강점기인 1941년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비석의 음기에 기록된 사람들 일부가 체포되고 일부는 수배되었는데 이에 가담한 사람들 중 아들 이원영을 비롯하여 6명이 현장에서 체포되어 ‘분묘제사초상등 취체령 위반’으로 투옥되어, 이원영은 징역 10월, 박원충, 심한경, 이존칠, 이현승, 이맹호, 최병섭이 각각 4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잡히지 않은 나머지 사람들은 도피하여 화를 면했다.
그때 세워진 유허비는 일본인들이 파손하여 없앴으나, 해방 후 찾아보니 윗부분은 없고 아래 부분만 발견되어 현재 소충사 기념관에 보관하고 역사의 증거물로 전시 중에 있다. 출처 : 임실군지
그때 세워진 유허비는 일본인들이 파손하여 없앴으나, 해방 후 찾아보니 윗부분은 없고 아래 부분만 발견되어 현재 소충사 기념관에 보관하고 역사의 증거물로 전시 중에 있다. 출처 : 임실군지
체포와 순국
1909년 8월 임실 전투에서 패하자 정재는 의진을 해산한 뒤 잠행 유랑하던 중 1912년 겨울 임실군 성수면 삼청리에서 한인형사인 김대형에게 피체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한 후 살인, 방화, 강도 등의 죄목으로 기소되었다. 1914년 1월 12일에 전주지방법원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그해 4월 대구에서 교수형을 받아 순국(당시 37세)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이석용은 전주지방법원에서 공판을 받을 때, 거의의 목적을 '일인을 배척하기 위해서'라고 밝혔으며, 일본의 신민이 되지 않겠냐는 질문에 '차라리 대한의 닭이나 개가 될지언정 너희 나라 신민이 되기를 원치 않는다.'고 했다 한다. 또한 정재는 재판정에서 원수에 대해 경의를 표할 수 없으므로 기립할 수 없다고 끝까지 꿋꿋한 기개를 굽히지 않고 사형 선고를 받았다. 이러한 정재의 반일의식과 애국의지를 기리기 위해 비밀리에 성수면 삼봉리에 유허비가 세워졌으나 일제에 발각되어 비는 파괴되고 정재의 아들 원영은 2년간 옥고를 치루었다.
1909년 8월 임실 전투에서 패하자 정재는 의진을 해산한 뒤 잠행 유랑하던 중 1912년 겨울 임실군 성수면 삼청리에서 한인형사인 김대형에게 피체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한 후 살인, 방화, 강도 등의 죄목으로 기소되었다. 1914년 1월 12일에 전주지방법원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그해 4월 대구에서 교수형을 받아 순국(당시 37세)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이석용은 전주지방법원에서 공판을 받을 때, 거의의 목적을 '일인을 배척하기 위해서'라고 밝혔으며, 일본의 신민이 되지 않겠냐는 질문에 '차라리 대한의 닭이나 개가 될지언정 너희 나라 신민이 되기를 원치 않는다.'고 했다 한다. 또한 정재는 재판정에서 원수에 대해 경의를 표할 수 없으므로 기립할 수 없다고 끝까지 꿋꿋한 기개를 굽히지 않고 사형 선고를 받았다. 이러한 정재의 반일의식과 애국의지를 기리기 위해 비밀리에 성수면 삼봉리에 유허비가 세워졌으나 일제에 발각되어 비는 파괴되고 정재의 아들 원영은 2년간 옥고를 치루었다.
임실군 성수면 오봉리 산 130-1 소충사 기념관에 일제 강점기때 파손된 정재 이선생 유허비 원본이 전시되고 있다고 해서 찾아가고 있다.
소충사(昭忠祠)
소충사는 구한말 호남의병장 이석용 선생을 중심으로 그와 함께 의병 활동을 한 28의사의 위패를 모셔놓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선생의 호는 정재이고 자는 경항이며 본관은 전주이다. 임실군 성수면 삼봉리에서 아버지 봉선과 어머니 조양임씨 사이에 3대독자로 태어난 선생은 어려서부터 배움에 나아가 유가의 경전과 역사서를 비롯하여 제자백가서에 능통했다고 한다. 국운이 기울기 시작한 구한말 일제 강압에 의하여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여러 우국지사들과 함께 조약의 무효화 투쟁을 하였으며, 1906년 일제가 내정간섭을 강화하자 임실을 비롯하여 진안, 장수, 순창, 남원, 곡성, 함양 등지를 돌며 동지를 규합하고 일제에 항거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그 후 1907년 진안 마이산 입구 용암에서 500여명의 군중을 모아놓고 '호남의병창의동맹단'을 결성하고 의병장이 되어 28명의 통솔조직을 구성 발표하였으며, 그 다음날 진안읍을 습격으로 2년여에 걸쳐 일본군과 맞싸워 많은 전과를 올렸다. 하지만 일본군의 강력한 대응과 토벌작전에 못 견디어 1909년 3월 6일 의병대를 해산하고 말았다. 이석용 의병장은 1912년 다시 '임자동밀맹단'을 조직하여 중국 상해로 활동무대를 옮기고자 하였으나 정동석의 배신으로 일본경찰에 체포되었으며, 1914년 1월 12일 사형선고를 받고 같은 해 4월 4일 대구 교도소에서 37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숭고한 뜻을 기려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으며, 임실군에서는 이곳 임실군 성수면 산성로 725-23번지(오봉리 산 130-1) 일원에 67,000㎡의 부지를 확보하고 1993년부터 10년간 2,365백만원의 사업비를 투자하여 소충사 성역화 사업을 완료하였다.
소충사는 구한말 호남의병장 이석용 선생을 중심으로 그와 함께 의병 활동을 한 28의사의 위패를 모셔놓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선생의 호는 정재이고 자는 경항이며 본관은 전주이다. 임실군 성수면 삼봉리에서 아버지 봉선과 어머니 조양임씨 사이에 3대독자로 태어난 선생은 어려서부터 배움에 나아가 유가의 경전과 역사서를 비롯하여 제자백가서에 능통했다고 한다. 국운이 기울기 시작한 구한말 일제 강압에 의하여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여러 우국지사들과 함께 조약의 무효화 투쟁을 하였으며, 1906년 일제가 내정간섭을 강화하자 임실을 비롯하여 진안, 장수, 순창, 남원, 곡성, 함양 등지를 돌며 동지를 규합하고 일제에 항거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그 후 1907년 진안 마이산 입구 용암에서 500여명의 군중을 모아놓고 '호남의병창의동맹단'을 결성하고 의병장이 되어 28명의 통솔조직을 구성 발표하였으며, 그 다음날 진안읍을 습격으로 2년여에 걸쳐 일본군과 맞싸워 많은 전과를 올렸다. 하지만 일본군의 강력한 대응과 토벌작전에 못 견디어 1909년 3월 6일 의병대를 해산하고 말았다. 이석용 의병장은 1912년 다시 '임자동밀맹단'을 조직하여 중국 상해로 활동무대를 옮기고자 하였으나 정동석의 배신으로 일본경찰에 체포되었으며, 1914년 1월 12일 사형선고를 받고 같은 해 4월 4일 대구 교도소에서 37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숭고한 뜻을 기려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으며, 임실군에서는 이곳 임실군 성수면 산성로 725-23번지(오봉리 산 130-1) 일원에 67,000㎡의 부지를 확보하고 1993년부터 10년간 2,365백만원의 사업비를 투자하여 소충사 성역화 사업을 완료하였다.
崇義門(숭의문)
이석용 의병장과 28의사의 항일 투쟁사
이석용 의병장은 1878년 음력 11월 29일 임실군 성수면 삼봉리에서 아버지 봉선과 어머니 조양임씨 사이에서 3대독자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남달리 총명하여 사서삼경을 통달하고 제자백가서에도 능통했던 이석용은 1895년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이 내려지니 하늘이 동방예의지국을 버리는구나 하고 한탄하였다. 이후 일본인에 대한 적개심을 키워오다가 28세 되던 1905년에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구하고자 결심하였다. 이석용 선생은 1907년 9월 26일 아버지에게 하직인사를 올린 후 9월 12일 그동안 의기투합하여 규합된 임실, 진안, 장수, 남원, 순창, 곡성, 함양 지역의 동지들을 진안 마이산으로 모이도록 하니 500여명이 구름처럼 모였다. 이때 「호남의병창의동맹단」을 구성하고 의병장이 되니 의병들을 통솔할 부서를 9개로 나누고 부서 당 3명씩 27명을 배치하였다.
의병들은 「호남의병창의동맹단」을 구성한 다음날인 9월 13일 진안읍을 습격하여 왜적을 가볍게 소탕시킴으로서 활동을 개시하였다. 이어 2년여 동안 의병들이 많을 때는 500여명에서 10여명으로서 진안 용담과 임실, 장수, 남원, 운봉, 순창, 곡성, 함양 등지를 누비며 일본군과 접전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1908년 10월 일본군은 1만여 명에 달하는 병력으로 소위 '호남의병토벌대'를 결성하고 장기간 토벌에 나섬으로서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기 시작했으며, 이때 의병들의 생명만 희생될 뿐이라고 판단하고 1909년 3월 6일 의병조직을 해산시켰다. 그 후 이석용 의병장을 은거 중 1912년 다시 22명의 비밀결사대인 「임자동밀맹단」을 조직하여 중국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동포들과 손잡고 항일운동을 꾀하려 자금을 모금하였다. 그러다가 동년 10월 정동석의 배반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임실경찰서를 거쳐 전주경찰서로 옮겨져 전주 법원에서 살인, 방화, 강도죄가 적용되어 사형언도를 받고 1914년 4월 4일 정오 호남의병장 이석용은 광복의 대망을 이루지 못한 채 37세의 나이로 대구 형무소에서 교수형을 받고 순국하였다.
이석용 의병장은 1878년 음력 11월 29일 임실군 성수면 삼봉리에서 아버지 봉선과 어머니 조양임씨 사이에서 3대독자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남달리 총명하여 사서삼경을 통달하고 제자백가서에도 능통했던 이석용은 1895년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이 내려지니 하늘이 동방예의지국을 버리는구나 하고 한탄하였다. 이후 일본인에 대한 적개심을 키워오다가 28세 되던 1905년에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구하고자 결심하였다. 이석용 선생은 1907년 9월 26일 아버지에게 하직인사를 올린 후 9월 12일 그동안 의기투합하여 규합된 임실, 진안, 장수, 남원, 순창, 곡성, 함양 지역의 동지들을 진안 마이산으로 모이도록 하니 500여명이 구름처럼 모였다. 이때 「호남의병창의동맹단」을 구성하고 의병장이 되니 의병들을 통솔할 부서를 9개로 나누고 부서 당 3명씩 27명을 배치하였다.
의병들은 「호남의병창의동맹단」을 구성한 다음날인 9월 13일 진안읍을 습격하여 왜적을 가볍게 소탕시킴으로서 활동을 개시하였다. 이어 2년여 동안 의병들이 많을 때는 500여명에서 10여명으로서 진안 용담과 임실, 장수, 남원, 운봉, 순창, 곡성, 함양 등지를 누비며 일본군과 접전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1908년 10월 일본군은 1만여 명에 달하는 병력으로 소위 '호남의병토벌대'를 결성하고 장기간 토벌에 나섬으로서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기 시작했으며, 이때 의병들의 생명만 희생될 뿐이라고 판단하고 1909년 3월 6일 의병조직을 해산시켰다. 그 후 이석용 의병장을 은거 중 1912년 다시 22명의 비밀결사대인 「임자동밀맹단」을 조직하여 중국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동포들과 손잡고 항일운동을 꾀하려 자금을 모금하였다. 그러다가 동년 10월 정동석의 배반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임실경찰서를 거쳐 전주경찰서로 옮겨져 전주 법원에서 살인, 방화, 강도죄가 적용되어 사형언도를 받고 1914년 4월 4일 정오 호남의병장 이석용은 광복의 대망을 이루지 못한 채 37세의 나이로 대구 형무소에서 교수형을 받고 순국하였다.
紀念館(기념관)
우국시 - 정재(静齋)가 전쟁터에서 지은 많은 우국시 가운데 한 수
"붉은피 파랗도록 원한이 치미니 밤마다 잠 못 들고 쓰린 가슴 문지르네. 원수놈 목을 베어 말머리에 달고와서 장대 끝에 매 달아 남대문에 꽂으리"
"붉은피 파랗도록 원한이 치미니 밤마다 잠 못 들고 쓰린 가슴 문지르네. 원수놈 목을 베어 말머리에 달고와서 장대 끝에 매 달아 남대문에 꽂으리"
거의(擧義)
1907년 8월 26일: 부친계 하직 인사. / 8월 27일: 상이암에서 앞날 의논. / 8월 27일: 선조의 무덤에 고유문 올림. / 9월 1일: 삼촌봉 부근의 종친들이 반대. 이에 이석용은 "오랑캐를 물리치는 것은 춘추의 큰 법이 온데, 이 나라 남자로서 능히 의를 밝히는 자가 몇 사람이 되겠습니까? 평소의 뜻을 이제야 실천해 보게 되었습니다."라고 했다. / 9월 2일: 동지들을 경계함. "예로부터 군사를 일으킴에 있어 의기라 아니면 성공하지 못하나니 청렴하면 복이 되고 탐욕을 부리면 화가 오는 것은 너무나 뚜렷한 이치라. 일에 임하여 경솔히 하지 말고 계획하기를 신중히 하여 반드시 적중하도록 하라는 옛 말이 바로 나의 비결이다." / 9월 4일: 진안 석전리에서 의병 모집(20여명) / 9월 6일: 새벽에 백암으로 출발하여 홍도령에서 진을 벌여 군사를 정돈. 장수 배룡리로 들어가 총과 창을 수집. / 9월 10일: 마령에서 식사한 후 관촌에 있는 왜적을 습격하고자 했는데 왜적들이 소문을 듣고 모두 도망함. / 9월 12일: 마이산 고천제를 시작으로 의병 활동이 전개되었다.
▷ 하직인사: "지금 오랑캐놈들이 도성안에 가득차 있어 임금과 신하의 처소를 잃어버릴 지경에 이르렀으며, 단군, 기자의 베푼 풍요는 요원해지고 요순의 도학은 땅에 떨어졌습니다. 무릇 혈기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역적을 토벌하고 원수를 갚을 생각이 없겠습니까, 다만 대의를 만천하에 펴기 원이오며 성공하지 못하는 것은 예측할 바 아니옵니다."
▷ 고유문: "엎드려 비옵건데 나라는 기울어져 신하된 자의 할 바가 막히게 되니 백성들은 생명을 부지하기 어렵고 나라와 가정이 다같이 무너질 지경입니다. 바야흐로 대의를 펴서 나라를 구하고 백성을 안정케 하고자 어버이와 조상의 무덤 곁을 떠나게되니 구곡 간장이 다 녹는 듯 통분을 이기지 못하여 피눈물을 뿌리며 감히 아뢰나이다. 지하의 선영들이시여 불초손의 불효를 눈감아 주소서"
〈정재선생 호남창의록〉 중 告先墓文(고선묘문)
28 의사명단
김동관, 김사범, 김여집, 김춘화, 김치삼, 김학도, 덕홍, 박달천, 박만화, 박운서, 박인완, 박철규, 봉수, 성경삼, 서상열, 서성일, 양경삼, 여주목, 오병선, 윤정오, 이광삼, 정군삼, 최덕일, 최일권, 한득주, 한사국, 허윤조, 허천석
1907년 8월 26일: 부친계 하직 인사. / 8월 27일: 상이암에서 앞날 의논. / 8월 27일: 선조의 무덤에 고유문 올림. / 9월 1일: 삼촌봉 부근의 종친들이 반대. 이에 이석용은 "오랑캐를 물리치는 것은 춘추의 큰 법이 온데, 이 나라 남자로서 능히 의를 밝히는 자가 몇 사람이 되겠습니까? 평소의 뜻을 이제야 실천해 보게 되었습니다."라고 했다. / 9월 2일: 동지들을 경계함. "예로부터 군사를 일으킴에 있어 의기라 아니면 성공하지 못하나니 청렴하면 복이 되고 탐욕을 부리면 화가 오는 것은 너무나 뚜렷한 이치라. 일에 임하여 경솔히 하지 말고 계획하기를 신중히 하여 반드시 적중하도록 하라는 옛 말이 바로 나의 비결이다." / 9월 4일: 진안 석전리에서 의병 모집(20여명) / 9월 6일: 새벽에 백암으로 출발하여 홍도령에서 진을 벌여 군사를 정돈. 장수 배룡리로 들어가 총과 창을 수집. / 9월 10일: 마령에서 식사한 후 관촌에 있는 왜적을 습격하고자 했는데 왜적들이 소문을 듣고 모두 도망함. / 9월 12일: 마이산 고천제를 시작으로 의병 활동이 전개되었다.
▷ 하직인사: "지금 오랑캐놈들이 도성안에 가득차 있어 임금과 신하의 처소를 잃어버릴 지경에 이르렀으며, 단군, 기자의 베푼 풍요는 요원해지고 요순의 도학은 땅에 떨어졌습니다. 무릇 혈기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역적을 토벌하고 원수를 갚을 생각이 없겠습니까, 다만 대의를 만천하에 펴기 원이오며 성공하지 못하는 것은 예측할 바 아니옵니다."
▷ 고유문: "엎드려 비옵건데 나라는 기울어져 신하된 자의 할 바가 막히게 되니 백성들은 생명을 부지하기 어렵고 나라와 가정이 다같이 무너질 지경입니다. 바야흐로 대의를 펴서 나라를 구하고 백성을 안정케 하고자 어버이와 조상의 무덤 곁을 떠나게되니 구곡 간장이 다 녹는 듯 통분을 이기지 못하여 피눈물을 뿌리며 감히 아뢰나이다. 지하의 선영들이시여 불초손의 불효를 눈감아 주소서"
〈정재선생 호남창의록〉 중 告先墓文(고선묘문)
28 의사명단
김동관, 김사범, 김여집, 김춘화, 김치삼, 김학도, 덕홍, 박달천, 박만화, 박운서, 박인완, 박철규, 봉수, 성경삼, 서상열, 서성일, 양경삼, 여주목, 오병선, 윤정오, 이광삼, 정군삼, 최덕일, 최일권, 한득주, 한사국, 허윤조, 허천석
유허비를 찾을 수 있었다. 이것이 일본헌병에 의해 파손된 원본 유허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