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전라북도 익산시 망성면 신작리 459-18
- 탐방로그
- 김일환 의용추모비는 익산시 망성면 신작리 459-18에 위치해 있다. 독립투사 김일환 의용추모비와 독립의사 소홍규추모비가 나란히 서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독립투사 김공 일환 의용 추모비
공은 이조 명신 가정대부 한성 윤 휘 의지의 제16세손 사과수성의 장자로 서기 1889년 기축에 상엽에서 탄생하니 명 규선 자 일환 본관 청풍이다. 천자가 영특하고 의협심이 출중하여 근동의 촉망대상이었다. 일찌기 한문수학하며 청운에 뜻을 두었던중 경술국치의 비보는 모든것을 격변시켜 통분을 가누지 못하여 논산군 채운면 용화리로 일시 이거하였다. 거기에도 왜인은 가까이 있어 일상 그들과 충돌은 그치지않아 인근까지 알게되었다. 국권회복의 기회만을 기도하던중 서기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대한독립만세의 함성은 천재일우의 호기였다. 공은 내응한 영동군 매곡면의 안공덕 장복철 임춘봉 평남 개천 길영순동지는 물론 송재기 이근석 이근오 양촌면의 장만식등 많은 동지는 3월 20일 국내 3대 시장인 강경장날을 택하여 궐기할것을 모의하고 손수 태극기를 제작하여 당일에 인근 친지와 나기창등 동민 태반은 장꾼으로, 태극기는 상품으로 가장하고 시장에 잠입 하오 늦게 옥녀봉에서 태극를 나누어주며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니 근만여명의 장꾼들은 삽시간에 합세 작열하는 거대한 불덩어리가 되어 만세를 절규하니 가히 강경벌도 흔들릴듯한 기세였다. 겁에 질린 왜적은 당황하여 평화의 군중이 지극히 정당한 국권회복을 외치는 거룩한 행진을 잔인무도하게 일언의 경고도 없이 총격하며 급습하므로 할수없이 밀리던 중 눈앞에 금강 샛강이 가로막혀 진퇴양난이라. 많은 동지들이 이때 피체되었으나 공은 태극기의 노도를 지휘하던 움켜진 농기장등을 강심에 꽂고 힘껏뛰어건너므로 위기일발 호구를 탈출하고 각처를 암약하며 재봉기를 획책하다가 강경서에 피체되여 구금 매일 거사동지의 명단을 추궁당하여 한사 거절하다 못해 감방에서 자결을 기도했다가 간수에게 발각되여 미수로 끝났다. 그후에도 줄기차게 혹독한 고문을 당하던 어느 무더운날 왜경을 격분 일격 쓰러져 노출된 그의 배꼽을 꽉물어 뜯었다. 그 뒤는 불문가지로 공은 결국 실신하였다가 소
생하니 자정이 넘었더라. 후일 공주법원의 재판에서 유례없는 8년의 중형이 선고되여 즉시 경성복심법원에 항소하였으나 서울 이감을 지연시키다가 가을에야 이송되였다. 서울 역시 재판을 지연시켜 세월은 벌써 동지가 지나 추위는 혹심해지고 입은 것은 남루한 홑중이 적삼이요 끼니는 연명에도 태부족인데 장독마저 가중하니 피골이 상접하여 눈뜬 시체가 된 12월말경 재판정에 끌려가니 판사가 비참한 흉상을 보고 당시 법정 석방되여 쫓겨났다. 그러나 이미 밤은 어둡고 운신조차 거북한데 옷은 헤여지고 삭풍마저 휘몰아치니 촌보도 못 떼고 유아처럼 기어가며 동신과 단말마의 사투 중 공주동지의 기적적 구원으로 십여일 요양후 고향에 왔으나 거처할 집도 없는 곤경에 극심한 고문 여독은 날로 가중하므로 몸은 지칠대로 지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어 호구지책마저 막연한데 전인한 왜경의 요사찰인감시의 눈초리는 더욱 심하여 미동 상엽 파천 중엽 노양등 각처로 빈집 찾아 전전하면서도 서왜의 단심만은 더욱 굳어져 때로는 사냥나온 강경상업학교 왜인교장이 쏜 유탄이 박길만의 팔에 맞은 것을 보고도 태연한 그 일행을 준엄하게 질책 도주케 하고 김계선을 연행하는 산림 감시원을 설득시켜 즉석에서 방면케 하고 그도 사퇴케하는 등 불소한 일화는 애국애정 편린을 짐작할 수 있다. 만년에 상엽부락의 빈집 냉방의 히미한 등잔 밑에서 울고 있는 외아들 15세 난 진태의 어린 손에 의지하여 몽상에도 못 잊는 조국광복의 한을 품고 서기 1939년 정월 22일 서거하니 향년 51세라. 해방후 기공을 기리며 당국으로부터 포상까지 받고 유족의 생계보조책으로 소속 재산인 일본가옥 1동과 답 5두락 경작권까지 배당되였으나 진태생 계난으로 부지거처되어 그것마저 받지 못한 바 있고 공은 왜정의 민적령에 항거하여 호적이 없고 일상 쓰던 자 일환으로 호명하고 독자 진태는 지인의 자식으로 친재 호적에 등재되어 있다. 조국광복후에 공의 당질 진극와 이동헌 위원장이 10여년에 걸쳐 구전에 의한 공의 법정 기록문을 추적하여 상고하는데 진력하였으며 이제 공의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여 일제에 숨을 걷우신 이 고장에 향민들이 차거운 빗돌을 세우고 공의 이름을 새기는 뜻은 그 거룩한 불출의 애국심과 의용의 높은 뜻을 받들고자 함이오니 흐르는 강물 같이 떠오르는 태양같이 근역 천추에 길이 길이 빛나소서
비문을 읽어보니, 보훈처 공훈록에 있는 애국지사 김일환(金一煥)선생과는 동명이인인것같다.
1938년 12월부터 1년간 중국 봉천의 철도경호대를 졸업하고, 1940년 3월 중국 중앙전시간부훈련단에 입단하여 이듬해 9월 졸업한 후 광복군 제2지대 소위로 임명되어 섬서성 서안 두곡에서 약 3년간 복무하였으며, 1943년 1월 하남성 방면 적구공작에 파견되어 활동하다가 해방후인 1946년 6월 귀국하였다. 귀국후 대한민국 육군장교로 입대한 그는 6·25전쟁 당시 평남 덕천에서 전사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3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1938년 12월부터 1년간 중국 봉천의 철도경호대를 졸업하고, 1940년 3월 중국 중앙전시간부훈련단에 입단하여 이듬해 9월 졸업한 후 광복군 제2지대 소위로 임명되어 섬서성 서안 두곡에서 약 3년간 복무하였으며, 1943년 1월 하남성 방면 적구공작에 파견되어 활동하다가 해방후인 1946년 6월 귀국하였다. 귀국후 대한민국 육군장교로 입대한 그는 6·25전쟁 당시 평남 덕천에서 전사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3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독립투사 김일환 의용추모비와 독립의사 소홍규추모비가 나란히 서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