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경기도 동두천시 안흥동 산70
- 탐방로그
- 김연성 추모비는 경기 동두천시 안흥동 산 70 마차산 동남쪽 기슭에 있다. 숭모재에서 선산 쪽으로 더 올라가서 오른쪽 길로 가야 한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의병장 송천 김연성 열사 추모비
의병장 송천 김연성 열사 추모비
나라를 걱정함은 충성의 근본이요 민족을 생각함은 효도의 바탕이다. 역사상 우리 민족처럼 시련을 격은 민족도 드물것이다. 내 고향 동두천도 타지역 못지 않은 명유선각의 지성과 구국 동양의 지사가 얼마나 많않던가 1905년 을사보호5조약이 일제에 의해 강제로 체결되자 국권회복을 부르짖으며 의열로 일어섰던 의병장 송천 김연성 열사 1870년 5월 5일생 자 범일 호 송천 관성균관 박사 한말 일제초에 의병활동과 독립운동을 한 강릉인 병기의 자이다. 어려서부터 학재가 있어 성균관에서 수학하였으며 관직으로 충청도부사로 있다가 일제 침략에 염로하여 1907년 의병장 황순일의 권유를 받고 봉기 40여명의 부하들과 함께 양주 적성 연천 포천 등지에서 의병투쟁을 전개 이때 같은 동두천 출신 전목기 유재만 선생 등을 휘하에 두었고 1908년 부대를 확대편성하여 200여 의병을 이끄는 대규모 의병부대의 장이 되어 양주 영천 포천 평산에서 의병 투쟁을 전개하다 일군에 잡혀 죽음을 당하였다.
김병기 선생 1850년 12월 4일생 자 성모 강릉인 학복의 자 독립운동가로 한말 왜구의 침략을 저지하고자 의병에 투신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아들 연성도 의병 활동 중 일군에 잡혀 죽음을 당한 바 있는 의병 집안의 가장이다. 1910년 조선이 일제의 식민지가 되었으나 투쟁을 멈추지 않고 1913년 8월 의병장 임병찬 이인순 전용규 등이 의병 출신들을 모아 새로운 항일투쟁조직체인 독립의군부를 조직하자 여기에 참여하였다. 독립의군부는 일본내각 총리대신 및 조선총독에게 국권 반환 요구서를 보내기도 하고 한국인이 일본에게 굴복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국외에 알리는 등의 활동을 하
김병기 선생 1850년 12월 4일생 자 성모 강릉인 학복의 자 독립운동가로 한말 왜구의 침략을 저지하고자 의병에 투신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아들 연성도 의병 활동 중 일군에 잡혀 죽음을 당한 바 있는 의병 집안의 가장이다. 1910년 조선이 일제의 식민지가 되었으나 투쟁을 멈추지 않고 1913년 8월 의병장 임병찬 이인순 전용규 등이 의병 출신들을 모아 새로운 항일투쟁조직체인 독립의군부를 조직하자 여기에 참여하였다. 독립의군부는 일본내각 총리대신 및 조선총독에게 국권 반환 요구서를 보내기도 하고 한국인이 일본에게 굴복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국외에 알리는 등의 활동을 하
였다. 1914년 5월 독립의군부 동지들과 함께 일본경찰에 잡혀 고초를 겪었다.
김병응 선생 1872년 6월 5일생 1950년 10월 12일 졸 자 문선 강릉인 학인의 자 농사를 짓다가 1908년 김연성 의병부대에 들어가 양주 포천시 연천군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김병주 선생 1884년 6월 8일생 1909년 3월 15일 졸 자 경륜 강릉인 학인의 자 농사를 짓다가 1908년 김연성 의병 부대에 가담 양주 포천 적성군 일대에서 활동중 일군에게 잡혀 많은 고초을 겪고 풀려나 고문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
김병시 선생 1891년생 자 문생 강릉인 학인의 삼자 농사를 짓다가 1908년 김연성 의병부대에 삼형제가 모두 가담하여 양주 포천 연천 적성군 등지에서 의병투쟁을 전개하다 많은 고초를 겪었다.
김병원 선생 1882년 10월 2일생 1962년 11월 23일 졸 자 공필 강릉인 학영의 자 농사를 짓다가 1908년 김연성 의병부대에 들어가 양주 포천 적성군 일대에서 의병투쟁을 전개하다 일군에 잡혀 많은 고초를 겪었다.
그리고 우리 향토출신 의병으로 단양인 우병창 선생 정선인 전순만 선생 동래인 정충환 선생 광주인 정두환 선생 사천인 목자상 선생 여산인 송창근 선생 문화인 유재만 선생 광주인 이긍래 선생 정선인 전목기 선생 추계인 삼남열사 남양인 홍희영 선생 광주인 정제환 선생 벽진인 이명기 선생 전주인 이병하 선생 등 이렇듯 잃었던 나라를 되찾기 위해 부고부모처자하며 국내의거에 몸바침은 물론 이역만리 중국 등지에서 모진 설한 속에 풍천노숙하면서도 왜구의 무리들과 당당하게 맞서 싸운 사천인 목연욱 평해인 황용호 선생 그 분들이 어떤 자신의 영화를 위함이던가 아니면 생명의 고귀함을 몰라서였던가. 지나온 세월을 헤아려 끼친 자취를 더듬어보니 풍진세파속에 분묘는 황폐된 채 말이 없고 담장은 허물어져 가슴만 뭉클하다. 후손마저 영조몰락하니 어찌 통탄치 않으랴. 나라에 충성한 선열들의 공훈이 이처럼 출중한데 어찌 부끄럽고 죄스럽지 않으랴 교육이란 무었이며 문화란 무었인가 또 예절이란 무었인가 우리 고향이 낳은 훌륭한 선열을 받들지 못한다면 교육은 의미가 없고 문화는 퇴보할 것이며 예절은 그 기강을 잃을 것임이 너무도 자명하다. 이제 만시지탄이 없지 않으나 해방 50년을 맞는 이때 강릉 김씨 판윤공파 동두천 종중 「회장금연상」 첨의로 조국광복을 위해 공헌한 향토선열들의 호국정신을 기리는 추모를 건립하는 것은 우리 고향의 자랑이요 긍지가 될것이며 이 비를 통해서 그 분들의 정신과 정기를 체득하고 계승케 하여 후인의 귀감이 되며 그 얼이 후대에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김병응 선생 1872년 6월 5일생 1950년 10월 12일 졸 자 문선 강릉인 학인의 자 농사를 짓다가 1908년 김연성 의병부대에 들어가 양주 포천시 연천군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김병주 선생 1884년 6월 8일생 1909년 3월 15일 졸 자 경륜 강릉인 학인의 자 농사를 짓다가 1908년 김연성 의병 부대에 가담 양주 포천 적성군 일대에서 활동중 일군에게 잡혀 많은 고초을 겪고 풀려나 고문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
김병시 선생 1891년생 자 문생 강릉인 학인의 삼자 농사를 짓다가 1908년 김연성 의병부대에 삼형제가 모두 가담하여 양주 포천 연천 적성군 등지에서 의병투쟁을 전개하다 많은 고초를 겪었다.
김병원 선생 1882년 10월 2일생 1962년 11월 23일 졸 자 공필 강릉인 학영의 자 농사를 짓다가 1908년 김연성 의병부대에 들어가 양주 포천 적성군 일대에서 의병투쟁을 전개하다 일군에 잡혀 많은 고초를 겪었다.
그리고 우리 향토출신 의병으로 단양인 우병창 선생 정선인 전순만 선생 동래인 정충환 선생 광주인 정두환 선생 사천인 목자상 선생 여산인 송창근 선생 문화인 유재만 선생 광주인 이긍래 선생 정선인 전목기 선생 추계인 삼남열사 남양인 홍희영 선생 광주인 정제환 선생 벽진인 이명기 선생 전주인 이병하 선생 등 이렇듯 잃었던 나라를 되찾기 위해 부고부모처자하며 국내의거에 몸바침은 물론 이역만리 중국 등지에서 모진 설한 속에 풍천노숙하면서도 왜구의 무리들과 당당하게 맞서 싸운 사천인 목연욱 평해인 황용호 선생 그 분들이 어떤 자신의 영화를 위함이던가 아니면 생명의 고귀함을 몰라서였던가. 지나온 세월을 헤아려 끼친 자취를 더듬어보니 풍진세파속에 분묘는 황폐된 채 말이 없고 담장은 허물어져 가슴만 뭉클하다. 후손마저 영조몰락하니 어찌 통탄치 않으랴. 나라에 충성한 선열들의 공훈이 이처럼 출중한데 어찌 부끄럽고 죄스럽지 않으랴 교육이란 무었이며 문화란 무었인가 또 예절이란 무었인가 우리 고향이 낳은 훌륭한 선열을 받들지 못한다면 교육은 의미가 없고 문화는 퇴보할 것이며 예절은 그 기강을 잃을 것임이 너무도 자명하다. 이제 만시지탄이 없지 않으나 해방 50년을 맞는 이때 강릉 김씨 판윤공파 동두천 종중 「회장금연상」 첨의로 조국광복을 위해 공헌한 향토선열들의 호국정신을 기리는 추모를 건립하는 것은 우리 고향의 자랑이요 긍지가 될것이며 이 비를 통해서 그 분들의 정신과 정기를 체득하고 계승케 하여 후인의 귀감이 되며 그 얼이 후대에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의병장 송천 김연성 열사의 원조는 김알지이며 그의 22세손 명주군왕 김주원을 강릉 김씨 시조로 하여 계대한다. 송천공의 15대 조가 일로정 김양남이다. 그는 려말의 충신으로 당시 문장과 학행이 뛰어난 명망 높은 학자였다. 조선 제3대왕인 태종과 소시적부터 함께 수학한 지기지우로 태종이 등극하여 수차에 걸쳐 벼슬을 내리며 팔조를 권했으나 끝내 출사하지 않고 오직 려조의 신하로 불사이군의 지조를 지키며 양주땅 영근면 반곡에 은거충절로 일생을 마치었다. 양남공의 육세손 김충렬이 중종 26년 식년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와 충추관 편수관을 거쳐 한성부 판윤 행제주 목사 겸 병마절도사를 지내다 동두천으로 낙향하여 뿌리를 내렸다. 후로 자손이 번창하여 지역의 명문으로 발전하였다. 한말 일제가 우리나라를 찬탈하자 충절의 후예답게 민족과 국가를 자신의 생명보다 더 소중히 여기고 독립투쟁에 몸을 던진 김병기 김병원 김병응 김병주 김병시 선생 등을 배출하였으니 이것은 김문의 영광이요 동두천의 자랑인 것이다. 이 비는 판윤공 종중 첨의로 건립하는 바이다.
김연성 추모비는 경기 동두천시 안흥동 산 70 마차산 동남쪽 기슭에 있다.
강릉김씨 판윤공파 동두천 문중 입향중시조 숭모재
이곳은 모두 강릉김씨 판윤공파 동두천 문중의 사유지이다. 숭모재에서 선산 쪽으로 더 올라가서 오른쪽 길로 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