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항쟁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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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전라북도 군산시 월명동 17-15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군산시 월명동 17-15 군산 항쟁관을 찾았다.
군산 항쟁관
3.1 대한독립만세운동 4일 뒤인 3월 5일, 군산에서 호남지방 최초로 대한독립 만세운동이 시작되었다. 3월 5일에서 5월까지 만세 시위가 계속되었는데 수십명이 부상당하고 사망하였다. 3.1운동 당시 군산에 살고 있던 한국인이 6.581명이니 1인당 4~5번은 만세에 참석한 것이 된다. 또한 항쟁관에서는 1920년대 미선공과 부두노동자들의 항쟁, 옥구 농민항쟁을 비롯한 소작쟁의에 대한 내용도 배워갈 수 있다.
군산 항쟁관
3.1 대한독립만세운동 4일 뒤인 3월 5일, 군산에서 호남지방 최초로 대한독립 만세운동이 시작되었다. 3월 5일에서 5월까지 만세 시위가 계속되었는데 수십명이 부상당하고 사망하였다. 3.1운동 당시 군산에 살고 있던 한국인이 6.581명이니 1인당 4~5번은 만세에 참석한 것이 된다. 또한 항쟁관에서는 1920년대 미선공과 부두노동자들의 항쟁, 옥구 농민항쟁을 비롯한 소작쟁의에 대한 내용도 배워갈 수 있다.
군산 항쟁관 - 우리의 영웅은 아직 죽지 않았다.
임병찬 생가터 1851~1916
군산에서 태어난 임병찬(林炳瓚)은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1906년 2월에 스승 최익현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신병모집.군량.병사훈련 등의 책임을 맡았다. 의병 200여 명을 인솔하고 담양으로 가던 도중 순창에서 일본군과 싸우다 체포되었다. 1909년 최익현과 함께 대마도에 유배되엇다가 2년 만에 돌아와 경숙국치 뒤에는 독립의군부 전라남도 순무대장이 되어 항일구국투쟁을 전개하였다. 1914년 2월 독립의군부를 전국적인 조직으로 확대, 대한독립의군부의 편대로 재조직하여 총사령이 되었다. 이 때 내각총리대신 총독 이하 모든 관헌에게 「국권반환요구서」를 보내 한일합방의 부당성을 천명하였다. 이후 국권회복을 위한 항일의병운동을 계획하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전라남도 거문도에 유배되었고, 1916년 단식 끝에 순국하였다.

1889 중추부 절충장군 첨지중추부사, 오위장
1889.07 낙안군 군수, 순천진관병마동첨절제사
1912 대한독립의군부 설립, 의병 의병장
1913 대한독립의군부 전라남북도 순무대장
1913.02 대한독립의군부 사령총장, 전라남북도 순무총장
1914.03 대한독립의군부 총대표
1914.05 함경남도 관찰사
1914.05 대한독립의군부 함경남도 순무총장
옛 구암교회 3.1운동 근거지 1919.03.05
군산 3.1운동은 3월 5일에 있었다. 이미 2월 26일 세브란스 의전에 재학 중인 영명학교 출신 김병수가 독립선언서를 가져와 구암교회 박연세(영명학교 교사) 장로에게 전달하였고, 영명학교 학생을 중심으로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준비하였다. 그러나 거사계획이 사전에 발각되어 박연세 등이 잡혀가자 학생들은 미리 준비해둔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꺼내들고 시위에 들어갔다. 당시 구암예수병원 직원들도 시위에 합세하였고, 군산경찰서로 행진할 때는 군산교회 교인들과 군산공립보통학교 학생, 시민들까지 합세하여 만세시위를 벌였다. 한편 구암교회를 모체로 구암유치원, 알락소학교(현 구암초등학교), 영명학교(현 제일중,고등학교), 멜볼딘여학교(현 영광중,고등학교) 등의 학교가 선교사들에 의해 세워졌으며 모두 3.1운동에 참여하였다. 구암교회는 1893년 군산궁멸교회라는 이름으로 설립되었다. 현재의 건물은 1959년에 새로 지워진 것이다.
군산 정미소거리 미선공항일운동지 1924~1934
군산은 쌀 집산지로 많은 정미소가 있었다. 이들 정미소는 생산된 쌀을 곧바로 배에 실어 나를 수 있도록 철도변이나 항구 옆에 위치하였다. 그곳이 현재의 호남제분 끝에 집중적으로 자리하고 있어 이곳을 정미소거리라고 하였다. 당시 여기에서 일하는 노동자는 남녀 2,000여 명에 이르렀다. 이들은 악조건에서 중노동을 했지만 임금은 갈수록 삭감되었고, 이에 대한 생존권투쟁은 1924년에서 1934년까지 계속되었다. 1924년 3월 군산 랍합정미소에서 노동자의 임금을 내리자 매갈이 인부 32명이 16일부터 동맹휴업에 들어갔다. 1926년 11월에는 군산 정미소 직공 1,000여 명이 1928년에는 중정정미소에서 1930년에는 남선정미소, 육석정미소.흑전정미소 직공의 파업이 있었다. 급기야 12월에는 1,000여 명의 미선공이 파업을 계획한 비밀집회가 발각되어 주동자 2명이 체포되는 사건을 맞이하게 되었다. 1934년 1월에는 가등정미소 여직공 100여 명이 임금문제로 파업하였다.
옥구소작쟁의 터 1927.08.~11.
이엽사농장 1,200정보(3,600,000평)의 논밭과 1,700여 명의 소작인을 두고 한 해에 12,000석을 거두는 대농장이었다. 이에 맞선 옥구소작쟁의는 1927년 8월에서 11월까지 총 7차에 걸쳐 전개되었다. 먼저 8월 9일 서수청년회에서 주최한 강연 내용이 불온하다는 이유로 강사 3명을 연행하자 농민 수백 명이 주재로슬 포위하고 만세를 불렀다. 이어 11월 15일에는 조합원 수백 명이 이엽사농장 앞으로 시위를 하며 행진하였다.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이엽사농장에서 소작료를 75%로 올리자 서수농민조합 소작인 대표 등이 모여 소작료 불납을 결의하였다. 25일 밤 일경은 조합장 장공욱을 역전주재소로 압송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농민들 500여 명은 임피역 전주재소 앞에 가서 장공욱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일경이 이에 불응하자 주재소에 돌을 던지고 순사를 난타하여 포박하고 장공욱을 업고 나왔다. 이후 조합간부 박상호가 검거되었다는 소식에 다시 서수주재소를 습격하였다. 이 사건으로 80여 명이 군산 경찰서에 체포되고 이 중 34명이 재판에 회부되었다. 이 때 김병로, 이 인 등 5명의 변호사가 무료 변론을 맡았다.
군산공립보통학교 학생운동지 1919.03.23
군산공립보통학교는 일본인 교장의 관리와 경계가 엄하여 3.1만세운동이 파급되어 오는데도 시위를 주도할 수 없었다. 이에 1919년 3월 14일 김학구.나명조.신형식 등은 학생 70여 명을 선도하여 동맹을 하고 연서로 퇴학서류를 제출하여 항거하였다. 이러한 사태에 학교 측은 당황하여 학부형을 소환.압박하여 학교로 복귀하도록 하였다. 1919년 3월 23일 밤 군산공립보통학교를 불태워 없애버리자는 결의를 하고 알코올과 솜을 준비하여 교사 동쪽 승강구에 불을 질렀다. 이 불로 학교는 완전히 소실되었으며 주동자는 김수남은 징역 10년, 이남율은 7년 형을 언도받아 복역하였다. 군산공립학교는 1906년 개교하였고, 1911년 11월 조선교육령 공포 이후 4년제 보통학교가 되었으며, 1996년 군산중앙초등학교로 교명이 변경되었다.
옛 군산경찰서 터(3.1운동 만세) 1919.03.05
1919년 3월 5일 군중과 학생 등 1,000여 명이 군산경찰서 앞에서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당시 3.5독립운동을 계획했던 영명학교 학생들과 함께 만세를 부르며 군산 시내로 행진하였다. 중도에서 보통학교 학생과 군산교회 교인들이 행렬에 참여하여 시위대열은 500명으로 증가하였고, 평화동과 영동을 거쳐 본정 큰 거리를 지나 경찰서에 이르렀을 때에는 1,000여 명에 이르렀다. 이들은 군산경찰서 앞에서 구속된 영명학교 교사들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이에 당황한 일경은 재향군인과 이리(익산) 주재 헌병대까지 요청하여 만세시위대를 탄압하였다. 당시 검거된 사람은 90여 명에 이른다. 또한 이곳은 노동과 농민운동을 비롯한 사회운동가 및 독립운동가를 체포하고 구금한 탄압장소이다. 군산경찰서는 1910년에 신축되었고 1922년 9월 6일 증축되었다.
임병찬 고석주
이병관 이기준
정홍기 홍종억 진장권
김성은 홍천경 유희순
김영상
최태경 이준영
고민룡 홍만종
김수남 노춘만
유복섭 전오풍
신관순 임종우 유복섭
김덕장 이인식 신관순
김홍렬 문형모 김덕장
이용규 고봉민
김영후 김수영
이재근 안경태
군산 항쟁관 뒤쪽에 건립되어 있는 옥구농민항일항쟁 안내판
일제의 수탈에 항거한 옥구농민항일항쟁
옥구농민항일항쟁은 악랄했던 일본의 식민 지배에 정면 대항한 사상 초유의 농민저항운동이다. 일찍이 3.1운동의 열기가 뜨거웠던 군산지역에서는 민족 저항정신이 확산되면서 옥구농민조합(1926), 서수농민조합(1927), 서수청년회(1927) 등이 조직되었다. 이들은 언론의 자유를 외치고 악덕 농장주에 대항하는 시위를 벌이며 일제에 저항하였다. 1927년 11월, 일본인 지주들이 공동 설립한 대규모 농장인 이엽사 농장에서 수확한 곡물의 75%를 소작료로 요구하였다. 농민조합에서는 생존을 위해 소작료를 인하해줄 것을 여러 차례 요청하였으나, 이를 묵상당한 끝에 11월 25일 소작료 납부 거부를 결의하였다. 다음날 농장 측의 신고를 받은 경찰이 농민 간부 장태상을 술산주재소에 감금하였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500여 명의 농민들은 징을 울리며 몰려가 주재소를 부수고 장태상을 구출한 뒤 만세를 불렀다. 또한 서수주재소에 감금된 농민 간부 박상호도 구출하였다. 경찰은 80여 명의 농민들을 체포해 혹독하게 취조하였고, 체포된 농민 중 34명은 실형을 선고 받아 옥고를 치렀다. 이러한 옥구농민항일항쟁은 전국에서 유일하게 전개된 농민항일운동으로서, 일제의 착취와 폭압에 항거한 대표적인 항일투쟁으로 역사에 기록되고 있다.
옥고를 치른 군산출신 34인의 항일투사
김기술 김재풍 김준철 김택현 김행규 문일만 복만길 서가마 서만석 신문관 오남용 오승철 오요섭 윤경문 이광순 이기열 이보동 이성순 이성춘 이영출 이용덕 이용선 이원섭 이정춘 이진섭 이진철 이효남 이휴춘 장태성 정영운 채판진 최봉엽 최은엽 한기석

독립유공자로 서훈받은 군산출신 18인의 애국지사
김기술 김재풍 문일만 오남용 오승철 오요섭 이광순 이기열 이성순 이성춘 이용덕 이정춘 이진섭 이효남 이휴춘 장태성 최봉엽 한기석

서수청년회에서부터 활동한 농민항쟁의 기수
김영현 이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