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현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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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전라북도 군산시 서수면 축동리 산148
탐방로그
1928년 9월 수원고등농림학교 3학년 재학 당시 사상이 불온하고 다른 학생들에게 배일사상과 의식을 고취시킨다는 이유로 퇴학처분을 당한 그는 같은해 12월 중국 길림성(吉林省)으로 망명하여 독립군에 가담한 뒤 항일운동 및 군자금 200원을 모집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1932년 7월 권총 및 기타 무기를 구입하고 독립군 동지들과 합세하여 간도 일본영사관을 습격하여 교전하던 중 총에 맞아 부상을 입고 일경에게 피체되었다. 1933년 12월 청진지방법원 예심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무기징역이 구형되고, 다시 청진지방법원에서 징역 15년형이 확정되어 대전·마포, 서대문, 함흥의 형무소로 이감되며 옥고를 치르다가 1944년 3월 12일 옥중생활 12년 3개월 만에 옥중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6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협찬하니 모역을 정돈하고 비상석과 의물을 갖추었다. 묘소는 옥구군 서수면 취동리 산 148번지 보천동 남녹선영하이며 의사의 휘자가 새겨진 충혼비가 군산 은파유원지입구와 전주시 에 있다.

은파유원지공원내 군옥출신독립운동공적 충혼기념탑

전북 전주시 전북지역독립운동추념탑, 독립유공자현창비
비문에서 소개된 김영현 의사의 3형제 중 한 분의 묘소가 옆에 있었다.
공은 옥구군 서수면 고산리에서 부 위 용석공과 모 밀양박씨의 장남으로 출생하니 시조 수로대왕의 70세손이요 김유신장군의 58세손이며 파조 홍문관박사 휘 맹 호 남계공의 17세손이다. 임피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전주농업학교에 진학하였으나 뜻한바 있어 학업을 중단하고 농사에 전념하던중 마침내 일제의 수탈이 극심하던때인지라 소작쟁의등의 농민항쟁이 계속되더니 드디어 1927년 에는 서수소재 이엽사농장과의 소작료경감및 불납투쟁이 일어나매 공은 옥구군농민조합 서수지부장으로서 본사건의 추도하였고 집행위원들 대부분이 체포구금되는 와중에서도 꾸준히 소작료 경감운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고산리 동산에 서수야학당을 건립하고 그 원장에 취임하여 문맹퇴치사업의 일환으로 성인교육을 실시하고 미취학소년을 모아 보통학교수준의 교육을 실시하였으니 후일 마용국민학교가 설립될때 제1회 입학생의 임지교사로 사용되었으니 실로 그 모체가 된것이다. 뿐만아니라 지역사회의 지도자로서 그 온유후돈한 성품은 무언중에서도 능히 중인의 심금을 울리기에 족하였도다. 어호애석하도다! 지역민의 촉망이 여차하였거늘 어찌타 그중망을 뒤로한채 난세에 장서하였도다.후예는 모름지기 자손대대로 그 유덕을 기리고 닫들지어다. 배위 합천이씨는 ....
전북 군산시 서수면 축동리 산148 김영현 선생의 묘를 찾아왔다.
의사 김해김공 영현지묘
국운이 쇠퇴하여 이민족의 기반하에서 동포가 신음할제 청년학도로서 분연히 궐기하여 일제의 침략에 항거한 희세의 항일열사가 바로 이고장 출신 김녕현의사이다. 의사는 1907년 3월 29일 전북 옥구군 서수에서 고 휘 용석공과 비 전주이씨의 맏이로 출생하니 태조 수로황태왕의 70세손이요 삼국통일의 위업을 이룩한 김유신장군의 58세손이며 홍문관박사이요 좌리공신인 휘 맹 호 남학공의 17세손이이다. 유시에는 향당 서숙에서 수학하였고 천품이 영명순후하매 일찍부터 대가다운 풍모가 약여하였다. 임피보통학교와 명문 전주고보를 졸업하고 1925년에는 당대의 수재들이 운집하던 수원고등농림학교에 당당히 합격하였다. 이로
써 일신영달의 전도가 보장되어 있었건만 공은 유독 민족의식이 투철하고 의협심이 강한지라 여기에 안주하지아니하고 자주독립정신을 고취하고 계목하는일에 몰두하는 한편 항일구국운동을 전개하던차에 한일사상이 농후하다는 이유로 1928년 9월 3학년때에 퇴학처분되었다. 공은 당년 12월 만주로 망명하여 돈화현에 있는 독립군에 가담 군자금조달과 무기의 확보에 전심전력하더니 1932년 에는 간도의 일본영사관을 습격 일본군과 교전하다가 다리에 총상을 입고 왜적에게 체포되었다. 일제는 1933년 12월 의사에게 치안유지법위반이라는 명목으로 징역 15년을 언도하였으니 이후 대전 마포 서대문 함흥등지 의 형무소를 전전하며 복무하다가 1944년 3월 12일 함흥감옥에서 38세를 일기로 장서하였다. 오호라! 하늘도 무심하도다. 조국광복의 그날을 불과 1년여 남겨둔채 옥중고혼되었으니 의사의 우국애정은 필시 한맺힌 원귀되어 구만리장천을 헤매었으리라. 연이나 의사의 영혼이 감응하여 을유해방으로 국권이 회복되니 1946년에는 수원고농명예졸업장이 수여되고 잇따라 임피향교 교지에는 의사의 항일행적이 수록되고 전북일보에는 의사의 항일투쟁사가 보도되고 군내 각기관및 단체의 장과 유지들이 나서서 의사의 공적을 기리고 그 애국정신을 귀감삼을것을 관계요로에 건의하더니 드디어 1986년 12월 16일에는 정부에서도 의사를 독립유공자로 확인하기에 이르러 헌법의 규정에따라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어호! 님은 비록 일찍 가시었을 망정 님의 공적은 조국독립의 청사에 찬연히 빛날것이요 님의 애국단심은 영세불멸의 민족혼으로 남으리로다.
입비시 현재 선형 영준 망제 영욱이며 영진 영곤 완녕등 3형제는 유종하고 무후인채 옥중순국하였기로 체달하니 사자는 종화이며 손은 성수 권수 이다. 1989년 보훈처로부터 묘비건립기금 일백만원이 영달되니 영진 영곤 완영등 3형제가 주동하고 종손 범석과 인우 일걸등이 진력하여 종중에서도 크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