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예진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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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전라북도 고창군 흥덕면 송암리 산25
탐방로그
만취 고순진 애국지사의 묘소를 찾았는데 묘소의 주인은 송천 고예진 선생이었다.
돌아와서 설명글과 비문을 입력하는 과정에 알게 되었다. 다른 곳에 추모비도 나란히 같이 서 있어서 신경쓰지 않았었다.
이 자료는 YTN site에 나온 것인데 너무 오류가 많다. 형제까지 바꿔서...


고예진은 전북 고창 출신으로 항일 투쟁의 명문인 고흥(高興) 고씨로서 임진왜란시 의병장 고경명(高敬命)의 후예이다. 그의 일문은 녹천 고광순(鹿泉 高光洵)의 휘하와 면암 최익현(勉菴 崔益鉉)의 휘하에서 주로 활약하였다. 고예진은 그의 형 고석진(高石鎭) 고용진(高龍鎭)과 함께 면암의 의진에서 활약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면암은 오랫동안 동지를 규합하고 있었으나 동지 규합이 여의치 않아 실망하고 있을 때, 고예진과 고석진 그리고 고제만(高濟万) 등 청년들이 정산(定山)에서 면암에 호응하여 거사할 것을 함께 모의하였다. 이들은 격문을 작성하여 8도에 배포하고 12월 충남 노성(魯城)에서 각지로부터 소모(召募)된 7백여 명과 함께 거의하였다. 한편 면암은 의거의 거점을 물색하던 중 문하생의 추천으로 알게 된 임병찬(林炳瓚)의 권유로 태인(泰仁)에서 의거의 기치를 올리기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1906년 4월 13일 태인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강회(講會)를 열어 태인 일대의 유림인사를 규합할 때 함께 거의하였다. 여기에 그의 형 고용진이 포수 30여명을 이끌고 참가하여 기세를 올려 주었다. 그 이후 고예진은 면암 휘하에서 정읍(井邑) 순창(淳昌) 곡성(谷城)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그러던 중 순창 귀암사(龜巖寺)에서 포진(布陣)하고 적과 접전하다가 크게 패하고 체포되어 전주옥(全州獄)에 투옥되었다가 12월 27일 석방되었다. 1914년에는 황제의 밀명에 의하여 독립의군부 서기관(獨立義軍府書記官)으로 임명되어 국권회복운동에 참여하였다. 1919년에는 만국평화회의에 보내는 파리장서(巴里長書)에 서명한 137인 중의 1인으로 서명하는 등 국권회복을 위하여 헌신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愛國志士 從二品 通訓大夫 長興高公 禮鎭 之墓(애국지사 종2품 통훈대부 장흥고공 예진 지묘)
從二品 通訓大夫 獨立義士 松川 高禮鎭 先生 之墓(종2품 통훈대부 독립의사 송천 고예진 선생 지묘)
松川 高禮鎭 先生 略傳記(송천 고예진 선생 약전기)
향리 전북 고창군 흥덕면 송암리 411번지
휘 예진 자 계문 호 송천
단기 4208년 고종 을해 음 11월 24일 생
수학 수남 고석진 선생 면암 최익현 선생 관작 늑명 종3품 통훈대부
1. 구국운동
1. 의병구국 - 4238년 10월 5일 을사5조약이 체결됨에 이에 항거하여 이듬해 4239년 병오 음 2월 면암 최익현 선생 휘하의 독립의군부에서(곡성 순창 정읍) 정훈을 담당하여 전국 8도에 의병 궐기의 격문을 전포하고 친상으로 귀가 중(동년 음 6월 17일 졸) 왜군에 피체되여 전주감옥에서 수수삭의 옥고를 치르고 동년 음 12월 27일 환향하시다.
2. 칙명 - 4247 음 2월 대한제국에서는 구국운동에 공이 많음을 인정하고 고종황제께옵서 밀칙 종3품 통훈대부를 명하시다.
3. 일제침략 규탄 상소 - 4252년 1월 21일(음 술오 12월 일) 고종황제 인산 시 대한문 앞에 모인 전국 유림과 함께 일제침략을 규탄하는 상소문을 사황께 올림
4. 파리장서운동 - 4252년 3월 3일 3.1만세운동과 별도로 전국 유림 13
松川 高禮鎭 先生 略傳記(송천 고예진 선생 약전기)
향리 전북 고창군 흥덕면 송암리 411번지
휘 예진 자 계문 호 송천
단기 4208년 고종 을해 음 11월 24일 생
수학 수남 고석진 선생 면암 최익현 선생 관작 늑명 종3품 통훈대부
1. 구국운동
1. 의병구국 - 4238년 10월 5일 을사5조약이 체결됨에 이에 항거하여 이듬해 4239년 병오 음 2월 면암 최익현 선생 휘하의 독립의군부에서(곡성 순창 정읍) 정훈을 담당하여 전국 8도에 의병 궐기의 격문을 전포하고 친상으로 귀가 중(동년 음 6월 17일 졸) 왜군에 피체되여 전주감옥에서 수수삭의 옥고를 치르고 동년 음 12월 27일 환향하시다.
2. 칙명 - 4247 음 2월 대한제국에서는 구국운동에 공이 많음을 인정하고 고종황제께옵서 밀칙 종3품 통훈대부를 명하시다.
3. 일제침략 규탄 상소 - 4252년 1월 21일(음 술오 12월 일) 고종황제 인산 시 대한문 앞에 모인 전국 유림과 함께 일제침략을 규탄하는 상소문을 사황께 올림
4. 파리장서운동 - 4252년 3월 3일 3.1만세운동과 별도로 전국 유림 13
7인 연서로 대한독립 청원서를 작성하여 심산 김창숙 밀사를 상해 임시정부에 파견하여 임시 김규식으로 하여금 파리만국회의에 제출케 하였음
1. 군자금 헌금 - 김제 출신 의사 남촌 곽경렬을 통하여 상해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헌납함
2. 강학 - 일제 식민지 정책이 날로 강화되자 선생은 즐기시던 서초를 끊고 구국 제1의는 문맹퇴치라 여기시고 향리에서 40년간 수백의 후학을 양성하였음
3. 추모사업
1. 사우 봉안 및 문집 발간 - 4295년 임인 음 10월 일 사론으로 면암 최익현 수남 고석진 양선생과 함께 도동사에 추 배 봉안하였으며 4296년 병묘 음 9월 일 문인들에 의해 송천 문집 4권(원 형 리 정)이 발간되었음
2. 파리장서비 건립 - 4306년 계축 10월 3일 성균관 및 전국 유림단 주최로 서울 장충단 공원에 한국유림독립운동 파리장서비를 정부 및 각계의 지원으로 건립함
3. 건국포상 - 4310년 정사 12월 13일 정부는 선생의 구국정신을 숭앙하여 건국포상(제 903호)을 추서함 4323년 경오 12월 26일 정부는 건국훈장증(제123호)을 재추서함
4. 묘비 건립 - 4317년 갑자 윤 10월 일 보훈 당국에 의해 묘비를 건립함
5. 추모비 건립 - 4319년 병인 5월 4일 문인 및 도내 각계 유지들의 후원으로 추모비 및 문인록비를 향리 입구에 건립함

건립위원장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 조경한
비문대자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문학박사 김시종(동리) 비문 소학 족손 고선준 근서

6. 칙명장 독립기념관 전시 - 4320년 정묘 8월 15일 독립기념관 개관과 함께 고종황제의 칙명장이 상설 전시됨
고창군 흥덕면 송암리 산25 애국지사 고순진의 묘소를 찾았다.
長興高氏 掌令公派 世葬碑(장흥고씨 장령공파 세장비)
만취 고순진 애국지사의 묘소를 찾았는데 묘소의 주인은 송천 고예진 선생이었다.
돌아와서 설명글과 비문을 입력하는 과정에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