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전라북도 고창군 신림면 가평리 168-3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내 불녕에게 청문함에 세의에 고사할 수 없어 무사을 불고하고 이에 공의 찬연한 위적을 약술하여 충혼의백을 위로코자 명하노니 어유아공은 금장옥질이라 충의의 가에 태어나 대현의 문에 친구하셨네. 안으로 부모형제에 효우의 도를 행하고 밖으로 국가민족에 충의의 절을 다하셨네. 기리 청사에 빛나고 후생의 사표가 되리라.
송천 고선생 추모비
송천 고선생 추모비
공의 휘는 예진이요 자는 계문이며 송천은 호이니 장흥인이시다. 려조 중서시랑장흥백 휘 복림을 관조로 모시고 증손 삼계 휘 협은 려망에 영광으로 은둔하여 태종이 호조참의로 불르셨으나 불사하시고 아드님 휘 직은 세종때 사헌부장령에 제수되였으나 불취하고 흥덕으로 이우하시니 공의 14대조이시다. 공은 고종 12년 을해 11월 24일 이곳 흥덕면 송암리(종송리) 379번지에서 통정대부 휘 시청의 4남으로 탄생하시니 품성이 청순하고 지기가 고결하였으며 처음 족형 수남 고석진 선생 문하에서 독학하여 문리가 대통하시고 뒤에 면암 최익현 선생에게 지알하며 도학과 예문을 강마하니 도성덕립하여 엄연히 향성의 사표가 되시었다. 어버이 섬김에 지체를 겸양하고 거상에 3년을 곡묘하고 부일에 제목하여 여재의 성을 다하셨으며 형을 공경하기를 엄부처럼 하여 출고반면하고 유무를 함께 하였으며 미식이 있으면 혼자 드시는 일이 없었다. 평거에 아관대대로 염슬위좌하여 고고한 기상을 흐트리
공의 휘는 예진이요 자는 계문이며 송천은 호이니 장흥인이시다. 려조 중서시랑장흥백 휘 복림을 관조로 모시고 증손 삼계 휘 협은 려망에 영광으로 은둔하여 태종이 호조참의로 불르셨으나 불사하시고 아드님 휘 직은 세종때 사헌부장령에 제수되였으나 불취하고 흥덕으로 이우하시니 공의 14대조이시다. 공은 고종 12년 을해 11월 24일 이곳 흥덕면 송암리(종송리) 379번지에서 통정대부 휘 시청의 4남으로 탄생하시니 품성이 청순하고 지기가 고결하였으며 처음 족형 수남 고석진 선생 문하에서 독학하여 문리가 대통하시고 뒤에 면암 최익현 선생에게 지알하며 도학과 예문을 강마하니 도성덕립하여 엄연히 향성의 사표가 되시었다. 어버이 섬김에 지체를 겸양하고 거상에 3년을 곡묘하고 부일에 제목하여 여재의 성을 다하셨으며 형을 공경하기를 엄부처럼 하여 출고반면하고 유무를 함께 하였으며 미식이 있으면 혼자 드시는 일이 없었다. 평거에 아관대대로 염슬위좌하여 고고한 기상을 흐트리
지 않으시고 임사에 정사를 판별하여 의리소재에는 위난도 불사하셨다. 때에 국운이 비색하여 광무 9년 왜적의 강압으로 을사조약이 체결되니 면암 선생을 비롯 항왜의거가 각지에서 일었는데 공은 면암 선생 휘하의 독립의군부에서 토왜격문을 사재로 인쇄하여 8도에 전포하고 백형 순진의 자금으로 화기를 구입하여 헌납했으며 의군의 정훈을 담당하여 정읍 순창 곡성 등지에서 활약하시다가 적에 피체되시어 전라감옥에서 수삭의 옥고를 치르셨다. 옥중에서 면안 선생 순국의 비보를 접하시고 방성통곡 식음을 전폐하여 기진함에 이르시니 그들도 경?하여 방환했다. 광무 18년 월고종황제로부터 종3품 통훈대부 독립의군부 총무관의 밀칙을 받으시고 구국일념으로 불태우시던 중 고종황제 인산때 대한문 앞에 모인 전국유림과 함께 예와 의와 신에 위배된 3대사를 사황께서 진소하시고 이어 을사조약과 경술합방이 적신의 협박으로 체결되었음을 재소하셨으며 불국파리에서 개회중인 만국평화회의에 일제침략을 규탄하고 자주독립을 탄원하는 장서를 전국유림 137인 연서로 밀송하니 이를 역사에서 파리장서사건이라하고 그를 기념하여 전국유림독립운동파리장서비가 서울 장충단 공원에 건립되어 있다. 남촌 곽경열을 통하여 상해임시정부에 군자금을 보낸 사실이 밝혀져 왜경의 감시가 일거수일투족에 미치자 구국의 첩경이 민을 께우치고 인재양성에 있음을 간파하시고 즐기던 주초를 끊으시고 후생계도에 진력하시다가 감격의 을유해방 후 임진 10월 12일 향년 77세로 하세하시니 문인 가마자 수십명의 장송으로 송암리 산직동 선영하에 안장되셨다. 서거후 11년 사륜이 제발하여 면암 수남 우 선생과 함께 도동사에 봉안되시고 송천 문집 4권이 인간되었으며 정부는 건국훈장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배 숙부인 밀양 박씨는 규정공 현후인 준돈의 따님으로 사덕이 겸비하시고 공의 향학과 거의가 내조가 크시어 세인의 칭송을 받으신 분이시다. 4290년 정유12월 2일 83수로 졸하시니 묘는 합폄하다. 2남3녀를 두시니 장남 제선은 윤상 덕상 등 2남 3녀를 두었고 차남 제도는 석상 1남을 두다. 녀는 고흥 유종윤 전주 최
?렬 연일 정운복에게 출가하였다. 오호라. 공은 거가에 효우하여 일향이 긍식하고 국난에 거의하여 국가가 포상하고 학덕이 고매하매 사림이 존사하니 그 학문 그 지절후학의 우러르는 바다. 이에 유림 문인 후손 뜻을 모아 추모비를 세우면서 나에게 그 갈문을 청하므로써 임시정부에서 독립운동에 헌신한 전력이 있어서라 위손 윤상의 효심에 감심되고 한국종교협의회 성균관대표 이사 김석원의 청이 있어 흔연히 붓을 들어 위에 공의 사행을 약술하고 명을 한다.
..중략 ''
단기 4319년 병인 4월 일
..중략 ''
단기 4319년 병인 4월 일
송재 고용진 선생 의적비와 송천 고예진 선생 추모비가 있었다.
송재 고선생 의적비
송재 고선생 의적비
위정척사는 정사지정의요 창의위국은 충신지장절이라. 여기 충의법가의 후예로 정대연원을 이어 마침내 조국광복을 위하여 일생을 바친 고결한 지사가 있으니 바로 장흥고공 휘 용진 자 운서 호 송재이시다. 임진왜란시 92의사의 맹주장 휘 덕붕의 10세손이요 병자호란시 모병찬량 진충구국한 휘 수염의 9세손으로 철종 신해 1851년 10월 1일에 방장산하 가평리에서 통정대부 휘 시필의 2남으로 출생하니 영특한 자질과 강직한 품성에 강개한 기절이 있어 흑백의 분별과 의리의 판단에 늠연불범의 기상을 지녔다. 내행이 독지하여 생양양친과 팔곤계에 효경우애의 도를
위정척사는 정사지정의요 창의위국은 충신지장절이라. 여기 충의법가의 후예로 정대연원을 이어 마침내 조국광복을 위하여 일생을 바친 고결한 지사가 있으니 바로 장흥고공 휘 용진 자 운서 호 송재이시다. 임진왜란시 92의사의 맹주장 휘 덕붕의 10세손이요 병자호란시 모병찬량 진충구국한 휘 수염의 9세손으로 철종 신해 1851년 10월 1일에 방장산하 가평리에서 통정대부 휘 시필의 2남으로 출생하니 영특한 자질과 강직한 품성에 강개한 기절이 있어 흑백의 분별과 의리의 판단에 늠연불범의 기상을 지녔다. 내행이 독지하여 생양양친과 팔곤계에 효경우애의 도를
다하고 학문에 조예가 깊어 약년에 경사자집을 박통하고 중신에 아선자 면암선생을 사사하여 덕행문장이 남주에 중망이 되었다. 국운이 쇠진하여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오적청참과 늑약작환을 위한 분궐상소마저 왜적에게 저지당한 면암 선생이 통분 끝에 자결순국을 결심할 즈음 공이 기제 수남 선생 석진 족제 예진 족질 제만 등을 보내 가향호남 창의지계를 이룩하니 실로 병오호남창의는 공의 주책에서 태동된 것이다. 병오 윤4월에 면암 선생이 태인 무성서원에서 강회유생하여 충용을 고취시키고 의기를 높이 세우니 예진 제만 등은 8도에 격문을 포고하고 족제 순진은 조총 등 군기를 준비하며 공은 의종회 김재귀 등 포사 30여인과 고자성 황종관 김양수 등 사민 100여인을 인솔하여 군세를 도우니 의병의 사기가 충천하였다.
오호라 천하조아하여 국권을 회복치 못한채 의군 800이 순창에서 애닯게 무너지니 의사 정시해는 전사하고 면암 선생과 12의사는 왜병에 피압되고 공은 후일을 기약하라는 스승의 밀령에 따라 ??귀가하였다. 드디어 1908년에 선생의 유지를 받들어 임공병찬 아우 수남과 함께 무신재거의를 도모하다가 사전누설되어 애석하게도 좌절되고 말았다. 1914년 갑인에 고종황제로부터 독립의군부회계총관의 칙령을 받고 항왜구국에 육력분투하다가 끝내 국구사수를 갚지 못하고 경신 2월 28일에 통한의 일생을 마치니 향수 70이었다. 이같은 공의 높은 충절을 현양하여 민국정부는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사손 기상이 공의 의적을 정석에 각하고자 아들 광철 교수를 보
오호라 천하조아하여 국권을 회복치 못한채 의군 800이 순창에서 애닯게 무너지니 의사 정시해는 전사하고 면암 선생과 12의사는 왜병에 피압되고 공은 후일을 기약하라는 스승의 밀령에 따라 ??귀가하였다. 드디어 1908년에 선생의 유지를 받들어 임공병찬 아우 수남과 함께 무신재거의를 도모하다가 사전누설되어 애석하게도 좌절되고 말았다. 1914년 갑인에 고종황제로부터 독립의군부회계총관의 칙령을 받고 항왜구국에 육력분투하다가 끝내 국구사수를 갚지 못하고 경신 2월 28일에 통한의 일생을 마치니 향수 70이었다. 이같은 공의 높은 충절을 현양하여 민국정부는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사손 기상이 공의 의적을 정석에 각하고자 아들 광철 교수를 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