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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라북도 고창군 성송면 학천리 산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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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창군 성송면 학천리 산64 어림마을 뒷산 추산봉 중턱 지은 최전구 선생 거처 망오대 앞 망오단비를 찾아야 한다. 산 속에 있기 때문에 위치를 사전에 많이 알아보았다. 위성지도를 보면서 이곳에 차를 세우고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대나무숲 사이로 길이 있었다. 실시간 위성지도를 보면서 방향을 잡고 올라가고 있다. 산의 높이는 비슷한곳까지 올라왔지만 산 옆으로 가야하는데 길이 없다. 새롭게 만난 길을 따라 가다보니, 너무 아래쪽으로 내려가서 없는 길을 만들면서 또 위쪽으로 묘비도 상석도 없는 묘소도 있었다. 계속 위쪽으로 올라갔다. 대나무 터널 사이로 넓은 열린공간과 바위가 보였다. 하지만 이곳은 아니었다. 조금 더 앞으로 나아갔다. 또 다른 대나무 터널 넘어에 바위와 비석이 보였다. 산을 오르기 시작해서 25분 걸렸다. 내려오면서 만난 리본. 고창군에 문의할 때 올라가는 길에 리본을 달아놓았다는 말을 들었다. 올라갈때 만났던 상석, 묘비가 없는 묘소 지점에서 바로 아래쪽으로 내려왔다. 혹시 최전구 애국지사의 묘소가 아닐까 싶어서 확인하였지만 다른 성씨의 묘소였다. 내려오는데 15분 정도 소요되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智隱 崔先生 望梧壇(지은 최선생 망오단)
智隱 崔先生 望梧壇(지은 최선생 망오단)
지은 최선생 망오단비
아! 이곳은 정헌대부 최공의 망오단이다. 대개 임금으로써 이런 망극한 날을 만나면 신하된 자로써 의리상 구차하게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도의가 만약 막히데 되면 강상과 법도가 무너져 예악이 똥거름이 되고 인류는 짐승이 되리니 어찌 두렵지 않겠는가? 아, 원통하다! 국운이 한 차례 막혀 섬 오랑캐가 호시탐탐하다가 을미년(1895) 흉변으로 모후가 시해를 당하고, 을사년(1905) 늑약으로 종묘사직이 철류와 같이 위태로운 상황에 처해지며 경술년(1910) 국치로 화맥이 길이 떨어지고 무오년(1918) 국상으로 조야가 진동하였다. 우리 최공은 한 번 죽는 것을 '어려운 일'이라고 말하지 않고,
아! 이곳은 정헌대부 최공의 망오단이다. 대개 임금으로써 이런 망극한 날을 만나면 신하된 자로써 의리상 구차하게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도의가 만약 막히데 되면 강상과 법도가 무너져 예악이 똥거름이 되고 인류는 짐승이 되리니 어찌 두렵지 않겠는가? 아, 원통하다! 국운이 한 차례 막혀 섬 오랑캐가 호시탐탐하다가 을미년(1895) 흉변으로 모후가 시해를 당하고, 을사년(1905) 늑약으로 종묘사직이 철류와 같이 위태로운 상황에 처해지며 경술년(1910) 국치로 화맥이 길이 떨어지고 무오년(1918) 국상으로 조야가 진동하였다. 우리 최공은 한 번 죽는 것을 '어려운 일'이라고 말하지 않고,
원한을 품고 통분을 참으며 스스로 깊은 뜻을 지니고 만분의 일이라도 원한을 갚아 부끄러움을 씻고자 절치부심하며 세 번이나 외딴 섬에 유폐되고 27년 동안 동굴에서 살았으니 모두 48년을 감옥에서 지내면서도 끝까지 도의를 굽히지 않앗다. 또 우리 하늘과 땅을 하늘과 땅으로 여기고, 내 집과 밭을 집과 밭으로 여겨서 동굴을 '독선', 움막을 '피서', 단을 '망오'라 하엿으며, 마음은 진나라를 황제로 섬기는 일을 수치로 생각하고 몸은 한나라 왕실을 중흥시키는 의리에 두었으니 옛날에 이른바 '살기는 어렵고 죽기는 쉽다.'는 말이 공을 두고 한 것이 아니겠는가? 아! 옛날에 충신과 의사가 자신을 잊고 나라에 목숨을 바친 사람은 평소 축적된 바가 있지 않으면 해낼 수 없다. 공의 휘는 전구이고, 자는 우보이며, 호는 지은이니 전주인이다. 관직은 의군부 순찰사 소경원 참봉을 지냈다. 문도들이 수백 명이며 마지막까지 남아있는 자들은 14인이니 권석규, 권응규, 김기환, 정휴직, 봉인학, 봉택규, 김천현, 이병중, 권영옥, 최준식, 정영원, 서치문, 정휴문, 최익렬이다. 후학들이 단을 쌓아 그를 기념하기 위하여 봉창조, 권태원, 권영봉이 찾아와 나에게 새길 글을 물으니, 사양하였으나 그러지 못하고 단지 의롭게 마친 한 절개를 들어 기록한다.
때는 기유년(1969) 우수날 진주 정익환은 삼가 짓고 쓴다.
왕년에 완성하지 못한 것을 탄식하였는데, 12년이 지난 신유년(1981)에 14명의 자손들이 각각 성력을 보태어 유지에 세우고 드디어 방명을 새기노라.
때는 기유년(1969) 우수날 진주 정익환은 삼가 짓고 쓴다.
왕년에 완성하지 못한 것을 탄식하였는데, 12년이 지난 신유년(1981)에 14명의 자손들이 각각 성력을 보태어 유지에 세우고 드디어 방명을 새기노라.
최전구 선생은 이곳에서 은거를 하였다고 한다.
내려오면서 만난 리본. 고창군에 문의할 때 올라가는 길에 리본을 달아놓았다는 말을 들었다.
고창군 성송면 학천리 산64 어림마을 뒷산 추산봉 중턱 지은 최전구 선생 거처 망오대 앞 망오단비를 찾아야 한다.
이곳부턴 걸어서 올라갔다.
대나무숲 사이로 길이 있었다. 실시간 위성지도를 보면서 방향을 잡고 올라가고 있다.
산의 높이는 비슷한곳까지 올라왔지만 산 옆으로 가야하는데 길이 없다.
새롭게 만난 길을 따라 가다보니, 너무 아래쪽으로 내려가서 없는 길을 만들면서 또 위쪽으로
묘비도 상석도 없는 묘소도 있었다. 계속 위쪽으로 올라갔다.
대나무 터널 사이로 넓은 열린공간과 바위가 보였다.
하지만 이곳은 아니었다. 조금 더 앞으로 나아갔다.
또 다른 대나무 터널 넘어에 바위와 비석이 보였다. 산을 오르기 시작해서 25분 걸렸다.
智隱 崔先生 望梧壇(지은 최선생 망오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