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전라북도 고창군 성내면 월산리 171-4
- 탐방로그
- 고제만(고치범) 선생 의적비는 고창군 성내면 월산리 171-4에 위치한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竹溪 高公 濟萬 義蹟碑(죽계 고공 제만 의적비)
竹溪 高公 濟萬 義蹟碑(죽계 고공 제만 의적비)
죽계 고공 의적비
이곳 흥성현 죽림동에 있는 6척의 큰 비석은 사람들로 하여금 처다 볼 수록 의기로운 마음을 일으키게 하니 바로 죽계 고제만, 자 치범의 의적비이다. 공은 장흥인으로 여말 절신 참의를 지낸 신부의 후에이며, 임진왜란 대 의병을 모은 여곡 덕붕과 노서(윤선거)의 수제자인 요은 여흥이 중세에 드러난 조상이다. 철종 경신년(1860) 8월 21일에 죽림마을 집에서 공이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학생공 성진은 재주는 있었으나 수명이 짧아 공이 태어난 지 겨우 첫 돌만에 돌아가셨다. 어머니 나주 임씨 유인은 현숙하여 절개를 지키고 공을 가르칠 때 엄한 부도가 있었으며 비록 작은 실수라도 용서하지 않았다. 일을 살필 때가 되자 일찍 세상을 떠난 아버지를 애통해하였고 사람들이 아버지를 부르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눈물이 줄줄 흘러 옷깃을 적시곤 하였다. 공은 다른 형제가 없어 홀로 어머니를 봉양하면서 잠시도 떨어지지 않았고 혹시라도 어머니의 마음이 상할가 염려하여 기쁜 얼굴로 뜻을 받들어 순종하여 슬픔과 근심이 병에 이르지 않아 천수를 누린 것은
이곳 흥성현 죽림동에 있는 6척의 큰 비석은 사람들로 하여금 처다 볼 수록 의기로운 마음을 일으키게 하니 바로 죽계 고제만, 자 치범의 의적비이다. 공은 장흥인으로 여말 절신 참의를 지낸 신부의 후에이며, 임진왜란 대 의병을 모은 여곡 덕붕과 노서(윤선거)의 수제자인 요은 여흥이 중세에 드러난 조상이다. 철종 경신년(1860) 8월 21일에 죽림마을 집에서 공이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학생공 성진은 재주는 있었으나 수명이 짧아 공이 태어난 지 겨우 첫 돌만에 돌아가셨다. 어머니 나주 임씨 유인은 현숙하여 절개를 지키고 공을 가르칠 때 엄한 부도가 있었으며 비록 작은 실수라도 용서하지 않았다. 일을 살필 때가 되자 일찍 세상을 떠난 아버지를 애통해하였고 사람들이 아버지를 부르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눈물이 줄줄 흘러 옷깃을 적시곤 하였다. 공은 다른 형제가 없어 홀로 어머니를 봉양하면서 잠시도 떨어지지 않았고 혹시라도 어머니의 마음이 상할가 염려하여 기쁜 얼굴로 뜻을 받들어 순종하여 슬픔과 근심이 병에 이르지 않아 천수를 누린 것은
죽계 고공 의적비
이곳 흥성현 죽림동에 있는 6척의 큰 비석은 사람들로 하여금 처다 볼 수록 의기로운 마음을 일으키게 하니 바로 죽계 고제만, 자 치범의 의적비이다. 공은 장흥인으로 여말 절신 참의를 지낸 신부의 후에이며, 임진왜란 대 의병을 모은 여곡 덕붕과 노서(윤선거)의 수제자인 요은 여흥이 중세에 드러난 조상이다. 철종 경신년(1860) 8월 21일에 죽림마을 집에서 공이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학생공 성진은 재주는 있었으나 수명이 짧아 공이 태어난 지 겨우 첫 돌만에 돌아가셨다. 어머니 나주 임씨 유인은 현숙하여 절개를 지키고 공을 가르칠 때 엄한 부도가 있었으며 비록 작은 실수라도 용서하지 않았다. 일을 살필 때가 되자 일찍 세상을 떠난 아버지를 애통해하였고 사람들이 아버지를 부르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눈물이 줄줄 흘러 옷깃을 적시곤 하였다. 공은 다른 형제가 없어 홀로 어머니를 봉양하면서 잠시도 떨어지지 않았고 혹시라도 어머니의 마음이 상할가 염려하여 기쁜 얼굴로 뜻을 받들어 순종하여 슬픔과 근심이 병에 이르지 않아 천수를 누린 것은
이곳 흥성현 죽림동에 있는 6척의 큰 비석은 사람들로 하여금 처다 볼 수록 의기로운 마음을 일으키게 하니 바로 죽계 고제만, 자 치범의 의적비이다. 공은 장흥인으로 여말 절신 참의를 지낸 신부의 후에이며, 임진왜란 대 의병을 모은 여곡 덕붕과 노서(윤선거)의 수제자인 요은 여흥이 중세에 드러난 조상이다. 철종 경신년(1860) 8월 21일에 죽림마을 집에서 공이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학생공 성진은 재주는 있었으나 수명이 짧아 공이 태어난 지 겨우 첫 돌만에 돌아가셨다. 어머니 나주 임씨 유인은 현숙하여 절개를 지키고 공을 가르칠 때 엄한 부도가 있었으며 비록 작은 실수라도 용서하지 않았다. 일을 살필 때가 되자 일찍 세상을 떠난 아버지를 애통해하였고 사람들이 아버지를 부르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눈물이 줄줄 흘러 옷깃을 적시곤 하였다. 공은 다른 형제가 없어 홀로 어머니를 봉양하면서 잠시도 떨어지지 않았고 혹시라도 어머니의 마음이 상할가 염려하여 기쁜 얼굴로 뜻을 받들어 순종하여 슬픔과 근심이 병에 이르지 않아 천수를 누린 것은
공이 색양의 도리를 지극히 다했기 때문이다. 공의 체구는 늘신하고 기상은 드높았으며 눈은 빛나고 재주와 슬기가 있었다. 스승에게 나아가 공부할 때 마음을 오로지하고 학문에 힘써 문리가 갑자기 상승하여 함께 공부하는 선배들도 모두 미칠 수 없어 깜짝 놀랐다. 일찍이 스스로 분연히 말하기를 '사내가 세상에 태어나 학문을 하지 않을 수 없고 학문을 할 때는 반드시 식견을 최우선으로 삼아 길[추구하는 방향]을 바로잡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다. 면암 선생이 한 나라의 달존으로써 유림의 종주라는 소리를 듣고 족숙인 수남 고석진을 모시고 걸어서 정산의 장구동에 가서 찾아뵈었다. 선생도 기중을 제자들보다 특별하게 여겨 한결같이 《화서아언》 및 요의로써 정성스럽게 인도해주시니 공이 기쁜 마음으로 가슴에 새겨 마치 칠십 제자가 공자에게 했던 것처럼 중화와 오랑캐의 구별을 더욱 엄하게 하여 일도양단하고 여분을 남기지 않았다. 을사년 늑약이 체결되자 국권이 이양되었다. 비록 면암선생의 큰 의리로도 흉역들이 들끓는 것을 어찌할 수 없어 아무것도 할 수가 없게 되자 자손과 문생들이 번갈아 가면서 간하여도 받아들이지 않고 문을 닫고 자진하려고 작정하였다. 공이 소식을 듣고 수남 및 족숙 송천 에진 선생을 모시고 곧바로 달려가 보니, 면암선생의 단식이 이미 여러 날이 지나있었다. 의를 지킴이 이와 같을 수는 없다고 울며 간청하여 마침내 창의할 계책을 결정하고 선생을 모시고 남하하여 여러 계획을 독보 옥천에 의로운 깃발을 세웠으니 실로 공의 노력이 많았다. 면암선생이 적에게 잡혔을 때는 공이 사실 해외에 잇어서 서로 미치지 못하였다. 아! 면암선생이 순국하고 경술년에 나라가 망하게 되자 원통하고 분하여 살고자하는 마음이 없어 복수를 하기 위해 와신상담할 처지가 아니었다. 갑인년(1914)에 광무제의 밀칙을 받들어 '대한독립의군부'를 창설하여 참모로서 토복에 힘을 다하였다. 기미년(1919)에 면우 곽종석, 지산 김복한, 수남 고석진 및 전국 137명의 유림들과 함께 파리에 장서를 보내 일본 오랑캐의 만행을 통렬하게 드러내려 하였으나 일이 발각되어 군산에서 체포되었다. 옥에 사로잡힌 1년여 동안 갖은 형벌을 받고 고생하면서도 굽히지 않다가 결국 형독으로 일어나지 못하였다. 임오년(1942) 8월 10일, 82세의 수명을 누렸다. 이후 죽립 뒤 유좌의 언덕에 거듭 장례를 지냈다. 공은 부인이 두 명이니, 울산 김씨는 공이 병석에 눕자 손가락을 깨물어 수명을 연장시켰다. 함평 이씨는 3남 2녀를 낳았다. 장남 면상 또한 의군부 참모를 지냇고 다음으로 순상, 만상은 유고 몇 권이 있다. 광복 후 을사년(1965)에 정부로부터 독립훈장 애족장을 특별히 추서 받았고, 임자년(1972) 장충공원에 파리장서비를 세웠으며, 기사년(1989)에 유림들의 논의로 옥제사에 추향되었으니 국가의 표창과 사림의 존숭이 지극하다고 할만하다. 을미년과 경술년의 참화를 어찌 차마 말할 수 있겠는가? 우리 강토를 빼앗고 우리 국민을 종으로 삼으며 우리 황제의 모후를 무참하게 시해하는
공이 색양의 도리를 지극히 다했기 때문이다. 공의 체구는 늘신하고 기상은 드높았으며 눈은 빛나고 재주와 슬기가 있었다. 스승에게 나아가 공부할 때 마음을 오로지하고 학문에 힘써 문리가 갑자기 상승하여 함께 공부하는 선배들도 모두 미칠 수 없어 깜짝 놀랐다. 일찍이 스스로 분연히 말하기를 '사내가 세상에 태어나 학문을 하지 않을 수 없고 학문을 할 때는 반드시 식견을 최우선으로 삼아 길[추구하는 방향]을 바로잡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다. 면암 선생이 한 나라의 달존으로써 유림의 종주라는 소리를 듣고 족숙인 수남 고석진을 모시고 걸어서 정산의 장구동에 가서 찾아뵈었다. 선생도 기중을 제자들보다 특별하게 여겨 한결같이 《화서아언》 및 요의로써 정성스럽게 인도해주시니 공이 기쁜 마음으로 가슴에 새겨 마치 칠십 제자가 공자에게 했던 것처럼 중화와 오랑캐의 구별을 더욱 엄하게 하여 일도양단하고 여분을 남기지 않았다. 을사년 늑약이 체결되자 국권이 이양되었다. 비록 면암선생의 큰 의리로도 흉역들이 들끓는 것을 어찌할 수 없어 아무것도 할 수가 없게 되자 자손과 문생들이 번갈아 가면서 간하여도 받아들이지 않고 문을 닫고 자진하려고 작정하였다. 공이 소식을 듣고 수남 및 족숙 송천 에진 선생을 모시고 곧바로 달려가 보니, 면암선생의 단식이 이미 여러 날이 지나있었다. 의를 지킴이 이와 같을 수는 없다고 울며 간청하여 마침내 창의할 계책을 결정하고 선생을 모시고 남하하여 여러 계획을 독보 옥천에 의로운 깃발을 세웠으니 실로 공의 노력이 많았다. 면암선생이 적에게 잡혔을 때는 공이 사실 해외에 잇어서 서로 미치지 못하였다. 아! 면암선생이 순국하고 경술년에 나라가 망하게 되자 원통하고 분하여 살고자하는 마음이 없어 복수를 하기 위해 와신상담할 처지가 아니었다. 갑인년(1914)에 광무제의 밀칙을 받들어 '대한독립의군부'를 창설하여 참모로서 토복에 힘을 다하였다. 기미년(1919)에 면우 곽종석, 지산 김복한, 수남 고석진 및 전국 137명의 유림들과 함께 파리에 장서를 보내 일본 오랑캐의 만행을 통렬하게 드러내려 하였으나 일이 발각되어 군산에서 체포되었다. 옥에 사로잡힌 1년여 동안 갖은 형벌을 받고 고생하면서도 굽히지 않다가 결국 형독으로 일어나지 못하였다. 임오년(1942) 8월 10일, 82세의 수명을 누렸다. 이후 죽립 뒤 유좌의 언덕에 거듭 장례를 지냈다. 공은 부인이 두 명이니, 울산 김씨는 공이 병석에 눕자 손가락을 깨물어 수명을 연장시켰다. 함평 이씨는 3남 2녀를 낳았다. 장남 면상 또한 의군부 참모를 지냇고 다음으로 순상, 만상은 유고 몇 권이 있다. 광복 후 을사년(1965)에 정부로부터 독립훈장 애족장을 특별히 추서 받았고, 임자년(1972) 장충공원에 파리장서비를 세웠으며, 기사년(1989)에 유림들의 논의로 옥제사에 추향되었으니 국가의 표창과 사림의 존숭이 지극하다고 할만하다. 을미년과 경술년의 참화를 어찌 차마 말할 수 있겠는가? 우리 강토를 빼앗고 우리 국민을 종으로 삼으며 우리 황제의 모후를 무참하게 시해하는
일까지 극에 달하였다. 교활한 저 섬 오랑캐는 실로 우리가 하늘을 함께할 수 없는 원수가 되었으니 조금이라도 본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저들의 가죽을 깔고 자고, 살을 씹어 원수를 갚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이 없는데 더군다나 공과 같이 의로운 기운을 타고난 사람은 어떠하겠으며, 공과 같이 면암선생을 스승으로 따르고 존양의 의리를 강구하여 밝히는 사람에게서 이겠는가? 위험을 무릎 쓰고 떨쳐싸우다 죽어 시신으로 돌아왔으니 평소 뜻을 견고히 하였으나 애석하게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나 선비는 의를 잡을 따름이니 어찌 일의 성패로써 그 우열을 따지겠는가? 둘째 손자 광진과 현손 철석이 시간이 오래 흘러 의로운 자취가 혹시 묻힐까를 염려하여 장차 비석에 새기려고 할 때, 증손 연규가 나에게 글을 부탁하여 여러 후손에게 경계하려고 하였다. 아! 오늘날 위정자를 돌아보면 일본이 깊은 원수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동반자로 보아 그들의 힘을 빌려 나라의 안보를 지키려고 하니 잘못된 일이 아닌가? 나는 사양하지 않고 붓을 휘둘로 써서 지금과 후세에 의를 저버려 나라를 잃는 자들에게 고하노라.
광복 53년 정축년(1997) 천중절[단오절]에 거창 신사범은 삼가 짓는다. 의령 남대희는 삼가 쓴다.
광복 53년 정축년(1997) 천중절[단오절]에 거창 신사범은 삼가 짓는다. 의령 남대희는 삼가 쓴다.
일까지 극에 달하였다. 교활한 저 섬 오랑캐는 실로 우리가 하늘을 함께할 수 없는 원수가 되었으니 조금이라도 본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저들의 가죽을 깔고 자고, 살을 씹어 원수를 갚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이 없는데 더군다나 공과 같이 의로운 기운을 타고난 사람은 어떠하겠으며, 공과 같이 면암선생을 스승으로 따르고 존양의 의리를 강구하여 밝히는 사람에게서 이겠는가? 위험을 무릎 쓰고 떨쳐싸우다 죽어 시신으로 돌아왔으니 평소 뜻을 견고히 하였으나 애석하게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나 선비는 의를 잡을 따름이니 어찌 일의 성패로써 그 우열을 따지겠는가? 둘째 손자 광진과 현손 철석이 시간이 오래 흘러 의로운 자취가 혹시 묻힐까를 염려하여 장차 비석에 새기려고 할 때, 증손 연규가 나에게 글을 부탁하여 여러 후손에게 경계하려고 하였다. 아! 오늘날 위정자를 돌아보면 일본이 깊은 원수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동반자로 보아 그들의 힘을 빌려 나라의 안보를 지키려고 하니 잘못된 일이 아닌가? 나는 사양하지 않고 붓을 휘둘로 써서 지금과 후세에 의를 저버려 나라를 잃는 자들에게 고하노라.
광복 53년 정축년(1997) 천중절[단오절]에 거창 신사범은 삼가 짓는다. 의령 남대희는 삼가 쓴다.
광복 53년 정축년(1997) 천중절[단오절]에 거창 신사범은 삼가 짓는다. 의령 남대희는 삼가 쓴다.
고창군 성내면 월산리 171-4 고제만(고치범) 선생 의적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