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전라북도 고창군 대산면 춘산리 산116-2
- 탐방로그
- 김영수 추모비를 찾기 위해 고창군 대산면 춘산리 산116-2에 왔다. 여러 비석군들이 함께 위치한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방방곡곡에서 갖은 약탈과 광적인 만행의 이변은 극에 달하였는지라 나라를 뺴앗긴 통한과 학정에 의분한 공은 명성의 광산김씨로 휘는 영수이고 성재는 호이니 임진년에 창의로서 정유재란때 순절하신 국재공 휘 성진의 13개 후예로 그 맥을 이어 고창군 대산면 중산리 927번지에서 서기 1914년 5월 9일 학현선생과 지산두 여사와에 독신으로 태어나 남달리 영민출중하여 일찌기 큰 뜻을 갖추던차에 일제가 서기 1939년 세계 제2차대전을 일으키자 26세의 나이에 놓칠수없는 좋은 기회라 여기고 막후에서 교란을 도모하고자 기지를 발휘하여 고창에서부터 정읍 부안 김제등지의 동지 40여인을 규합하여 결사대를 조직하고 김제에 주둔한 왜군헌을 섬멸함과 각지 경찰서를 습격하려다 가 배신한 간배에 의하여 거사직전에 발각되자 뜻을 이루지 못한 공은 은둔하며 또다시 계책을 꾀하다가 이듬해 서기 1940년12월 17일 왜관헌에 체포되어 혹독한 국문에도 굳은 결심을 굴하지 않고 미결3년을 지난뒤에야 1년 6개월의 가중형이 선고됨에 전주감옥에서 수형중 그간에 있었던 가혹한 고문의 여독때문에 염원하던 광복을 못본체 서기 1944년 2월 12일 30세를 일기로 청춘을 불살라 조국에 바치는 장렬한 순국을 하시니 오! 슬프도다. 공은 일찌기 ?성의 태어지변을 알고 생을 놓아 의를 취하여 사람위에 높이서니 어찌 장하다 아니하리요. 외아들 정기가 있기에 공이 가신 43년에야 비로소 그 의열이 세상에 빛나게되니 정부에서 독립서훈과 표창을 추서하고 국비로 묘역을 쌓아 석물의 법도를 갖추니 이에 대산면내 기관장들과 뜻있는 제현들이 주축이 되어 인의지심으로 그 찬란한 의로운 자취를 천추에 기리고자 공의 탄일에 즈음하여 추모의 비를 세우노니 청사에 빛날 의행사실의 국란호국에 충혼은 후세에 귀감이 되리로다.
GPS상의 주소는 고창군 대산면 춘산리 산116-2이다.
의사 김공영수 추모비
의사 김공영수 추모비
의사 성제 김공 영수 추모비
저 의라는 것은 하늘이 천지만물이 성실하도록 이되게 하듯 사람에게 있어 삶의 규범을 행할때 옳은 일에 생을 버려서도 바르게 세움이 바로 의라할 것인바 맹자께서 생의 욕망과 또한 의에 욕망을 겸하여 얻지 못할진데 생을 놓고 의를 취하는 "사생취의" 교훈은 인도에 절실하므로 만약 사람이 바름을 세울 의가 없으면 하늘에 이됨이 없어 천지만물이 불성실함을 보는 것과 다름이 없을것이다. 이조말엽 우리나라의 사정은 개회기의 변혁으로 술렁일때 국력이 쇠퇴함에 서기 1905년 일제는 을사보호조약이라는 미명의 구실로 우리 강토에 발을 들여 놓고 5년 뒤인 서기 1910년에 드디어 가면의 가죽을 벗고 매국노들을 앞세워 강제로 한일합방을 맺어 우리조국을 약탈하고서 수십년의 기간
저 의라는 것은 하늘이 천지만물이 성실하도록 이되게 하듯 사람에게 있어 삶의 규범을 행할때 옳은 일에 생을 버려서도 바르게 세움이 바로 의라할 것인바 맹자께서 생의 욕망과 또한 의에 욕망을 겸하여 얻지 못할진데 생을 놓고 의를 취하는 "사생취의" 교훈은 인도에 절실하므로 만약 사람이 바름을 세울 의가 없으면 하늘에 이됨이 없어 천지만물이 불성실함을 보는 것과 다름이 없을것이다. 이조말엽 우리나라의 사정은 개회기의 변혁으로 술렁일때 국력이 쇠퇴함에 서기 1905년 일제는 을사보호조약이라는 미명의 구실로 우리 강토에 발을 들여 놓고 5년 뒤인 서기 1910년에 드디어 가면의 가죽을 벗고 매국노들을 앞세워 강제로 한일합방을 맺어 우리조국을 약탈하고서 수십년의 기간
방방곡곡에서 갖은 약탈과 광적인 만행의 이변은 극에 달하였는지라 나라를 뺴앗긴 통한과 학정에 의분한 공은 명성의 광산김씨로 휘는 영수이고 성재는 호이니 임진년에 창의로서 정유재란때 순절하신 국재공 휘 성진의 13개 후예로 그 맥을 이어 고창군 대산면 중산리 927번지에서 서기 1914년 5월 9일 학현선생과 지산두 여사와에 독신으로 태어나 남달리 영민출중하여 일찌기 큰 뜻을 갖추던차에 일제가 서기 1939년 세계 제2차대전을 일으키자 26세의 나이에 놓칠수없는 좋은 기회라 여기고 막후에서 교란을 도모하고자 기지를 발휘하여 고창에서부터 정읍 부안 김제등지의 동지 40여인을 규합하여 결사대를 조직하고 김제에 주둔한 왜군헌을 섬멸함과 각지 경찰서를 습격하려다 가 배신한 간배에 의하여 거사직전에 발각되자 뜻을 이루지 못한 공은 은둔하며 또다시 계책을 꾀하다가 이듬해 서기 1940년12월 17일 왜관헌에 체포되어 혹독한 국문에도 굳은 결심을 굴하지 않고 미결3년을 지난뒤에야 1년 6개월의 가중형이 선고됨에 전주감옥에서 수형중 그간에 있었던 가혹한 고문의 여독때문에 염원하던 광복을 못본체 서기 1944년 2월 12일 30세를 일기로 청춘을 불살라 조국에 바치는 장렬한 순국을 하시니 오! 슬프도다. 공은 일찌기 ?성의 태어지변을 알고 생을 놓아 의를 취하여 사람위에 높이서니 어찌 장하다 아니하리요. 외아들 정기가 있기에 공이 가신 43년에야 비로소 그 의열이 세상에 빛나게되니 정부에서 독립서훈과 표창을 추서하고 국비로 묘역을 쌓아 석물의 법도를 갖추니 이에 대산면내 기관장들과 뜻있는 제현들이 주축이 되어 인의지심으로 그 찬란한 의로운 자취를 천추에 기리고자 공의 탄일에 즈음하여 추모의 비를 세우노니 청사에 빛날 의행사실의 국란호국에 충혼은 후세에 귀감이 되리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