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전라남도 화순군 도암면 도장리 406-3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화순군 도암면 도장리 406-3 항일 애국지사 김용상, 김영하 선생 충혼탑을 찾아왔다.
항일애국지사 충혼탑
만세에 빛날 이 탑은 후손들에게 나라 사랑하는 정신과 국가관을 함양하기 위하여 김용상선생 생가 터에 진주김씨 화순종중 유지들의 성금과 화순군의 지원으로 2007년 11월 5일 건립하였습니다. 애국 애족하는 모든 분들은 발걸음을 멈추고 경건한 마음으로 참배합시다. 그리고 자라나는 어린이들에게 교육의 장이 되도록 합시다.
만세에 빛날 이 탑은 후손들에게 나라 사랑하는 정신과 국가관을 함양하기 위하여 김용상선생 생가 터에 진주김씨 화순종중 유지들의 성금과 화순군의 지원으로 2007년 11월 5일 건립하였습니다. 애국 애족하는 모든 분들은 발걸음을 멈추고 경건한 마음으로 참배합시다. 그리고 자라나는 어린이들에게 교육의 장이 되도록 합시다.
항일애국지사 김용상 김영하 선생 충혼탑
松亭 金榮夏先生 忠魂碑文(송정 김영하선생 충혼비문)
愛國志士(애국지사) 金榮夏(김영하)선생의 자는 重先(중선), 호는 松亭(송정)으로 고종9년 1872년 전남 화순군 도암면 도장리에서 출생하였으며, 선생은 본디 천품이 강직하고 氣骨(기골)이 장대하였으며, 일찍이 후일 의병장이었던 海石(해석) 金鏞相(김용상) 族戚(족척)의 문하에서 수학하면서 심신을 연마하고 애국애족정신을 배워 익혔다. 1905년 乙巳勒約(을사늑약)이 체결되고 1910년 抗日合邦(한일합방)이 되어 나라가 망하게 되자 선생은 통분을 이기지 못하여 의병에 가담하였고 일제의 침략에 항거하였다. 그러나 衆寡不敵(중과부적)으로 의병이 分散之境(분산지경)에 이르자 뜻을 같이한 정동근, 고성후, 양재홍, 김교낙, 문재교 등과 함께 재경광복단과의 연락하에 지하비밀 독립운동단체인 光復團(광복단)을 조직하였고, 전라남도 광복단 제일지단의 일원이 되어 國權回復(국권회복)을 위해 투쟁하였다. 선생께서는 또한 자신의 전 재산을 광복 독립운동 헌금으로 내놓은 한편, 나주의 정경원, 윤덕열. 함평의 정치국 등 도내 부호에게도 광복군 군자금을 출원케하여 광복군과 의병을 돕고 해외 망명동지를 도우며 獄中同志(옥중동지) 구출에 주력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그러던중 함평에서 군자금 제공자의 밀고로 왜관으로부터 체포령이 내렸다. 선생께서는 향리로 내려와 은신해 있다가 1918년 5월에 능주 헌병대에 체포되고 그후 함평으로 압송되었으며, 목포 검사국을 거쳐 광주형무소에 복역중 제일심에서 징역10년을 선고 받았다. 그러나 이에 대한 불복항소로 1919년3월5일 대구 복심원에서 원심대로 징역10년을 선고받고 복역중 고문으로 인한 여독으로 발병, 1921년1월11일에 옥사하였다. 1980년8월14일 제1238호 독립의사 건국포장이 추서되었고 다시 1990년12월26일 제213호 建國勳章(건국훈장) 愛國章(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선생이 순국한지 86년 광복이 되어 독립된 나라에서 행복하게 사는 우리 후손들은 늦게나마 그 업적을 길이 남기기 위해 이 비를 세우다.
愛國志士(애국지사) 金榮夏(김영하)선생의 자는 重先(중선), 호는 松亭(송정)으로 고종9년 1872년 전남 화순군 도암면 도장리에서 출생하였으며, 선생은 본디 천품이 강직하고 氣骨(기골)이 장대하였으며, 일찍이 후일 의병장이었던 海石(해석) 金鏞相(김용상) 族戚(족척)의 문하에서 수학하면서 심신을 연마하고 애국애족정신을 배워 익혔다. 1905년 乙巳勒約(을사늑약)이 체결되고 1910년 抗日合邦(한일합방)이 되어 나라가 망하게 되자 선생은 통분을 이기지 못하여 의병에 가담하였고 일제의 침략에 항거하였다. 그러나 衆寡不敵(중과부적)으로 의병이 分散之境(분산지경)에 이르자 뜻을 같이한 정동근, 고성후, 양재홍, 김교낙, 문재교 등과 함께 재경광복단과의 연락하에 지하비밀 독립운동단체인 光復團(광복단)을 조직하였고, 전라남도 광복단 제일지단의 일원이 되어 國權回復(국권회복)을 위해 투쟁하였다. 선생께서는 또한 자신의 전 재산을 광복 독립운동 헌금으로 내놓은 한편, 나주의 정경원, 윤덕열. 함평의 정치국 등 도내 부호에게도 광복군 군자금을 출원케하여 광복군과 의병을 돕고 해외 망명동지를 도우며 獄中同志(옥중동지) 구출에 주력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그러던중 함평에서 군자금 제공자의 밀고로 왜관으로부터 체포령이 내렸다. 선생께서는 향리로 내려와 은신해 있다가 1918년 5월에 능주 헌병대에 체포되고 그후 함평으로 압송되었으며, 목포 검사국을 거쳐 광주형무소에 복역중 제일심에서 징역10년을 선고 받았다. 그러나 이에 대한 불복항소로 1919년3월5일 대구 복심원에서 원심대로 징역10년을 선고받고 복역중 고문으로 인한 여독으로 발병, 1921년1월11일에 옥사하였다. 1980년8월14일 제1238호 독립의사 건국포장이 추서되었고 다시 1990년12월26일 제213호 建國勳章(건국훈장) 愛國章(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선생이 순국한지 86년 광복이 되어 독립된 나라에서 행복하게 사는 우리 후손들은 늦게나마 그 업적을 길이 남기기 위해 이 비를 세우다.
海石 金鏞相先生 忠魂碑文(해석 김용상선생 충혼비문)
海石(해석) 金鏞相(김용상)선생의 자는 益重(익중)이다 진주후인으로 敬順王(경순왕)의 8王子(왕자)이자 三韓贊文功臣(삼한찬문공신) 金紫光祿大夫(금자광록대부) 門下侍中(문하시중) 三知府使(삼지부사)를 지내고 晋城君(진성군)에 봉해진 諱(휘) 錘(추)의 후예이다. 輔國崇祿大夫(보국숭록대부) 傾書雲觀事(경서운관사) 判門下府事(판문하부사) 都評議使司事(도평의사사사) 集賢殿(집현전) 太學士(태학사)로 晋陽府院君(진양부원군)에 봉해진 中始祖(중시조) 諱(휘) 茂珍(무진)의 후손이며 諱(휘) 履用(이용)은 門下判三司(문하판삼사)로 보은 정몽주 선생, 목은 이색 선생 등의 제현과 함께 상소를 하였다가 시류에 거슬려 무안으로 유배되었다. 선생의 曾祖(증조)의 諱(휘)는 應(응)?이며 호는 愚拙齊(우졸제)인데 학행과 천성이 출중하였고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조고의 諱(휘)는 伸鐸(신탁)이고 호는 조락재인데 문장과 올바른 처신으로 세상에 이름이 났고, 考(고)의 諱(휘)는 한봉인데 기자가 준굉하고 향약규범을 강수했으며, ?는 밀양 박씨 효서의 딸이다. 선생은 철종9년(1858년) 무오3월20일에 도장리에서 출생하였는데 재질이 탁월하고 두루 경전을 익혀 詩書(시서)와 百家書(백가서)를 통달하였다. 선생의 詩律賦詞(시율부사)가 세상에 알려져 경향각지의 선지들의 추앙을 받았다. 고종21년인 갑신년 이래로 국운이 風前燈火(풍전등화)처럼 위태로워지자 田園(전원)에 隱居(은거)할 생각을 버리고 후생을 가르치는데 뜻을 품은 선비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1905년 乙巳勒約(을사늑약)이 체결되고 1910년 庚戌(경술) 抗日合邦(한일합방)이 되어 나라가 망하게 되자 痛憤(통분)을 이기지 못하여 전국에 뜻을 같이 한 인사들을 규합하여 1914년 京鄕義士團(경향의사단)을 조직하여 일제 침략에 항거하였다. 선생은 자신의 전재산을 國權回復獻金(국헌회복헌금)으로 내놓은 한편, 애국지사 이락정과 함께 경성부 김태영, 전남영암 유병하, 광주임곡 성기섭, 함평 오덕영 외 3명에게서 금 207圓(원)을 모금하여 광복군 군자금과 의병활동을 돕고 있던중 군자금 제공자의 밀고로 審院(심원)에서 復國運動(복국운동)의 정당성을 불굴의 의지로 지키며 抗言(항언)하고 광주형무소에 이감 복역중 고문의 여독으로 별세하였다. 2003년8월15일 제142750호 독립의사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선생의 위업은 비록 뒤늦게 알려졌지만 세상에 이름을 떨친 업적을 자손만대에 길이 남기고자 이 비를 세우다
海石(해석) 金鏞相(김용상)선생의 자는 益重(익중)이다 진주후인으로 敬順王(경순왕)의 8王子(왕자)이자 三韓贊文功臣(삼한찬문공신) 金紫光祿大夫(금자광록대부) 門下侍中(문하시중) 三知府使(삼지부사)를 지내고 晋城君(진성군)에 봉해진 諱(휘) 錘(추)의 후예이다. 輔國崇祿大夫(보국숭록대부) 傾書雲觀事(경서운관사) 判門下府事(판문하부사) 都評議使司事(도평의사사사) 集賢殿(집현전) 太學士(태학사)로 晋陽府院君(진양부원군)에 봉해진 中始祖(중시조) 諱(휘) 茂珍(무진)의 후손이며 諱(휘) 履用(이용)은 門下判三司(문하판삼사)로 보은 정몽주 선생, 목은 이색 선생 등의 제현과 함께 상소를 하였다가 시류에 거슬려 무안으로 유배되었다. 선생의 曾祖(증조)의 諱(휘)는 應(응)?이며 호는 愚拙齊(우졸제)인데 학행과 천성이 출중하였고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조고의 諱(휘)는 伸鐸(신탁)이고 호는 조락재인데 문장과 올바른 처신으로 세상에 이름이 났고, 考(고)의 諱(휘)는 한봉인데 기자가 준굉하고 향약규범을 강수했으며, ?는 밀양 박씨 효서의 딸이다. 선생은 철종9년(1858년) 무오3월20일에 도장리에서 출생하였는데 재질이 탁월하고 두루 경전을 익혀 詩書(시서)와 百家書(백가서)를 통달하였다. 선생의 詩律賦詞(시율부사)가 세상에 알려져 경향각지의 선지들의 추앙을 받았다. 고종21년인 갑신년 이래로 국운이 風前燈火(풍전등화)처럼 위태로워지자 田園(전원)에 隱居(은거)할 생각을 버리고 후생을 가르치는데 뜻을 품은 선비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1905년 乙巳勒約(을사늑약)이 체결되고 1910년 庚戌(경술) 抗日合邦(한일합방)이 되어 나라가 망하게 되자 痛憤(통분)을 이기지 못하여 전국에 뜻을 같이 한 인사들을 규합하여 1914년 京鄕義士團(경향의사단)을 조직하여 일제 침략에 항거하였다. 선생은 자신의 전재산을 國權回復獻金(국헌회복헌금)으로 내놓은 한편, 애국지사 이락정과 함께 경성부 김태영, 전남영암 유병하, 광주임곡 성기섭, 함평 오덕영 외 3명에게서 금 207圓(원)을 모금하여 광복군 군자금과 의병활동을 돕고 있던중 군자금 제공자의 밀고로 審院(심원)에서 復國運動(복국운동)의 정당성을 불굴의 의지로 지키며 抗言(항언)하고 광주형무소에 이감 복역중 고문의 여독으로 별세하였다. 2003년8월15일 제142750호 독립의사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선생의 위업은 비록 뒤늦게 알려졌지만 세상에 이름을 떨친 업적을 자손만대에 길이 남기고자 이 비를 세우다
항일애국지사 김용상.김영하 선생 기념사업 취지문
우리 민족의 역사를 되돌아볼 때 931번의 외침과 국난을 겪으면서 가장 치욕적인 것은 임진왜란보다 더 처참한 난은 없었을 것이다. 기억하기조차 몸서리처지는 그 참상 가운데에는 무려 10만 여명이 노예로 끌려간 조선 사람의 몸값이 쌀1되이었던 것과 또한 왜병들이 베어간 조선인의 귀가 12만 6천여개요, 코가 2만여개에 이르는 분통의 역사였다. 그리고 을사늑약이라는 일본제국주의 침략으로 36년간의 식민통치를 통해 왜놈들은 우리의 말과 글을 빼았고 심지어 씨를 말리기 위해 창시개명까지 강요하지 않았던가. 이러한 때 하늘이 보내주시어 홀연히 나타난 거성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해석 김용상선생과 송정 김영하선생이시다. 숙질간이신 두분꼐서는 한민족 역사상 가장 혼란했던 망국의 시기에 오직 우국애정으로 일관하시다가 통분을 이기지 못하여 마침내 사랑하는 가족을 버리고 가산을 털어 의사단을 조직하여 일제에 항거하시다가 근자금 제공자의 밀고로 왜군에 체포되어 옥중고혼이 되어 86년 만에 돌아오셨다. 이 밖에도 선생의 수난을 어찌 필설로 다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선생의 위대한 홍적이 알려지자 주민들 사이에 선생의 호국충혼탑을 세워 흠모하자는 여론이 분분하더니 마침내 자손들과 독지가들이 성금을 모아 기금조성에 힘써 왔다. 이에 감동되어 화순군 사회단체장들이 주관하여 화순군에서 후원하여 해석 김용상선생이 태어나시고 자손들이 살았던 이 터에 충혼탑을 세워 나라없는 민족의 슬픔을 겪어보지 못한 우리 후손들에게 조국을 사랑하게 하고 광복을 위해 용전분투하신 선열들의 충혼정신을 함양하는 교육의 장으로 오래도록 우리 역사와 함께 이 터를 지켜줄 것이다. 앞으로 이 비문을 보는 사람이면 누구나 나라사항하는 마음이 스스로 우러날 것이며 이 터를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은 반드시 머리숙여 깊은 마음으로 추모하게 될것이다.
우리 민족의 역사를 되돌아볼 때 931번의 외침과 국난을 겪으면서 가장 치욕적인 것은 임진왜란보다 더 처참한 난은 없었을 것이다. 기억하기조차 몸서리처지는 그 참상 가운데에는 무려 10만 여명이 노예로 끌려간 조선 사람의 몸값이 쌀1되이었던 것과 또한 왜병들이 베어간 조선인의 귀가 12만 6천여개요, 코가 2만여개에 이르는 분통의 역사였다. 그리고 을사늑약이라는 일본제국주의 침략으로 36년간의 식민통치를 통해 왜놈들은 우리의 말과 글을 빼았고 심지어 씨를 말리기 위해 창시개명까지 강요하지 않았던가. 이러한 때 하늘이 보내주시어 홀연히 나타난 거성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해석 김용상선생과 송정 김영하선생이시다. 숙질간이신 두분꼐서는 한민족 역사상 가장 혼란했던 망국의 시기에 오직 우국애정으로 일관하시다가 통분을 이기지 못하여 마침내 사랑하는 가족을 버리고 가산을 털어 의사단을 조직하여 일제에 항거하시다가 근자금 제공자의 밀고로 왜군에 체포되어 옥중고혼이 되어 86년 만에 돌아오셨다. 이 밖에도 선생의 수난을 어찌 필설로 다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선생의 위대한 홍적이 알려지자 주민들 사이에 선생의 호국충혼탑을 세워 흠모하자는 여론이 분분하더니 마침내 자손들과 독지가들이 성금을 모아 기금조성에 힘써 왔다. 이에 감동되어 화순군 사회단체장들이 주관하여 화순군에서 후원하여 해석 김용상선생이 태어나시고 자손들이 살았던 이 터에 충혼탑을 세워 나라없는 민족의 슬픔을 겪어보지 못한 우리 후손들에게 조국을 사랑하게 하고 광복을 위해 용전분투하신 선열들의 충혼정신을 함양하는 교육의 장으로 오래도록 우리 역사와 함께 이 터를 지켜줄 것이다. 앞으로 이 비문을 보는 사람이면 누구나 나라사항하는 마음이 스스로 우러날 것이며 이 터를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은 반드시 머리숙여 깊은 마음으로 추모하게 될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