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마석우리 292-13
- 탐방로그
- 경기 남양주시 화도읍 마석우리 292에 있는 순국선열추념비를 찾아왔다. 탐방한 사진 속에는 동부희망센터가 보이지만 현재는 해당 건물도 사라진 상태이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순국선열 추념비
국권을 왜적에게 빼앗기고 고종의 승하하심을 계기로 기미년 3월 16일 화도면 유지 이달용외 9인이 모의하여 봉기할 시기와 방법을 결정하던 중
왜경에게 발각되어 3월 18일 아침 이재하, 이승보, 이택하 제위가 피검되었다.
이에 군민들이 마석우리 왜경 병참앞에 모여 피검된 인사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독립 만세를 외치니 인근에 메아리치는 고함은 천지가 진동하였다.
조국이 이분들의 귀한 피와 목숨으로 되살아 났음을 되새기고자 뜻있는 이들이 정성을 모아 1965년 11월에 이 추념비를 세웠다.
삼가 선열의 영전에 위로와 감사를 드립니다.
국권을 왜적에게 빼앗기고 고종의 승하하심을 계기로 기미년 3월 16일 화도면 유지 이달용외 9인이 모의하여 봉기할 시기와 방법을 결정하던 중
왜경에게 발각되어 3월 18일 아침 이재하, 이승보, 이택하 제위가 피검되었다.
이에 군민들이 마석우리 왜경 병참앞에 모여 피검된 인사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독립 만세를 외치니 인근에 메아리치는 고함은 천지가 진동하였다.
조국이 이분들의 귀한 피와 목숨으로 되살아 났음을 되새기고자 뜻있는 이들이 정성을 모아 1965년 11월에 이 추념비를 세웠다.
삼가 선열의 영전에 위로와 감사를 드립니다.
殉國先烈追念碑(순국선열추념비)
하늘이 우리에게 아름다운 강토를 주셨으나 우리가 가멸치못하고 힘이없음을 인하여 외적의 입구가 빈번하였으니 반만년 민족의 발좌치는 갈피갈피 핏자국이요 굽이굽이 가시밭이라 돌아보면 우리는 암담한 가운데서 서광을 찾고 쇠진한 가운데서 소생하면서 오늘에 이르는 동안 수많은 순국선열의 거룩한 희생이 깃들였으니 그 고마움을 뼈에 사무치게 느끼는자 몇이나 되느냐? 여기 우리고을에도 나라와 겨레를 위해 목숨을 홍모에 부친 애절한 이야기가 있다. 1910년 국권을 왜적에게 빼앗긴 우리는 스스로의 무력함을 원망하면서 와신상담
기회오기를 기다리던 중 고종의 승하하심을 계기로 울분의 분화구는 기미년 3.1운동으로 터지고 말았다. 불타는 애국충정은 총칼이나 죽음이 두렵지 않았다. 도시에서 도시로, 시골에서 시골로 울려번지는 대한독립만세소리는 휘날리는 태극기와 함께 그칠줄을 몰랐다. 3월16일 우리 양주땅 화도면에서는 유지 이달용, 이승보, 이재하, 이택하, 이덕재, 이인하, 김환동, 이택주, 유인명, 홍순철, 유태익제위가 모의하여 봉길할때와 방법을 결정하고 연락을 하던 중 왜적에게 발각되어 거사는 좌절되고 3월 18일 아침 이재하, 이승보, 이택하제위는 피검되었다. 그러나 그날밤 답내리, 월산리의 주민이 초궐기하여 마석우리 병참앞에 쇄도한 후 피천지가 진동하는 듯 하였다. 그러자 왜헌의 무자비한 총격으로 앞장서 나가가던 이달용, 손복산, 신영희, 유상규, 이교식 다섯분은 즉석에서 순국....균, 강덕여, 유정석, 원대현 다섯분은 중상을 입고 쓰려지셨다. 왜...족하지 아니하고 3월 19일 미명에는 김필규, 이승만, ... 김원석, 권은, 이윤원 제위를 연행하여 각기 수개월의 옥고를 ...현, 강순필의 수십여인은 무수한 곤욕을 당하였다. 왜적...국은 이분들의 귀한 피와 목숨으로 되살아 났건만 우리는 ...
감사를 드리지 못한채 임염 오늘이 되었다. 스스로 참괴하고 죄송함을..이 없다. 이에 뜻있는 이들이 정성을 모아 이 추념비를 세우는 뜻은 삼가 선열영전에 감사드리며 위대하신 그 애국정신을 현양하여 후세의 명감이 되게하려함이다.
해석이 안되는 더 자세한 내용은 답내리 3.1운동기념비에서 확인이 가능합니다.
해석이 안되는 더 자세한 내용은 답내리 3.1운동기념비에서 확인이 가능합니다.
경기 남양주시 화도읍 마석우리 292 읍사무소 앞에 있는 순국선열추념비를 찾아왔다.
하지만 292번지를 네비게이터가 찾지 못하고, 읍사무소는 다른 곳으로 이전했다.
현재는 동부희망케어센터 앞에 위치하고 있다.
하지만 292번지를 네비게이터가 찾지 못하고, 읍사무소는 다른 곳으로 이전했다.
현재는 동부희망케어센터 앞에 위치하고 있다.
1919년 3월 18일 밤 10시에 이달용·김원석·이승면 등의 주도 하에 화도면 월산리와 답내리 주민 200여 명은 만세시위를 시작하였다. 이 과정에서 이달용 등 3명은 일본 헌병에 체포되었으나 화도면 주민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시위를 계속하였다. 1시간 만에 시위군중의 수는 1,000여 명으로 불어났다. 이들은 마침내 마석우리 헌병주재소로 몰려가 검거된 인사들의 석방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시위대의 규모가 급격히 커지고 분위기도 점차 격앙 되어가자 다급한 일본 헌병대는 시위대를 향하여 무차별 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발포에 의해 시위대를 이끌었던 손복산·신영희 등 4명이 사망했고, 이재혁·이윤균 등 7명이 중상을 입었다. 일본 헌병들은 다음날에도 시위에 가담한 인사 5명을 체포하여 고문을 가하는 등 가혹한 탄압을 지속하였다.
시위대의 규모가 급격히 커지고 분위기도 점차 격앙 되어가자 다급한 일본 헌병대는 시위대를 향하여 무차별 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발포에 의해 시위대를 이끌었던 손복산·신영희 등 4명이 사망했고, 이재혁·이윤균 등 7명이 중상을 입었다. 일본 헌병들은 다음날에도 시위에 가담한 인사 5명을 체포하여 고문을 가하는 등 가혹한 탄압을 지속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