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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라남도 함평군 신광면 함정리 546-2
- 탐방로그
- 전남 함평군 신광면 함정리 546-2 일강 김철 선생 기념관과 상해임시정부청사를 찾아가는 길이다. 일강 김철 선생 기념관이 이곳에 있는 이유는 선생의 생가가 이곳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해임시정부청사가 이곳 함평에 있는지 궁금했었는데, 상해임시정부시절 일강 김철 선생이 지금의 경제기획원 혹은 재무부장관에 해당하는 직이었고 임시정부의 건물을 계약할 때 김철 선생의 명의로 계약을 했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곳에 상해임시정부 청사가 있게 된 이유라고 한다. 김철 선생 동상은 기념관 앞에 위치해 있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金澈 紀念館(김철 기념관)
신년의 감상 작년을 돌아보면 감개무량하오. 나도 비재(非才)로 최초부터 제형배동지(諸兄輩同志)로 더불어 독립운동의 획책의 말석에 참여하는 영광을 득(得)하였거니와 과거 우리 동포의 충성되고 용감한 활동은 더 감사할 말이 없소. 다행히 우리 동포의 애국심과 단결력은 더욱 치열하고 임시정부의 기초와 각원(閣員) 화합도 더욱 공고하며 대정(大政)의 방침도 연말까지에 확립하였으니, 금년부터는 전년에 배사(倍蓰)대 활동이 있을 줄 믿소. 그러나 정부만으로 어찌하오. 내외의 각 단체와 국민이 일심일체가 되어 일일(一日)도 바라는 대사업을 성취하기에 육력(戮力)하기를 바라오. - 대한민국 임시정부 교통총장 대리 김철 독립신문(1920.1.10)에서
김철 약력
1886. 10. 15. 전라남도 함평군 신광면 함정리에서 출생
1908. 9. 영광 광흥학교 입학
1912. 3. 경성법률전수학교 졸업
1915. 일본 메이지(明治) 대학 졸업, 귀국
1917. 중국 상하이(上海) 망명
1918. 11. 여운형 등과 신한청년당 조직
1919. 2. 신한청년당 대표로 귀국. 손병희 등과 독립운동 협의
1919. 3. 상하이에서 독립임시사무소 설치
1919. 4. 제1회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의원. 임시정부 수립 참여
1919. 8. 초대 교통차장
1919. 12. 교통총장 직무대리
1920. 1. 김구 등과 의용단 조직
1920. 3. 안창호 등과 선전위원회 조직
1921. 8. 한중호조사 조직 참여. 한국측 평의원
1922. 3. 상하이 대한인교민단 단장
1922. 7. 시사책진회 조직
1923. 국민대표회의 전라도 대표 의정위원. 헌법기초위원 등 역임
1924. 5. 임시정부 국무원 회계검사원장
1925. 신한청년당 이사
1926. 12.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 선임
1030. 1. 한국독립당 조직 참여, 이사
1931. 11. 조소앙 등과 중국항일대동맹 조직. 한국 측 상무위원
1932. 12. 상하이 일본 영사관 경찰에 체포. 프랑스 당국의 항의로 10일만에 석방
1933. 3.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 사임
1933. 7.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 의원자격 심사위원
1934. 1.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 선임. 재무장
1934. 6. 29. 중국 항저우(抗州)에서 서거
1962. 3. 대한민국 건국훈장 국민장 추서
1886. 10. 15. 전라남도 함평군 신광면 함정리에서 출생
1908. 9. 영광 광흥학교 입학
1912. 3. 경성법률전수학교 졸업
1915. 일본 메이지(明治) 대학 졸업, 귀국
1917. 중국 상하이(上海) 망명
1918. 11. 여운형 등과 신한청년당 조직
1919. 2. 신한청년당 대표로 귀국. 손병희 등과 독립운동 협의
1919. 3. 상하이에서 독립임시사무소 설치
1919. 4. 제1회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의원. 임시정부 수립 참여
1919. 8. 초대 교통차장
1919. 12. 교통총장 직무대리
1920. 1. 김구 등과 의용단 조직
1920. 3. 안창호 등과 선전위원회 조직
1921. 8. 한중호조사 조직 참여. 한국측 평의원
1922. 3. 상하이 대한인교민단 단장
1922. 7. 시사책진회 조직
1923. 국민대표회의 전라도 대표 의정위원. 헌법기초위원 등 역임
1924. 5. 임시정부 국무원 회계검사원장
1925. 신한청년당 이사
1926. 12.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 선임
1030. 1. 한국독립당 조직 참여, 이사
1931. 11. 조소앙 등과 중국항일대동맹 조직. 한국 측 상무위원
1932. 12. 상하이 일본 영사관 경찰에 체포. 프랑스 당국의 항의로 10일만에 석방
1933. 3.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 사임
1933. 7.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 의원자격 심사위원
1934. 1.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 선임. 재무장
1934. 6. 29. 중국 항저우(抗州)에서 서거
1962. 3. 대한민국 건국훈장 국민장 추서
상하이시 마당로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 회의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26년 3월 상하이시 마당로 306롱(弄) 4호 건물을 임대하여 청사로 사용하였다. 임시정부는 이 건물 1층은 회의실 겸 집회장을 마련하고, 국무회의와 각종 집회를 개최하였다. 이 곳은 현재 상하이시에 복원되어 있는 1층 회의실을 실제와 같이 재현하였으며, 국무회의에서 윤봉길 의사의 의거 계획을 토의하는 장면을 연출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26년 3월 상하이시 마당로 306롱(弄) 4호 건물을 임대하여 청사로 사용하였다. 임시정부는 이 건물 1층은 회의실 겸 집회장을 마련하고, 국무회의와 각종 집회를 개최하였다. 이 곳은 현재 상하이시에 복원되어 있는 1층 회의실을 실제와 같이 재현하였으며, 국무회의에서 윤봉길 의사의 의거 계획을 토의하는 장면을 연출하였다.
義烈門(의열문)
九峯祠(구봉사)
전남 함평군 신광면 함정리 546-2 일강 김철 선생 기념관과 상해임시정부청사를 찾아가는 길이다.
一江 金澈 先生 像(일강 김철 선생 상)
일강 김철 선생 동상 작품 설명
1. 선생상은 대한민국이란 국호를 정했던 각료의 한 분이셨던 선생이 오른손을 들어 방문하신 분들을 반갑게 맞이하는 모습을 표현하였으며, 다정다감하고 평온함을 느끼도록 자연스럽게 외투를 걸친 모습으로 형상화 하였다.
1. 무궁화 꽃받침은 조국광복을 위하여 일생을 보내신 선생의 숭고한 애국정신과 높으신 뜻을 기리고자 무궁화 꽃으로 상징화 시켰다.
1. 기단석 거북은 대한민국의 번영과 안녕이 영원하기를 기원하는 의미와 만세 평온하시기를 비는 마음으로 거북 두 마리를 조각하였다.
1. 선생상은 대한민국이란 국호를 정했던 각료의 한 분이셨던 선생이 오른손을 들어 방문하신 분들을 반갑게 맞이하는 모습을 표현하였으며, 다정다감하고 평온함을 느끼도록 자연스럽게 외투를 걸친 모습으로 형상화 하였다.
1. 무궁화 꽃받침은 조국광복을 위하여 일생을 보내신 선생의 숭고한 애국정신과 높으신 뜻을 기리고자 무궁화 꽃으로 상징화 시켰다.
1. 기단석 거북은 대한민국의 번영과 안녕이 영원하기를 기원하는 의미와 만세 평온하시기를 비는 마음으로 거북 두 마리를 조각하였다.
一江 金澈 先生 像(일강 김철 선생 상)
호남의 대표적 애국지사인 일강 김철 선생은 기산영수 정기를 받아 1886년 구봉산 기슭에서 태어나셨다. 선생은 망국한을 풀고자 1917년 중국 상해로 건너가 1919년 1월 여운형과 신한청년당을 조직한 후 국내로 잠입 손병희 선생과 3.1운동의 거사를 모의하였다. 같은 해 3월에 김구, 이시영, 이동영 선생 등과 대한독립임시 사무소를 개설한 후,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임시정부의 교통차장, 회계검사원장, 군두장, 재무장, 무임소장을 지냈으며 가산을 모두 처분하고 천도교 기탁금과 경향각지에서 모금활동을 벌여 임정 재정에 크게 기여하였다. 특히 8월 제6차 의정회의에서 헌법 제정 및 대통령제의 상해 임시정부 탄생을 주도하였고, 1932년 윤봉길 의사와 상해 홍구공원 의거를 도모한 후 일제의 추적을 피해 임정을 향주로 옮긴 뒤 국무원 비서장 재임 중 그토록 염원하던 조국 독립을 보지 못하고 1934년 6월 29일 458세에 절강성에서 타계해 임시정부장으로 향주시 악비묘 후록에 안장되었다. 1962년 3.1절에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고 유해봉안운동이 추진되었으나 묘소를 찾지 못해 혼백이 이역만리 중국땅을 떠돌다가 순국 50년에야 한줌 흙으로 숭모비 아래 안장되는 비운을 겪었다. 이에 우리군은 선생의 숭고한 애국 충절을 기리고 후세들의 충의 교육장으로 활용하고자 국비와 도비, 군비를 확보하여 선생의 탄생지인 이곳에 지난 1999년부터 4년여에 걸쳐 성역화사업을 벌여 사당과 기념관, 동상 등을 세우니 호국정신을 이어받는 전당이 되기를 바란다.
2002년 8월 15일 함평군수
호남의 대표적 애국지사인 일강 김철 선생은 기산영수 정기를 받아 1886년 구봉산 기슭에서 태어나셨다. 선생은 망국한을 풀고자 1917년 중국 상해로 건너가 1919년 1월 여운형과 신한청년당을 조직한 후 국내로 잠입 손병희 선생과 3.1운동의 거사를 모의하였다. 같은 해 3월에 김구, 이시영, 이동영 선생 등과 대한독립임시 사무소를 개설한 후,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임시정부의 교통차장, 회계검사원장, 군두장, 재무장, 무임소장을 지냈으며 가산을 모두 처분하고 천도교 기탁금과 경향각지에서 모금활동을 벌여 임정 재정에 크게 기여하였다. 특히 8월 제6차 의정회의에서 헌법 제정 및 대통령제의 상해 임시정부 탄생을 주도하였고, 1932년 윤봉길 의사와 상해 홍구공원 의거를 도모한 후 일제의 추적을 피해 임정을 향주로 옮긴 뒤 국무원 비서장 재임 중 그토록 염원하던 조국 독립을 보지 못하고 1934년 6월 29일 458세에 절강성에서 타계해 임시정부장으로 향주시 악비묘 후록에 안장되었다. 1962년 3.1절에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고 유해봉안운동이 추진되었으나 묘소를 찾지 못해 혼백이 이역만리 중국땅을 떠돌다가 순국 50년에야 한줌 흙으로 숭모비 아래 안장되는 비운을 겪었다. 이에 우리군은 선생의 숭고한 애국 충절을 기리고 후세들의 충의 교육장으로 활용하고자 국비와 도비, 군비를 확보하여 선생의 탄생지인 이곳에 지난 1999년부터 4년여에 걸쳐 성역화사업을 벌여 사당과 기념관, 동상 등을 세우니 호국정신을 이어받는 전당이 되기를 바란다.
2002년 8월 15일 함평군수
선생 동상의 받침이 연꽃인줄 알았는데, 안내문을 잘 읽어보니 무궁화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