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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라남도 장흥군 관산읍 옥당리 산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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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흥군 관산읍 옥당리 산22-4 천관산도립공원입구에 위치한 독립지사 덕암 위석규 유재지 의열비를 찾아왔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장흥군 관산읍 옥당리 산22-4 천관산도립공원입구 독립지사 덕암 위석규 유재지 의열비를 찾아왔다.
독립지사 건국훈장 애족장 서훈 1668호 덕암 위공 석규 유장지
덕암 선생의 어록비
德庵 魏錫珪 語錄(덕암 위석규 어록)
짐승(倭)이 사람의 領土(영토)를 侵奪(침탈)하니 장차 모두 죽겠도다.
슬프다 吾國(오국)이 盜獸(도수)들의 擄掠(노략)으로 國家(국가)가 存亡之秋(존망지추)에 다달아 백성이 盡滅(진멸)케 되었으니 우리들은 팔을 걷어 주먹을 쥐고 踊躍奮鬪(용약분투) 萬死一生(만사일생)의 각오로 이 領土(영토)를 지키자. 사람이 비록 사소한 일이라도 大義(대의)를 따르면 사람이요, 私慾(사욕)을 취하면 禽獸(금수)라. 항차 이런 일임에랴! 古今(고금)을 莫論(막론)하고 국난을 당하여 國家社稷(국가사직)을 붙잡을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義憤慷慨(의분강개)하여 일어서면 모두가 이룰 수 있는 것이다.
1906년 독립전선에 투신하면서
짐승(倭)이 사람의 領土(영토)를 侵奪(침탈)하니 장차 모두 죽겠도다.
슬프다 吾國(오국)이 盜獸(도수)들의 擄掠(노략)으로 國家(국가)가 存亡之秋(존망지추)에 다달아 백성이 盡滅(진멸)케 되었으니 우리들은 팔을 걷어 주먹을 쥐고 踊躍奮鬪(용약분투) 萬死一生(만사일생)의 각오로 이 領土(영토)를 지키자. 사람이 비록 사소한 일이라도 大義(대의)를 따르면 사람이요, 私慾(사욕)을 취하면 禽獸(금수)라. 항차 이런 일임에랴! 古今(고금)을 莫論(막론)하고 국난을 당하여 國家社稷(국가사직)을 붙잡을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義憤慷慨(의분강개)하여 일어서면 모두가 이룰 수 있는 것이다.
1906년 독립전선에 투신하면서
순국선열 덕암 위석규 선생 의열비 건립 및 추모사업 추진위원회 방명록
인간의 진정한 생의 의미는 일신의 영달과 장수를 누리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의로운 삶에 있는 것이다. 우리고장이 낳은 순국선열 덕암 위석규지사께서는 영명한 자질로 일찍이 경사를 탐독하며 처의의 대도를 깨닫고 당시 민족의 암훅기였던 1906년에 조국이 왜적의 침략으로 국토는 유린되고 백성들의 고통과 신음이 절정에 이르렸을때 왜적에 대한 통한과 적개심을 참지 못하여 국외로 망명하여 중국과 러시아등지에서 8개 성상의 긴 세월을 모진 고초와 역경을 무릅쓰고 악전고투하면서 구국운동에 전력을 다하시다가 31세를 일기로 순국하시니 그 거룩한 구국충혼과 장엄한 기절은 백세토록 길이 빛나리라. 이제 그 의열정신을 추모하여 의열비 건립위원회를 구성하고 지사의 행적을 후인들의 귀감으로 삼고자 군민의 뜻과 정성을 모아 이 비를 세우노라.
인간의 진정한 생의 의미는 일신의 영달과 장수를 누리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의로운 삶에 있는 것이다. 우리고장이 낳은 순국선열 덕암 위석규지사께서는 영명한 자질로 일찍이 경사를 탐독하며 처의의 대도를 깨닫고 당시 민족의 암훅기였던 1906년에 조국이 왜적의 침략으로 국토는 유린되고 백성들의 고통과 신음이 절정에 이르렸을때 왜적에 대한 통한과 적개심을 참지 못하여 국외로 망명하여 중국과 러시아등지에서 8개 성상의 긴 세월을 모진 고초와 역경을 무릅쓰고 악전고투하면서 구국운동에 전력을 다하시다가 31세를 일기로 순국하시니 그 거룩한 구국충혼과 장엄한 기절은 백세토록 길이 빛나리라. 이제 그 의열정신을 추모하여 의열비 건립위원회를 구성하고 지사의 행적을 후인들의 귀감으로 삼고자 군민의 뜻과 정성을 모아 이 비를 세우노라.
德菴 魏錫奎 先生 義烈碑(덕암 위석규 선생 의열비)
德菴 魏錫奎 先生 義烈碑(덕암 위석규 선생 의열비)
슬프다 한말의 정국이 혼미하여 임오군란이 일어난뒤 일제의 침략이 날로 거세어 갈무렵에 선생은 1883년 3월 19일 전남 장흥군 천관사하 당동에서 출생하였다. 선생의 휘는 석규요 자는 여장이며 호는 덕암이다. 멀리 신라 회주군의 후예로써 자람에 기우가 청수하고 예능이 숙달하여 학문에 자진근공하고 어른들의 교지를 번거로이 하지 않았다.
스승을 찾아 서사를 몇 차례 옮겼으나 당시 서구의 사조와 학문이 노도와 같이 밀려와도 선생은 전통의 수호로 추호의 오염됨이 없이 나아가다가 19세에 성리대전을 읽고 다음해에 다시 중용을 읽어 우주와 세속의 유전한 원리를 고구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독아가 날로 노골화
스승을 찾아 서사를 몇 차례 옮겼으나 당시 서구의 사조와 학문이 노도와 같이 밀려와도 선생은 전통의 수호로 추호의 오염됨이 없이 나아가다가 19세에 성리대전을 읽고 다음해에 다시 중용을 읽어 우주와 세속의 유전한 원리를 고구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독아가 날로 노골화
하고 조정의 무능으로 인하여 국가안위의 앞날을 내다보고 선생은 초조와 개탄을 가눌 길이 없었다. 고종 1902년 9월 7일 선생이 꿈을 꾸니 왜인이 조야를 점거하자 선생은 동지 23인을 이끌고 죽창으로 도왜를 물리쳤다고 한다. 이는 평소 선생이 민족을 위하고 구국하겠다는 단심이요 유자의 의리라고 여겨진다.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순국한 민영환의 충혼을 조위하였고 다음해에 면암 최익현이 창의하자 전국의 의사들이 호응하였으나 세불리하여 대마도에 연행되어 절사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복국의 웅지를 더욱 굳혔다. 1906년 5월 25일 선생은 독립운동의 전선에 몸을 던지니 24세의 청년이였다. 사랑하는 부모처자를 남겨두고 중국 로서아로 동분서주하면서 독립운동의 선배들과 함께 고난의 길로 나섰다. 황량한 만주의 벌판 눈보라치는 노령에서 고투한 선생의 공로를 어찌 필설로 쉽게 말하겠는가. 그러나 슬프다 하늘이 돌보지 않음인지 노령 니콜라이스크의 한사에서 1913년 4월 27일 묘시에 급환으로 서거하니 이 무슨 하늘의 섭리이며 어찌된 인과인가. 이때가 바로 선생의 춘추가 겨우 31세였다. 생자필멸이요 회자정리는 불가의 철리라고 하지만 독립투사인 선생을 추모하는 우리 후학의 마음엔 애공한 원한이 풀릴날이 없으려니 한다. 여기 선생의 높은 정신을 숭모하고 고혼을 달래는 군민 모두의 뜻이 합하여 이를 한 돌에 새겨 수려한 옛 고장에 세우나니 재천의 영혼이시여 향기로운 땅 이곳에 오시여 고이 잠드소서 고이 잠드소서.
단군 기원 4322년(1989) 己巳(기사) 한식절
문학박사 이숭녕 근찬
영천후인 이돈흥 근서
장흥군민 립
문학박사 이숭녕 근찬
영천후인 이돈흥 근서
장흥군민 립
애국지사 덕암 유석규선생 부인 평해 오여사 효열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