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의숭모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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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전라남도 장성군 삼서면 대곡리 산81-1
탐방로그
충의숭모단을 찾기위해서 장성군 삼서면 대곡리 산81-1 태뫼산(태산,태메산)에 있는 수양사거리를 찾았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숭모단 복원 헌성비
숭모단 복원 헌성비
영생의 지혜
우리 인간은 이 땅의 기나긴 역사속에 짧은 한 시대만을 살다가 빈손으로 떠나 갑니다.
그러나 살았을때 부끄럽지 않게 그 흔적을 남기고 가는것은 자손만대에 귀감이 되는 훌륭한 일입니다. 귀하는 이와가티 내 고앚의 귀중한 문화유산을 발굴하여 복원하고 보존하고자 하는데 자랑스럽게 이름을 남기셨으니 이것은 곧 당신의 새 역사를 창조하는 것이요 역사는 영원 불멸하니 바로 이것이 영생하시는 것입니다.
서기 2003년 2월 일 송곡 나봉기 올림
장성군 삼서면 대곡리 산81-1 태뫼산(태산,태메산)에 있는 충의숭모단을 찾기위해서 찾은 수양사거리.
위성지도를 보면서 산을 오르는 입구를 찾아가고 있다.
이 재실 위쪽에 묘소들이 있다. 지금부터 어디가 산을 올라가는 입구인지를 찾아야 한다.
이곳 저곳으로 등산로를 찾는중에 만난 태메산 등산 안내판. 만태메골입구.
처음 재실에 주차를 한곳에서 오른쪽으로 가서 만난것이다.
이 안내판 좌,우 양쪽에 모두 묘소들이 있다. 오른쪽은 대나무숲으로 올라가는 길이 없었다.
대나무 터널길을 지나자 소나무 터널길도 만나고...
앞의 안내판에 의하면 능성까지 올라가서 오른쪽이 정상이고, 왼쪽이 숭모단으로 되어있었다.
능선에 올라오자 운동기구들이 놓여 있었다.
왼쪽으로 갈 필요도 없이, 바로 숭모단이 보였다.
충의 숭모단
충의 숭모단
▶ 유래
○ 1905년 11월 : 을사조약 강제 체결되자 이곳에 애국유림을 모아 일제를 규탄
○ 1910년 08월 : 한일합방이 되자 지방 애국 유림이 모여 주권회복을 외치며, 울분을 참지 못하고 땅을 치며 광무황제를 향해 방성대곡 한 곳.
○ 1919년 01월 : 고종(광무황제)이 일인에 의한 독살 승하하자 이곳에 망곡단을 축단하고 인산(국장)일까지 902일 산통곡 북향
○ 1926년 04월 : 순종(융희황제)이 승하하자 이곳에 융희황제 숭모단향비를 같은 자리 왼쪽에 세우고 함께 향사하였음.
天地神明(천지신명)
愛國志士追慕壇(애국지사추모단)
비각 내부에는 大韓 光武皇帝崇募壇亨碑(대한 광무황제숭모단향비), 隆熙皇帝崇募壇亨碑(융희황제숭모단향비)가 있었다.
大韓 光武皇帝崇募壇亨碑(대한 광무황제숭모단향비)
隆熙皇帝崇募壇亨碑(융희황제숭모단향비)
忠義崇募壇復元碑(충의 숭모단 복원비)
忠義崇募壇復元碑(충의 숭모단 복원비)
충의공 운석 나상호 선생은 을사명현이신 송재 나세찬 선생의 14대 손으로 1887년 정해 5월 2일 한실마을에서 출생하여 간재 전선생 문하에서 강학하시고 19세때 부터 여생을 조국의 자주독립을 위해 일제에 항거하시다가 돌아가셨다. 1905년 11월 을사보호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통분을 참지 못하고 땅을 치며 통곡하신 곳이며,1908년에는 의병과 일본군이 싸웠던 조국수호의 항전지이다. 지금도 옛 성터의 흔적이 남아 역사적으로도 유서깊은 곳은 틀림이 없다.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방이 되자 자주독립을 외치며 동지들을 규합하여 일제를 규탄하였고 1919년 1월 21일 고종이 승하하자 이곳에 망곡단을 만들어 초하루 보름날에 통곡 북향 4배로 백성된 도리를 잊지 않으셨다. 기미만세운동시에는 이곳에서 봉화를 올리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던 곳이며 고종황제 국장시에는 선생께서 조문단을 이끌고 상경하여 친필로 만사하시고 귀향하신후 삼남일대 애국유림을 방문 조국의 주권회복과 자주독립을 주창하시면서 일제 신사참배반대 운동을 펴는 한편 광무황제숭모단향비 건립기금을 모아 1923년 계해 7월 25일 여덟개의 돌 기둥을 세우고 3간 맞배집 기와지붕에 풍경을 단 비각과 비를 세우셨다. 그때 이 운동에 협력하신 애국 유림은 금성 나희문(羅希文) 나우순(羅虞淳) 나윤중(羅允中) 나상철(羅相喆) 나승규(羅承奎) 나성서(羅聖瑞) 나종희(羅鍾熙) 장흥 고봉진(高鳳鎭) 경주 김열(金烈) 상산 김영기(金英基) 김선기(金善基) 광산 김홍빈(金洪彬) 김해 김귀병(金貴炳) 진주 김기채(金奇採) 김기
택(金起澤) 교하 노덕표(盧德表) 문화 유재영(柳在暎) 수원 백남주(白南柱) 하음 봉락순(奉洛淳) 영월 신극연(辛克連) 청송 심상하(沈相河) 해주 오성환(吳成煥) 함평 이규헌(李奎憲) 이종택(李鐘澤) 이종식(李鐘湜) 경주 이덕우(李德雨) 광주 이석규(李錫奎) 전주 이회문(李會文) 장흥 임형수(林亨洙) 나주 임정규(林廷奎) 진주 정흥묵(鄭興黙) 하동 정인채(鄭仁采) 영성 정병만(鄭炳萬) 철원 주동필(周東弼) 경주 최만서(崔萬瑞) 청주 한백훈(韓百勳) 씨등이 전해지고 있다. 1926년 순종이 승하하자 병인4월25일 융희황제숭모단향비를 세웠드며 매년 읆력 7월 25일에 향사하였다. 1935년 한실독서회사건이 발각되어 나승규 나상옥 이승기 나영섭 나학열 임태식씨등이 투옥되면서 숭모단 철폐와 신사참배를 강요하자 선생꼐서는 숭모단 수호를 위해 이곳에 움막을 짓고 상주하시면서 일경에 항거하시다가 투옥되셨으며 1936년 병자3월 2일 50세를 일기로 조국광복을 보지 못하시고 한 많은 생을 마치셨다. 선생이 타계하시자 일제는 비각을 무너뜨리고 비는 땅에 묻었는데 1945년 해방이 되자 애국청년 나정주씨가 주동이 되어 돌담장을 다시 쌓고 숭모비를 차아 다시 세워놓았으며 유족 나찬주씨와 뜻있는 군내 유림이 모여 향사하여 오다가 1961년 군사혁명으로 중단되었다. 1981년 장성군 유림 김원만 변은연 기주대 나갑주 나관주 나남주 임갑수 정풍기씨가 발기하여 운석 나성호 충의유적비를 군 유림일동으로 새웠으나 나충절의 혼이 서린 숭모단은 돌보는 이 없이 잡초에 묻혀 있었는데 1995년 나봉기 이현태 봉남순씨가 주이를 정화하고 매년 정원 대보름날에 정성껏 향사하니 농업협동조합에서 풍년기원제가 올려지고 새해 아침 면민해맞이 행사가 시작되면서 전 면민의 관심속에 숭모단 복원을 장성군에 건의하여 복원을 보게되였다.

생각해 보면 잊혀져 가는 귀중한 문화유산을 발굴하여 보존함은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의 큰 사명이자 책무라고 생각되며 민족의 수난기에 불굴의 희생정신으로 개국충절에 혼을 담아 세워놓은 숭모단이 전국에서 유일하게 우리 고장에만 세워졌으니 대대로 충절의 고장임을 말해주고 있어 큰 자랑이 아닐수 없다. 이 비는 운석 나선생을 비롯한 애국유림과 순국선열을 추모하고 숭고한 애국정신을 자손만대까지 계승시켜 훌륭한 인재를 육성배출시키고자 힘이니 집집마다 충효예 정신을 숭상하는 살기좋은 고장으로 발전시키는데 구심점이 되었으면 한다. 지금까지 숭모단 복원사업에 특별히 관심을 경주하여 주신 장성군수님과 복원사업에 동참하여 주신 면민 여러분의 거룩하신 뜻을 후세에 전하고자 숭무돈비각복원에 즈음하여 전 면민의 이름으로 삼가 돌을 깍아 세우노라.
서기 2003년 2월 일. 전 삼서면장 송곡 나봉기 짓고, 장성문화원장 병송 이상용 쓰고, 삼서면민 일동이 세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