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전라남도 완도군 약산면 장용리 492-2
- 탐방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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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남균 선생은 전남 완도 출신의 애국지사로, 조국의 독립· 사회과학 연구·식민지 노예 교육 반대 등을 강령으로 하는 항일학생결사, 성진회(醒進會)를 조직하였다. 동지들과 함께 조국의 독립을 위해 불철주야 힘쓰던 정남균 선생은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독립운동 시위 후 성진회 운동과 관련하여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추모비는 이러한 정남균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건립되었다.
더불어, 추모비 바로 옆에는 약산 복지회관이 위치해있어, 찾아가는 데 참고할 수 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애국지사 정남균선생 추모비
이 땅이 낳은 애국지사 정남균선생의 본관은 경주요 아호는 벽파라 이르셨다. 선생께서는 조국의 운명에 어둠이 깔리던 1905년 3월 3일 이곳 구성리에서 고 정재언옹의 장남으로 태어나시어 1922년 3월 완도보통학교를 거처 광주농업학교에 진학하셨고 1927년 동교를 졸업하신다음 사립약산학교에서 교편을 잡으셨으며 815후에는 대한독립촉성회 약산면지부장으로 게시다. 1950년 9월 24일 타계하셨다. 광주농업학교 재학중인 1926년 11월 동문인 박인성 문병수 정동수 그리고 광주고등보통학교 장재성 왕재일 정우수외 10명의 동지들과 더불어 항일독립단체인 성진회를 조직하여 조국광복을 위한 고난의 길을 걸으셨으니 1928년 사립약산학교 재직중에는 배일사상을 담은 유인물 배포로 광주지방법원 장흥지원에서 벌금형을 받으셨고 1929년 11월에는 광주 학생독립운동을 성진회동지들과 더불어 주도하여 활약하시다 익년초 고흥에서 왜경에 피체 잔학스런 고문을 당한끝에 동년 10월 정로난 35명의 동지들과 함께 광주지방법원에 3년형을 받으시고 대구감옥에서 옥고를 치르셨으니 1977년 구가는 선생의 공을 표창하여 추현하였다. 민족수난의 길고도 어두웠던 계절 피와 눈물로 얼룩진 수많은 사연들 그러나 잊어서는 안될 선생의 업적이기에 이를 길이 전하고자 뜻을 같이한 동료 후진들은 삼가 선샹이 영전에 숙연히 합장하여 여기 이 뜻을 새긴다.
약산 복지회관
애국지사 정남균선생 추모비와 전면장 최규운 공적비
애국지사 정남균선생 추모비
완도군 약산면 출신으로 광주농업학교 재학중인 1926년 11월 동문인 박인서, 문승수, 정동수 그리고 광주고등보통학교 장재성, 왕재일, 정우채, 외 수명의 동지들과 더불어 항일독립단체인 성진회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1928년 사립약산학교 재직중에는 배일사상을 담은 유인물 배포로 광주지방법원에서 벌금형을 받았고, 1929년 11월에는 성진회 동지들과 더불어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주도하다가 다음해 고흥에서 왜경에 체포되어 35명의 동지들과 함께 광주지방법원에서 3년형을 언도받고 대구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광복 후에는 대한독립촉진회 약산면 지부장으로 활동하다가 1950년 9월 24일 타계하였다. 정부에서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완도군 약산면 출신으로 광주농업학교 재학중인 1926년 11월 동문인 박인서, 문승수, 정동수 그리고 광주고등보통학교 장재성, 왕재일, 정우채, 외 수명의 동지들과 더불어 항일독립단체인 성진회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1928년 사립약산학교 재직중에는 배일사상을 담은 유인물 배포로 광주지방법원에서 벌금형을 받았고, 1929년 11월에는 성진회 동지들과 더불어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주도하다가 다음해 고흥에서 왜경에 체포되어 35명의 동지들과 함께 광주지방법원에서 3년형을 언도받고 대구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광복 후에는 대한독립촉진회 약산면 지부장으로 활동하다가 1950년 9월 24일 타계하였다. 정부에서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