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삼봉리 100
- 탐방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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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남양주시 조안면 삼봉리 100 남양주종합촬영소 춘사 나운규 선생 상을 찾았다.
선생의 호인 춘사를 따서 만든 춘사관 앞
춘사관은 관광지역이 아니지만 양해를 구한 후 사진만 촬영하기로 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영상지원관 앞
「아뭏든 내가 찾던 길, 내 소지를 시험해 볼 곳이래야 지금의 조선에서는 이곳뿐이기에 찾아온 것이며 내가 항상 동경하던 예술이 하로라도 일찌기 우리 민중에게 표현되어 그들로 하여금 감상케 하고 그네들을 웃기고 그네들과 한가지로 울 수가 있다면 그뿐이 아니겠느냐...
환경이란 서리에 시들었던 내 이상, 내 이상의 싹이 한 잎, 두 잎 피게 될 봄 자연이 점점 가까히 오는 것 같다...」
- 친구. 김용국(金容國)에게 보낸 청사 나운규의 서한에서 - 1924년
환경이란 서리에 시들었던 내 이상, 내 이상의 싹이 한 잎, 두 잎 피게 될 봄 자연이 점점 가까히 오는 것 같다...」
- 친구. 김용국(金容國)에게 보낸 청사 나운규의 서한에서 - 1924년
춘사 나운규 선생을 기리며
춘사 나운규 선생은 1902년(광무 6년) 10월 27일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회령보통학교 재학 시절에 이미 극본을 직접 만들어 연극으로 연출.공연했으며, 북간도의 명동중학교 재학 중에는 독립군에 가담하여 세칭 도판부사건에서 활약하고 그 이듬해 기미년 3.1독립운동을 주동하여 2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1924년 선생은 천부의 예술 재능과 민족정신을 영화예술로 구현하고자 이 땅의 초창기 영화계에 투신하였다. 마침내 1926년에 한국 영화사상 불후의 명작인 「아리랑」의 각본을 만들어 감독.주연하여 발표하매 강토의 온 민중이 망국의 비분을 달래고 그 불굴의 항일민족 사상에 감동 열광하였다. 이로써 영화「아리랑」은 유구한 민족 영화의 초석이 되었고 그 주제가는 세세대대로 이어져 한민족의 심혼의 노래로 애창되었다. 선생은 또한 「오몽녀」등 주옥같은 명작을 다수 창작하여 민족 영화 전통의 남상을 이루고 끝내 1937년 8월 9일에 영화감독 10년의 가시밭길을 떠나 36세를 일기로 요절하니 세인이 「일대의 영화왕 지다」하여 애통해 마지 않았다.
아아 춘사 나운규 선생은 겨레와 더불어 울고 웃었으며, 한국 영화의 영원한 귀감이오 세계에 자랑할만한 분이로다.
1995년 4월 20일
조각 : 김영중 / 글씨 : 박종희 / 글 : 이영일 / 세움 : 문화체육부 영화진흥공사
춘사 나운규 선생은 1902년(광무 6년) 10월 27일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회령보통학교 재학 시절에 이미 극본을 직접 만들어 연극으로 연출.공연했으며, 북간도의 명동중학교 재학 중에는 독립군에 가담하여 세칭 도판부사건에서 활약하고 그 이듬해 기미년 3.1독립운동을 주동하여 2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1924년 선생은 천부의 예술 재능과 민족정신을 영화예술로 구현하고자 이 땅의 초창기 영화계에 투신하였다. 마침내 1926년에 한국 영화사상 불후의 명작인 「아리랑」의 각본을 만들어 감독.주연하여 발표하매 강토의 온 민중이 망국의 비분을 달래고 그 불굴의 항일민족 사상에 감동 열광하였다. 이로써 영화「아리랑」은 유구한 민족 영화의 초석이 되었고 그 주제가는 세세대대로 이어져 한민족의 심혼의 노래로 애창되었다. 선생은 또한 「오몽녀」등 주옥같은 명작을 다수 창작하여 민족 영화 전통의 남상을 이루고 끝내 1937년 8월 9일에 영화감독 10년의 가시밭길을 떠나 36세를 일기로 요절하니 세인이 「일대의 영화왕 지다」하여 애통해 마지 않았다.
아아 춘사 나운규 선생은 겨레와 더불어 울고 웃었으며, 한국 영화의 영원한 귀감이오 세계에 자랑할만한 분이로다.
1995년 4월 20일
조각 : 김영중 / 글씨 : 박종희 / 글 : 이영일 / 세움 : 문화체육부 영화진흥공사
남양주시 조안면 삼봉리 100 남양주종합촬영소 춘사 나운규 선생 상을 찾았다.
선생의 호인 춘사를 따서 만든 춘사관 앞
선생의 호인 춘사를 따서 만든 춘사관 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