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대화 일가 구 충효비, 추모비,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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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전라남도 순천시 승주읍 평중리 산50
탐방로그
애국지사 권병안(권대화)의 사적을 찾기 위해 순천시 승주읍 평중리 산50에 왔다. 권대화 일가 구 충효비, 권대화 추모비, 권대화 동상이 나란히 세워져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순천시 승주읍 평중리 산50 애국지사 권병안(권대화) 추모비을 찾았다.
愛國志士 權炳顔先生 一家 九忠孝碑 애국지사 권병안선생 일가 구 충효비
愛國志士 權炳顔先生 一家 九忠孝碑 애국지사 권병안선생 일가 구충효비
진의 능평원이 생사를 오가며 애국한 충신과 어버이께 지성한 효자가 역사를 영롱케 하지 않았더라면 오늘도 아침해가 동녘에서 저렇듯 찬란히 떠오르겠느냐고 했던 바와 같이 충효의 소중함이 막언이건만 작금의 계셍서 그 말이 날로 빛을 잃으니 통탄불이(痛嘆不已)이다. 이러한 세태에서도 일가의 충효가 누대를 이어온다면 이를 어찌 발천하지 아니하여 옳을 것인가. 우리 안동권씨가 삼한 갑을의 현벌로 불리는데 이러한 문호가 또한 호남해우에서 일어나 승주부국을 빛내니 어찌 아름답지 아니한가. 1, 공은 우리 시조 고려태사 휘 행의 36세손으로 그 11대조 성균지사 남포 휘 분이 선고 이조판서 휘 대재의 당조여환을 피해 낙남하여 순천에 시거하니 이로부터 일향의 사부○식이 출세하였거니와 공의 자는 태화요 호는 남강으로 1871년 2월 18일생인데 구 한말 바다건너 왜구가 호시탐탐 이 나라 침탈을 기도하더니 급기야는 우리의 국모를 시해하는 을미사변 등 천인공노할 만행을 서슴치 않으먀 경향 각지에서 수 많은 의병들이 격발분기하면서까지 공 역시 이곳 순천을 거점으로 활약한 의병진에 자진출진 많은 전과를 올렸슴은 물론 특히 전 가산을 담보하면서까지 군자금 조달에 진력하셨다. 이 사실을 감지한 왜 관헌들의 끈질긴 추적핍박에 노심초사하신 부공 금준 휘 치택은 1908년 8월 10일 천수를 다하지 못하고 타계하시고 결국 공 역시 이듬해에 왜의 토벌대에 피체 압송중 그간의 행적으로 미루어 보아 극형에 처해질것이 분명한바 이에 필사 탈출을 도모하였으나 애석하게도 현장에서 순국하시니 그떄가 1909년 음 5월 2일이요 향년 39세였다. 공의 의병활동에 대한 공적기록은 뒤 이은 국치이후 일제에 의하여 오래토록 인몰되었으나 학계와 후손들이 끈질긴 추적끝에 기적적으로 발굴 고증되어 늦게나마 그의 높고 거룩한 큰 뜻이 높이 평가되어 2003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고 국가독립유공자 공훈록에 수록되었다. 1, 공의 배위 유인 밀양손씨의 휘는 맹화로 고종7년 1870년생인바 자유로 총명 온후 정숙하여 경노효친의 수범을
보였고 안동권문에 우귀하여서는 지극정성으로 시부모를 봉양하고 군자를 공경하였으며 종부로서 봉제접빈의 규범에 철하였음은 물론 부군의 의병활약에도 은밀한 내조를 해오던중 불행히도 부군이 순국하는 붕성지통을 당하자 천신하○ 코자 하였으나 주위의 만류로 번연개심하여 파산된 가정에서 호국지책으로 소천을 대신하는 궁경치가로 유충한 5남매 양육에도 배전의 정성을 이우리면서 청검수절로 인고의 58세 생평을 마치니 그 일화가 인구에 회자되고 경사에 청문되어 순천향교와 성균관에서 열부로 포상하였다. 3, 공의 서자 재회는 자는 재봉 호는 농은 우호 송설로 고결 35년 1898년 윤 3월 3일생인데 겨우 12세때에 선고께서는 의병활동 군자금에 전가산을 다 바친 상태에서 순국하셨으니 유족의 생계가 막막 호구지책으로 두 숙부는 무작정 출가하고 나머지 가솔은 품팔이로 근근연명함제 그때의 고초를 어찌 다 필설로 형언하리요 설상가상으로 군자금과 관련된 빚 독촉까지 겹쳐 서당까지도 중단하였으나 이 같은 극한고난중에서도 결코 좌절치 않고 편모에 대한 효성은 물론 일생을 오직 정직과 근면 성실로 각고정려결과 급기야는 자수성가로 면지 대농이 되니 세인들은 공을 독농 선각자라 칭하였을 뿐만 아니라 위로는 위선사업과 아래로는 후진양성을 위하여 지극정성을 다 바친 숭조하애한 독농효자로 타의 귀감이 되었기 성균관에서 표창하였다. 자부 유인 장수황씨 수엽은 1899년 8월 28일이며 인화의 녀로 세인이 다 싫어하는 빈한유고에게 우귀하여 20대 종부로서 인궁한 살림에도 시모 봉양에 정성을 다하여 육찬이 없으면 계곡의 어해라도 잡아다 진공하였고 가훈을 준수하며 1남 4녀를 훌륭하게 양육하였을 뿐만아니라 극심한 식량난때에는 남 모르게 인근 임산부들에게 쌀과 미역을 제공하고 아한 궁핍인에게도 시혜면궁케 하였으며 부군의 기질중병에는 문의구약하여 조석시탕 20여년 만에 ○이 완치케하는 등 효부 양처 현모로서 안동권씨 중앙종친회, 순천향교 성균관등에서 선행 효부로 포장하였다. 5, 공의 서손 후 표는 호는 남계요 1933년 8월 13일생으로 독자로 태어나 귀히 성장 어려웠던 시기였음에도 부모의 은덕으로 대학까지 무난히 졸업 바로 관직에 이르니 서우특별시와 전라도청을 거쳐 여천 보성 순천 목포시 등에서 여러 과장을 거처 다시 도청에서 새마을계장 예산계장 사회과장과 여수시 총무국장 광주시산업국장 보건사회국장 보성 여수 순천 려수시의 부군수 부시장 시장직대 그리고 도지사 정책보좌관을 끝으로 3급 부이사관으로 단 한점의 오점도 없이 38년간의 공직을 마치면서 그간 수십회의 수상을 비롯 30여회의 각종 상패와 대통령표창 근정포장 홍조근정 훈장등을 받은 모법공직자로서 체귀후에는 문중 대소사는 물론 각단체에도 적극 참여 헌신봉사하였다. 특히 1997년 에야 고려대학교 노동대학원에 입학 영국 옥스포드대학게 까지 수학한 면학도였으며 3년여에 걸쳐 고향의 향토지인 승수읍지를 집필 출간하하는 큰 업적을 남겼고 성균관 전학에까지 이르는 등 일생동안 국가와 지역사회 그리고 문사에 헌신 봉공하였다. 6, 공의 서손부 경주김씨 순례는 한영의 녀로 1933년 3월 13일생인데 17세에 우귀하여 40여년이나 공직에 있 는 부군을 대신하여 종택을 지키며 궁경치가로 시부모 봉양과 2남3녀를 양육하며 봉제사 수선영을
보였고 안동권문에 우귀하여서는 지극정성으로 시부모를 봉양하고 군자를 공경하였으며 종부로서 봉제접빈의 규범에 철하였음은 물론 부군의 의병활약에도 은밀한 내조를 해오던중 불행히도 부군이 순국하는 붕성지통을 당하자 천신하○ 코자 하였으나 주위의 만류로 번연개심하여 파산된 가정에서 호국지책으로 소천을 대신하는 궁경치가로 유충한 5남매 양육에도 배전의 정성을 이우리면서 청검수절로 인고의 58세 생평을 마치니 그 일화가 인구에 회자되고 경사에 청문되어 순천향교와 성균관에서 열부로 포상하였다. 3, 공의 서자 재회는 자는 재봉 호는 농은 우호 송설로 고결 35년 1898년 윤 3월 3일생인데 겨우 12세때에 선고께서는 의병활동 군자금에 전가산을 다 바친 상태에서 순국하셨으니 유족의 생계가 막막 호구지책으로 두 숙부는 무작정 출가하고 나머지 가솔은 품팔이로 근근연명함제 그때의 고초를 어찌 다 필설로 형언하리요 설상가상으로 군자금과 관련된 빚 독촉까지 겹쳐 서당까지도 중단하였으나 이 같은 극한고난중에서도 결코 좌절치 않고 편모에 대한 효성은 물론 일생을 오직 정직과 근면 성실로 각고정려결과 급기야는 자수성가로 면지 대농이 되니 세인들은 공을 독농 선각자라 칭하였을 뿐만 아니라 위로는 위선사업과 아래로는 후진양성을 위하여 지극정성을 다 바친 숭조하애한 독농효자로 타의 귀감이 되었기 성균관에서 표창하였다. 자부 유인 장수황씨 수엽은 1899년 8월 28일이며 인화의 녀로 세인이 다 싫어하는 빈한유고에게 우귀하여 20대 종부로서 인궁한 살림에도 시모 봉양에 정성을 다하여 육찬이 없으면 계곡의 어해라도 잡아다 진공하였고 가훈을 준수하며 1남 4녀를 훌륭하게 양육하였을 뿐만아니라 극심한 식량난때에는 남 모르게 인근 임산부들에게 쌀과 미역을 제공하고 아한 궁핍인에게도 시혜면궁케 하였으며 부군의 기질중병에는 문의구약하여 조석시탕 20여년 만에 ○이 완치케하는 등 효부 양처 현모로서 안동권씨 중앙종친회, 순천향교 성균관등에서 선행 효부로 포장하였다. 5, 공의 서손 후 표는 호는 남계요 1933년 8월 13일생으로 독자로 태어나 귀히 성장 어려웠던 시기였음에도 부모의 은덕으로 대학까지 무난히 졸업 바로 관직에 이르니 서우특별시와 전라도청을 거쳐 여천 보성 순천 목포시 등에서 여러 과장을 거처 다시 도청에서 새마을계장 예산계장 사회과장과 여수시 총무국장 광주시산업국장 보건사회국장 보성 여수 순천 려수시의 부군수 부시장 시장직대 그리고 도지사 정책보좌관을 끝으로 3급 부이사관으로 단 한점의 오점도 없이 38년간의 공직을 마치면서 그간 수십회의 수상을 비롯 30여회의 각종 상패와 대통령표창 근정포장 홍조근정 훈장등을 받은 모법공직자로서 체귀후에는 문중 대소사는 물론 각단체에도 적극 참여 헌신봉사하였다. 특히 1997년 에야 고려대학교 노동대학원에 입학 영국 옥스포드대학게 까지 수학한 면학도였으며 3년여에 걸쳐 고향의 향토지인 승수읍지를 집필 출간하하는 큰 업적을 남겼고 성균관 전학에까지 이르는 등 일생동안 국가와 지역사회 그리고 문사에 헌신 봉공하였다. 6, 공의 서손부 경주김씨 순례는 한영의 녀로 1933년 3월 13일생인데 17세에 우귀하여 40여년이나 공직에 있 는 부군을 대신하여 종택을 지키며 궁경치가로 시부모 봉양과 2남3녀를 양육하며 봉제사 수선영을
준도제로 하면서 화목한 일가를 이루었고 특히 20여년간의 시부 간병과 10여년간의 90대 노모의 노환간병에 정성을 다 하면서도 객지의 부군이 관등승급토록 내조를 다한바 지효의 미담으로 전파되어 순천시 6개 단체를 비롯하여 성균관에서까지 선생 효부로 표창하였다. 7, 8, 공의 종승손 태환은 1953년 8월 8일생이며 그의 배 동복오씨 재윤은 준택의 녀로 1958년 7월 9일생으로 시부모의 관작으로 인한 타관 전전중 노환의 노모를 지극정성으로 봉양하였음은 물론 부친의 퇴관이후 일가 4대가 동거하는 희대의 대종택에서 존전을 공경하고 환우중인 노조모를 솔선 간병 봉양하므로서 계세적 환경이 작금 타의 귀감이 되기에 충분하여 향천에 의거 각각 보건사회부장관의 효자효부상에 증손부 재윤은 대한노인회장의 효부상까지 추가로 받았다. 9. 공의 차증손 두환은 1962년 2월 28일생으로 호주 유학후 현지에서 취업 경제학 박사 교수 황간 견금령 1963년 7월2일생과 혼인하여 만리 격거하면서도 간 3일의 문안통화로 항시 곁에 있는듯 시공을 초월하여 지효하였고 특히 그의 배 견금령 주도로 집안의 향사 생일 명절이면 그에 상응한 정성어린 선물도 보내와 온 가족을 기쁘게 함은 물론 부모형제를 호주까지 초청 봉양하는 등 남다른 효성에 감동 순천시에서 표창하였다. 회고컨대 우리 권문에 전래로 충효열이 접종하였는데 이번에 공의 문중에서 그 순국 97주기를 맞아 정민을 다듬고자 철문을 청하며 제상적을 상적을 보냈으므로 또한 안보를 더하여 이와 같이 약서하고 과자와 후일 병필군자의 안목에 자한다.

2002년 5월 10일
국가독립유공순국선열 남강 권병안선생 추모비
순국선열 권병안 선생 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