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전라남도 담양군 금성면 대곡리 544
- 탐방로그
-
송진우 추모비는 이곳에 총 두 개가 존재한다. 원본 비석은 송진우 기념관 내부에 있고, 번역 비석은 송진우 기념관 옆에 있다.
본 비 외에, 담양군 담양읍 만성리 60 관어공원에도 송진우 추모비가 있다. 또한, 전남 담양군 담양읍 반룡리 43-2 담양공고 앞 쌈지공원에는 송진우 추모시비가 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고하 선생 송 군의 비
우인 동래 정인보 찬
세란(世亂)이 오래일수록 선비는 자수(自樹)하지 못할까 근심하여 절조로 자랑을 삼으나 능히 경륜으로써 대사를 이루는 이는 적은데 이 절조와 경륜을 겸비한 이로 내 친구에 고하 송 군이었다. 군의 휘는 진우로 담양에서 출생하니 갑오난 때 5세라. 그 뒤 동향 선배로 항일의 의병을 일으킨 이 많아 풍렬(風烈)이 산천을 덮었으므로 군의 지향(志向)도 이라 하여 일찍 싹텄다. 부 壎(훈)은 문유(文儒)의 사로 군도 이에 물들었더니 이때 창평 고씨댁에서 김성수 군과 영어를 수학할 새 양인(両人)은 심교(深交)를 맺어 일본에서 동학(同學)하고 돌아와서는 이 나라 독립 달성의 기본 방책은 교육 언론 산업의 개척 진작에 있음을 확신하고 중앙학교의 경영과 동아일보 급 경성방직의 설립 계획 등 기타 대소사를 다함께 하였다. 그중에서도 동아지(東亞紙)는 가장 힘 들인 것으로서 여기를 발판 삼아 민족정기와 독립사상을 고취 배양하였다. 이에 해내외(海內外)의 민심이 귀일하니 엄연(儼然)한 민족 대표 관이 오 형태 없는 정부를 이루었다. 군은 옥에 갇히기 세 번 그때마다 김군이 대신 교장 사장이 되어 출옥을 기다렸다. 군의 전공은 법과이나 경세 방략에 더욱 유심(留心)하고 담사감개(談史感慨)를 즐겼다. 기미독립선언 때 군은 중앙학교에 있은 지 3년이라 전년에 구주(殴洲)대전이 끝나고 민족자결론이 일어나매 원근(遠近)에서 은밀히 하는 연락이 모두 중앙학교로 집중되었거니와 학교의 숙직실은 군이 거처하던 곳이라. 김 군과 현상윤 군이 항상 여기에 모여 이르기를 이미 자결이라 하였는즉 이 기회에 행동하면 우선은 헛되이 죽더라도 후
우인 동래 정인보 찬
세란(世亂)이 오래일수록 선비는 자수(自樹)하지 못할까 근심하여 절조로 자랑을 삼으나 능히 경륜으로써 대사를 이루는 이는 적은데 이 절조와 경륜을 겸비한 이로 내 친구에 고하 송 군이었다. 군의 휘는 진우로 담양에서 출생하니 갑오난 때 5세라. 그 뒤 동향 선배로 항일의 의병을 일으킨 이 많아 풍렬(風烈)이 산천을 덮었으므로 군의 지향(志向)도 이라 하여 일찍 싹텄다. 부 壎(훈)은 문유(文儒)의 사로 군도 이에 물들었더니 이때 창평 고씨댁에서 김성수 군과 영어를 수학할 새 양인(両人)은 심교(深交)를 맺어 일본에서 동학(同學)하고 돌아와서는 이 나라 독립 달성의 기본 방책은 교육 언론 산업의 개척 진작에 있음을 확신하고 중앙학교의 경영과 동아일보 급 경성방직의 설립 계획 등 기타 대소사를 다함께 하였다. 그중에서도 동아지(東亞紙)는 가장 힘 들인 것으로서 여기를 발판 삼아 민족정기와 독립사상을 고취 배양하였다. 이에 해내외(海內外)의 민심이 귀일하니 엄연(儼然)한 민족 대표 관이 오 형태 없는 정부를 이루었다. 군은 옥에 갇히기 세 번 그때마다 김군이 대신 교장 사장이 되어 출옥을 기다렸다. 군의 전공은 법과이나 경세 방략에 더욱 유심(留心)하고 담사감개(談史感慨)를 즐겼다. 기미독립선언 때 군은 중앙학교에 있은 지 3년이라 전년에 구주(殴洲)대전이 끝나고 민족자결론이 일어나매 원근(遠近)에서 은밀히 하는 연락이 모두 중앙학교로 집중되었거니와 학교의 숙직실은 군이 거처하던 곳이라. 김 군과 현상윤 군이 항상 여기에 모여 이르기를 이미 자결이라 하였는즉 이 기회에 행동하면 우선은 헛되이 죽더라도 후
세를 위한 단계가 될 것이라 하였다. 이때 국내는 공포 속에 있어 거사는 국외로부터 함이 편하다는 중론이라. 그러나 군은 국내 거사를 역설하여 마침내 모두 군의 의견에 동조하게 되었으며 비밀운동이라 민중을 끌어 드릴 길이 없으므로 군은 현군을 개(介)하여 전전(展轉) 마침내 천도교와 통하게 되었으며 이리하여 군의 힘으로 모두 분발되고 학교 및 각지에 동지들이 밀포(密布)되었다. 이에 앞서 동경 유학생들이 거사를 꾀할 새 역시 그 준비와 국내외 연락 지시 등도 군이 주담(主擔)하였다. 2월에 김도태 동지에게 밀탁(密託)하여 정주 이승훈 공을 초청 찬성을 얻고 이 공은 서울 이북의 저명한 목사 장로를 규합하였고 이에 앞서 통한 바 있는 천도교와 합동 거사키로 하였으며 한용운 공을 통하여 불교 또한 이에 호응하였다. 이때 남북 각지의 출비(出費)는 대개 김 군이 맡고 각 교파의 연락은 대개 현군이 맡고 그 밖에 민족 대표의 구성 상해 동경 북미 등 해외 각지와의 연락 호응과 학생의 부서에 이르기까지 모두 군이 총책임을 맡았다. 실로 중앙학교 숙직실은 3.1운동의 산실이오. 군은 이 운동의 조직자요 주동인물이었다. 3월 1일 선언서가 발표되고 서명자가 체포될 새 군은 후사를 보살피기로 되었으되 5일 만에 잡혀 재옥(在獄) 무릇 3년이었다. 출옥 미구(未久)에 동아일보 사장이 되니 군은 천성이 개상(開爽)이나 안으로 행정에도 능(能)하여 신문이 처음은 재정이 궁하였으나 군이 오래 담당하면서 넉넉하게 되었다. 군은 접인에 고루 공경과 환대를 다하였으나 한 번 가부를 결(決)할 일에는 소신을 굽힘이 없어 이로써 남과 거슬리는 일도 많았다. 그러나 기미 이후로 대의를 잡아 언론으로써 민족을 빛낸 이로는 군이 실로 제1인자였다. 동아일보와 일본 법리(法吏)와는 서로 빙탄(氷炭)이라 기자들이 자주 구금되더니 한번은 이 일로 경무국과 다투다가 밤늦게 돌아온즉 아들이 급환이라 손볼 겨를도 없이 참척(慘慽)을 당하였다. 나와 군과는 군이 범태평양 회의로 하와이로 떠날 때 송별한 이후 병인년 순종 대상에 군이 비밀 계획을 세워 내게로 알려오니 모사(謀事)는 이뤄지지 않았으되 이로부터 친교 점밀(漸密)하여졌다. 이해 미(美) 네이숀지 주필 기고로써 한인의 분기를 격려하매 군이 이를 게재케 한지라 신문은 정간되고 군은 형을 받아 익년에야 풀렸다.
얼마 후 외전(外電)이 전하기를 만주 만보산의 전주들이 한인 전호(佃戶)를 오살(鏖殺)하였다 하니 이를 받아 크게 보도한 신문도 있는지라 민중이 다투어 화상(華商)을 습격할새 군이 탄식하여 가로되 이 이간을 하는 자 누구인고 이는 구적(仇敵)의 계략에 우리가 상잔함이라 하고 급히 실정을 밝혀 신문에 싣고 한편 화인(華人)들을 위유하더니 뒤에 진상이 알려지매 과연 일군의 위계였다. 이충무 공의 후손이 빈한하여 묘소의 관 호마저 어려운 형편이라 군이 널리 기부(寄附)를 얻어 문권(文券)을 되찾고 제전(祭田)을 장만하고 현충사를 세우니 무릇 선열에 보공하여 민심을 진작함이었다. 지사 협렬(俠烈)의 유족 부양과 원체(遠逮)구계(久繫)된 이의 면회와 의량(衣糧) 제공은 반드시 곡진(曲盡)히 하였다. 일인 총독이 전후 5~6인으로 군은 이들과 다투는 가운데 알게 되더니 모두 군의 역량을 중히 여겨 회뢰(賄賂)로써 꺾으려 하되 백방에 흔들리지 않았다. 주후(酒後)에는 말이 많고 때로 자예(自譽)도 서슴치 않았으나 아는 이는 이를 과하다 말하지 않았다. 중일전쟁이 열리고 불꽃이 영미로 번진 뒤로 일본의 음위(淫威) 날로 심하여 신문은 폐간되고 군도 구금되였었다. 제2차대전 중 5년여 군은 종용자득 오염을 피하여 끝내 침구를 쓰고 누워 사람을 대하지 아니하였다. 일본 항복(降伏) 수일 전에 총독 이하 황구(慌懼)하여 몰래 군을 청하여 치안을
얼마 후 외전(外電)이 전하기를 만주 만보산의 전주들이 한인 전호(佃戶)를 오살(鏖殺)하였다 하니 이를 받아 크게 보도한 신문도 있는지라 민중이 다투어 화상(華商)을 습격할새 군이 탄식하여 가로되 이 이간을 하는 자 누구인고 이는 구적(仇敵)의 계략에 우리가 상잔함이라 하고 급히 실정을 밝혀 신문에 싣고 한편 화인(華人)들을 위유하더니 뒤에 진상이 알려지매 과연 일군의 위계였다. 이충무 공의 후손이 빈한하여 묘소의 관 호마저 어려운 형편이라 군이 널리 기부(寄附)를 얻어 문권(文券)을 되찾고 제전(祭田)을 장만하고 현충사를 세우니 무릇 선열에 보공하여 민심을 진작함이었다. 지사 협렬(俠烈)의 유족 부양과 원체(遠逮)구계(久繫)된 이의 면회와 의량(衣糧) 제공은 반드시 곡진(曲盡)히 하였다. 일인 총독이 전후 5~6인으로 군은 이들과 다투는 가운데 알게 되더니 모두 군의 역량을 중히 여겨 회뢰(賄賂)로써 꺾으려 하되 백방에 흔들리지 않았다. 주후(酒後)에는 말이 많고 때로 자예(自譽)도 서슴치 않았으나 아는 이는 이를 과하다 말하지 않았다. 중일전쟁이 열리고 불꽃이 영미로 번진 뒤로 일본의 음위(淫威) 날로 심하여 신문은 폐간되고 군도 구금되였었다. 제2차대전 중 5년여 군은 종용자득 오염을 피하여 끝내 침구를 쓰고 누워 사람을 대하지 아니하였다. 일본 항복(降伏) 수일 전에 총독 이하 황구(慌懼)하여 몰래 군을 청하여 치안을
세를 위한 단계가 될 것이라 하였다. 이때 국내는 공포 속에 있어 거사는 국외로부터 함이 편하다는 중론이라. 그러나 군은 국내 거사를 역설하여 마침내 모두 군의 의견에 동조하게 되었으며 비밀운동이라 민중을 끌어 드릴 길이 없으므로 군은 현군을 개(介)하여 전전(展轉) 마침내 천도교와 통하게 되었으며 이리하여 군의 힘으로 모두 분발되고 학교 및 각지에 동지들이 밀포(密布)되었다. 이에 앞서 동경 유학생들이 거사를 꾀할 새 역시 그 준비와 국내외 연락 지시 등도 군이 주담(主擔)하였다. 2월에 김도태 동지에게 밀탁(密託)하여 정주 이승훈 공을 초청 찬성을 얻고 이 공은 서울 이북의 저명한 목사 장로를 규합하였고 이에 앞서 통한 바 있는 천도교와 합동 거사키로 하였으며 한용운 공을 통하여 불교 또한 이에 호응하였다. 이때 남북 각지의 출비(出費)는 대개 김 군이 맡고 각 교파의 연락은 대개 현군이 맡고 그 밖에 민족 대표의 구성 상해 동경 북미 등 해외 각지와의 연락 호응과 학생의 부서에 이르기까지 모두 군이 총책임을 맡았다. 실로 중앙학교 숙직실은 3.1운동의 산실이오. 군은 이 운동의 조직자요 주동인물이었다. 3월 1일 선언서가 발표되고 서명자가 체포될 새 군은 후사를 보살피기로 되었으되 5일 만에 잡혀 재옥(在獄) 무릇 3년이었다. 출옥 미구(未久)에 동아일보 사장이 되니 군은 천성이 개상(開爽)이나 안으로 행정에도 능(能)하여 신문이 처음은 재정이 궁하였으나 군이 오래 담당하면서 넉넉하게 되었다. 군은 접인에 고루 공경과 환대를 다하였으나 한 번 가부를 결(決)할 일에는 소신을 굽힘이 없어 이로써 남과 거슬리는 일도 많았다. 그러나 기미 이후로 대의를 잡아 언론으로써 민족을 빛낸 이로는 군이 실로 제1인자였다. 동아일보와 일본 법리(法吏)와는 서로 빙탄(氷炭)이라 기자들이 자주 구금되더니 한번은 이 일로 경무국과 다투다가 밤늦게 돌아온즉 아들이 급환이라 손볼 겨를도 없이 참척(慘慽)을 당하였다. 나와 군과는 군이 범태평양 회의로 하와이로 떠날 때 송별한 이후 병인년 순종 대상에 군이 비밀 계획을 세워 내게로 알려오니 모사(謀事)는 이뤄지지 않았으되 이로부터 친교 점밀(漸密)하여졌다. 이해 미(美) 네이숀지 주필 기고로써 한인의 분기를 격려하매 군이 이를 게재케 한지라 신문은 정간되고 군은 형을 받아 익년에야 풀렸다.
얼마 후 외전(外電)이 전하기를 만주 만보산의 전주들이 한인 전호(佃戶)를 오살(鏖殺)하였다 하니 이를 받아 크게 보도한 신문도 있는지라 민중이 다투어 화상(華商)을 습격할새 군이 탄식하여 가로되 이 이간을 하는 자 누구인고 이는 구적(仇敵)의 계략에 우리가 상잔함이라 하고 급히 실정을 밝혀 신문에 싣고 한편 화인(華人)들을 위유하더니 뒤에 진상이 알려지매 과연 일군의 위계였다. 이충무 공의 후손이 빈한하여 묘소의 관 호마저 어려운 형편이라 군이 널리 기부(寄附)를 얻어 문권(文券)을 되찾고 제전(祭田)을 장만하고 현충사를 세우니 무릇 선열에 보공하여 민심을 진작함이었다. 지사 협렬(俠烈)의 유족 부양과 원체(遠逮)구계(久繫)된 이의 면회와 의량(衣糧) 제공은 반드시 곡진(曲盡)히 하였다. 일인 총독이 전후 5~6인으로 군은 이들과 다투는 가운데 알게 되더니 모두 군의 역량을 중히 여겨 회뢰(賄賂)로써 꺾으려 하되 백방에 흔들리지 않았다. 주후(酒後)에는 말이 많고 때로 자예(自譽)도 서슴치 않았으나 아는 이는 이를 과하다 말하지 않았다. 중일전쟁이 열리고 불꽃이 영미로 번진 뒤로 일본의 음위(淫威) 날로 심하여 신문은 폐간되고 군도 구금되였었다. 제2차대전 중 5년여 군은 종용자득 오염을 피하여 끝내 침구를 쓰고 누워 사람을 대하지 아니하였다. 일본 항복(降伏) 수일 전에 총독 이하 황구(慌懼)하여 몰래 군을 청하여 치안을
얼마 후 외전(外電)이 전하기를 만주 만보산의 전주들이 한인 전호(佃戶)를 오살(鏖殺)하였다 하니 이를 받아 크게 보도한 신문도 있는지라 민중이 다투어 화상(華商)을 습격할새 군이 탄식하여 가로되 이 이간을 하는 자 누구인고 이는 구적(仇敵)의 계략에 우리가 상잔함이라 하고 급히 실정을 밝혀 신문에 싣고 한편 화인(華人)들을 위유하더니 뒤에 진상이 알려지매 과연 일군의 위계였다. 이충무 공의 후손이 빈한하여 묘소의 관 호마저 어려운 형편이라 군이 널리 기부(寄附)를 얻어 문권(文券)을 되찾고 제전(祭田)을 장만하고 현충사를 세우니 무릇 선열에 보공하여 민심을 진작함이었다. 지사 협렬(俠烈)의 유족 부양과 원체(遠逮)구계(久繫)된 이의 면회와 의량(衣糧) 제공은 반드시 곡진(曲盡)히 하였다. 일인 총독이 전후 5~6인으로 군은 이들과 다투는 가운데 알게 되더니 모두 군의 역량을 중히 여겨 회뢰(賄賂)로써 꺾으려 하되 백방에 흔들리지 않았다. 주후(酒後)에는 말이 많고 때로 자예(自譽)도 서슴치 않았으나 아는 이는 이를 과하다 말하지 않았다. 중일전쟁이 열리고 불꽃이 영미로 번진 뒤로 일본의 음위(淫威) 날로 심하여 신문은 폐간되고 군도 구금되였었다. 제2차대전 중 5년여 군은 종용자득 오염을 피하여 끝내 침구를 쓰고 누워 사람을 대하지 아니하였다. 일본 항복(降伏) 수일 전에 총독 이하 황구(慌懼)하여 몰래 군을 청하여 치안을
맡기니 군은 이를 거절하고 지인에게 이르기를 우리 일은 우리가 할 것이다. 어찌 적의 위임으로 다스릴 자 있을 것인가 하였다. 항복이 전해지매 세사는 급격히 부풀었으나 군은 누워있기는 전과 같더니 그 달이 지나서야 비로소 일어나 국민대회의 소집(召集)을 계획하고 이어 민주당의 당수로 추대되어 중경임시정부를 지지하면서 기치 더욱 분명해지니 기투(忌妬)하는 자 이를 갈고 환기(環起)하였다. 12월 28일에 한년(限年) 신탁통치론이 보도되매 익일에 군은 백범 김 공을 찾아 거국(擧國) 거부(拒否)를 책모(策謀)하더니 30일 미명에 군의 침소에 틈입(闖入)한 자 있어 군은 권총 수환에 기절하니 연근(年僅) 56이었다. 부인은 고흥 류씨 형(兄) 자(子) 영수로 후사를 삼았다. 군의 키는 보통이며 얼굴이 풍백(豐白)하고 수미(鬚眉)가 적고 눈은 길게 드리워 끝이 치껴졌으며 가느다란 것 같으나 위엄이 있었다. 군은 약관에 난을 겪고 중간에는 세사 갈수록 그 그릇되었으나 조국 광복의 강한 신념으로 일관시종(一貫始終) 낙관하였고 군이 신문에서 세계의 대세와 조선의 장래(將來)를 논한 바 20년이 지나도록 부합하지 않음이 없으니 그 식견이 이와 같았다. 군은 인재라 바야흐로 국척(跼蹐)의 곤경(因境)에서도 오히려 지킬 바를 지켜 경륜(經綸)을 폈으며 마침내 일인(日人)들이 물러가고 무르익는 운증용변(雲蒸龍變)의 호기(好機)를 당하여 한번 굼틀 대사를 이루려다가 거연(遽然)히 꺾이니 어허 시(詩)에 방국진췌((邦國殄瘁)라 하였으되 그때는 나라의 곤궁(困窮)함이 반드시 금일과 같지는 않았을 것이다. 슬프다. 몰후(歿後) 7일에 김군이 동인들과 함께 양주 망우리에 안장하였다.
銘 朝之言 立吾柢 夕之言 歫非類 笑敖踰 酣號爰在 歷之累紀 載之萬變 握臂憤憤 山海爲顫 芴非結乎至哀 易以貢夫
명(銘) - 아침의 말로 내 근본을 세우고, 저녁의 말로 비류(非類)를 막았도다. 웃고 떠들어도 한계를 넘지 않고, 취해 소리쳐도 그대로 있었도다. 지나기 여러 십 년, 만 가지 변화를 겪었도다. 팔을 걷고 분해 일어나면, 산과 바다도 떨었도다. 깊은 마음속에 맺힌 것이 아니었다면 어찌 처음부터 끝까지 이처럼 곧을 수 있었으랴. 우리의 길이 비색한 것을 슬퍼하나, 차마 그대를 글 속의 인물로 만들고 말 수야 있으랴.
단군기원 4279년 10월 일 세움
서기 1966년 11월 일 고하 기념사업회에서 이 곳으로 환장(還葬)하고 원문을 보역 송완빈 서(書)로 이 비를 고쳐세우다
銘 朝之言 立吾柢 夕之言 歫非類 笑敖踰 酣號爰在 歷之累紀 載之萬變 握臂憤憤 山海爲顫 芴非結乎至哀 易以貢夫
명(銘) - 아침의 말로 내 근본을 세우고, 저녁의 말로 비류(非類)를 막았도다. 웃고 떠들어도 한계를 넘지 않고, 취해 소리쳐도 그대로 있었도다. 지나기 여러 십 년, 만 가지 변화를 겪었도다. 팔을 걷고 분해 일어나면, 산과 바다도 떨었도다. 깊은 마음속에 맺힌 것이 아니었다면 어찌 처음부터 끝까지 이처럼 곧을 수 있었으랴. 우리의 길이 비색한 것을 슬퍼하나, 차마 그대를 글 속의 인물로 만들고 말 수야 있으랴.
단군기원 4279년 10월 일 세움
서기 1966년 11월 일 고하 기념사업회에서 이 곳으로 환장(還葬)하고 원문을 보역 송완빈 서(書)로 이 비를 고쳐세우다
古下 宋鎭禹 先生 記念館(고하 송진우 선생 기념관)
송진우 추모비는 송진우 기념관 내에 있다.
송진우 추모비는 정인보가 짓고 쓴 것이다.
古下宋鎭禹先生之碑(고하 송진우 선생 지비)
古下宋鎭禹先生之碑(고하 송진우 선생 지비)
이곳에 서있는 석물들은 1945.12.30 고하 송진우 선생이 갑자기 흉탄에 서거하자 망우리 공동묘지에 건립되었던 것으로서 1966.11. 서울 양천구 신정동으로 천묘 시 같이 옮겼으나 1988.5. 유해를 다시 동작동 국립묘지에 모시게 됨에 따라 뒤에 남게 된 것을 그 후손의 가족묘역인 이곳에 이설한 것입니다.
위당 정인보의 글과 글씨로 된 한문비석과 문석인 및 망주석 각 한쌍은 1946.10. 인촌 김성수 등 동지들이 세운 것이고 한글 비석은 한문 비문을 일석 이희승이 번역하여 1967.10. 천묘의식에 따라 고쳐세웠던 것으로서 20세기 전반의 파란많은 이나라 역사의 기록이 될 것입니다.
1989.5. 손 송상현 아룀.
위당 정인보의 글과 글씨로 된 한문비석과 문석인 및 망주석 각 한쌍은 1946.10. 인촌 김성수 등 동지들이 세운 것이고 한글 비석은 한문 비문을 일석 이희승이 번역하여 1967.10. 천묘의식에 따라 고쳐세웠던 것으로서 20세기 전반의 파란많은 이나라 역사의 기록이 될 것입니다.
1989.5. 손 송상현 아룀.
이곳에 서있는 문관석과 장군석 및 고하기념관 내에 안치한 고하 추모비석은 위당 정인보 선생이 글짓고 쓰시어 1946년 1월 서울 망우리 고하묘소에 건립된 것이나 1966년 서울 양천구 신정동으로 천묘 시 모두 이설하였다. 위당 선생의 고하 비석은 후세에 남을 명작이나 한문을 이해하는 이가 적어 일석 이희승 교수가 해석한 한글본 비석을 신정동 묘소에 다시 건립하였다. 1988년 유해를 다시 서울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으로 옮겨 모실 때에 이 석물들을 자손의 묘지인 경기도 성남시 분당메모리얼파크에 보관하였다가 2016년 5월 14일 고하의 향리에 옮겨 설치하였다.
2016년 5월 14일
고하 송진우 선생 기념사업회
2016년 5월 14일
고하 송진우 선생 기념사업회
고하 선생 송 군의 비
우인 동래 정인보 찬
세란(世亂)이 오래일수록 선비는 자수(自樹)하지 못할까 근심하여 절조로 자랑을 삼으나 능히 경륜으로써 대사를 이루는 이는 적은데 이 절조와 경륜을 겸비한 이로 내 친구에 고하 송 군이었다. 군의 휘는 진우로 담양에서 출생하니 갑오난 때 5세라. 그 뒤 동향 선배로 항일의 의병을 일으킨 이 많아 풍렬(風烈)이 산천을 덮었으므로 군의 지향(志向)도 이라 하여 일찍 싹텄다. 부 壎(훈)은 문유(文儒)의 사로 군도 이에 물들었더니 이때 창평 고씨댁에서 김성수 군과 영어를 수학할 새 양인(両人)은 심교(深交)를 맺어 일본에서 동학(同學)하고 돌아와서는 이 나라 독립 달성의 기본 방책은 교육 언론 산업의 개척 진작에 있음을 확신하고 중앙학교의 경영과 동아일보 급 경성방직의 설립 계획 등 기타 대소사를 다함께 하였다. 그중에서도 동아지(東亞紙)는 가장 힘 들인 것으로서 여기를 발판 삼아 민족정기와 독립사상을 고취 배양하였다. 이에 해내외(海內外)의 민심이 귀일하니 엄연(儼然)한 민족 대표 관이 오 형태 없는 정부를 이루었다. 군은 옥에 갇히기 세 번 그때마다 김군이 대신 교장 사장이 되어 출옥을 기다렸다. 군의 전공은 법과이나 경세 방략에 더욱 유심(留心)하고 담사감개(談史感慨)를 즐겼다. 기미독립선언 때 군은 중앙학교에 있은 지 3년이라 전년에 구주(殴洲)대전이 끝나고 민족자결론이 일어나매 원근(遠近)에서 은밀히 하는 연락이 모두 중앙학교로 집중되었거니와 학교의 숙직실은 군이 거처하던 곳이라. 김 군과 현상윤 군이 항상 여기에 모여 이르기를 이미 자결이라 하였는즉 이 기회에 행동하면 우선은 헛되이 죽더라도 후
우인 동래 정인보 찬
세란(世亂)이 오래일수록 선비는 자수(自樹)하지 못할까 근심하여 절조로 자랑을 삼으나 능히 경륜으로써 대사를 이루는 이는 적은데 이 절조와 경륜을 겸비한 이로 내 친구에 고하 송 군이었다. 군의 휘는 진우로 담양에서 출생하니 갑오난 때 5세라. 그 뒤 동향 선배로 항일의 의병을 일으킨 이 많아 풍렬(風烈)이 산천을 덮었으므로 군의 지향(志向)도 이라 하여 일찍 싹텄다. 부 壎(훈)은 문유(文儒)의 사로 군도 이에 물들었더니 이때 창평 고씨댁에서 김성수 군과 영어를 수학할 새 양인(両人)은 심교(深交)를 맺어 일본에서 동학(同學)하고 돌아와서는 이 나라 독립 달성의 기본 방책은 교육 언론 산업의 개척 진작에 있음을 확신하고 중앙학교의 경영과 동아일보 급 경성방직의 설립 계획 등 기타 대소사를 다함께 하였다. 그중에서도 동아지(東亞紙)는 가장 힘 들인 것으로서 여기를 발판 삼아 민족정기와 독립사상을 고취 배양하였다. 이에 해내외(海內外)의 민심이 귀일하니 엄연(儼然)한 민족 대표 관이 오 형태 없는 정부를 이루었다. 군은 옥에 갇히기 세 번 그때마다 김군이 대신 교장 사장이 되어 출옥을 기다렸다. 군의 전공은 법과이나 경세 방략에 더욱 유심(留心)하고 담사감개(談史感慨)를 즐겼다. 기미독립선언 때 군은 중앙학교에 있은 지 3년이라 전년에 구주(殴洲)대전이 끝나고 민족자결론이 일어나매 원근(遠近)에서 은밀히 하는 연락이 모두 중앙학교로 집중되었거니와 학교의 숙직실은 군이 거처하던 곳이라. 김 군과 현상윤 군이 항상 여기에 모여 이르기를 이미 자결이라 하였는즉 이 기회에 행동하면 우선은 헛되이 죽더라도 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