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복현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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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전라남도 나주시 청동 산24-8
탐방로그
나주시 청동 221 나주북초등학교 뒷산에 위치한 김복현 선생 묘소를 찾았다. 현충원 안장자 조회를 통해보면 김복현 선생 묘소는 대전현충원 애국지사 4묘역-274로 2010년 7월 7일에 이장한 것으로 나온다. 아마 이곳에도 있고 현충원에도 있는 형태인 것 같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산으로 들어가는 길은 학교 뒷편에 있다.
이곳은 독립운동가 하산 김철 선생 묘소입니다.
주위를 청결히 합시다.
하산(何山) 김철(金哲) 선생
(본명 김복현(金福鉉), 1890년 10월 7일~1969년)

의로운 나주인 김철선생의 삶
나주출신으로 광주에서 3.1운동 주도

김철 선생의 본명은 복현, 호는 하산이다. 1890년 10월 7일 나주 단발령의거를 주도했던 김창곤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으나, 단발령의거가 실패하자 김창곤이 처형당한 후 어려운 유년기를 보냈다. 1919년 교회활동을 통해 항일운동을 모색하던 그는 광주, 전남지역의 3.1운동 책임자로 추대되어 광주3.1운동을 주도했으며, 목포와 나주 등을 방문해 전남 각지로 시위를 확산시켰다.
3.1운동으로 체포되어 재판에 섰을 때 "이 운동의 주도자는 나다, 내 지시에 따라 행동한 학생들은 그냥 돌려보내라. 내 이름은 김철(金鐵)이다. 쇠는 불을 달구고 두들길수록 더욱 단단해진다. 얼마든지 해 볼 테면 해봐라"라고 주장했는데, 이때부터 철(鐵)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으며 나중에 철(哲)로 바뀌었다. 해방을 맞이한 그는 전남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추대되었고 건준이 해체된 후 인민위원회에서도 부위원장직을 맡았으며, 1946년 신민당의 전남지부 위원장으로 활동하는 한편 조선인민당에서도 활동했다.
그러다가 미군정이 들어서면서 다시 옥고를 치르고 분파투쟁의 과정에서 소외되면서 이선으로 물러나 친일세력의 재등장과 남북 분단, 정치 부패, 동족상잔의 전쟁을 목격하면서도 그저 한숨으로 밤낮을 보냈다. 1960년 4.19혁명 이후 사회대중당 전남도당을 결성했고 이후 사회대중당에서 분리된 사회당 고문을 맡아 민주주의의 완성과 조국통일을 위한 마지막 투쟁을 전개한다. 그러니 이 역시 5.16쿠데타로 짓밟혀 버렸고 민주주의와 통일의 비원을 가슴에 묻은 채 1969년 가족의 품에서 세상을 떠났다.
김철 선생은 항일민족운동의 침체기였던 시기에 나주출신으로 광주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해 전남지역의 3.1운동을 촉발시킴으로써 나주인의 의로운 기상과 민족정신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2007.12
나주시장
독립지사 김철 묘
여기 우리 역사상 가장 침체한 시기에 꿋꿋이 민족을 지키다가 외로이 가신 독립지사 하산 김철 복현 선생이 잠들고 계시다. 선생은 한말 풍운이 일기 시작한 고종 27년 1890년 10월 7일 전라도 나주읍 금성산하 한 농가에서 부 김해 김공 창곤 씨와 모 함평이씨의 5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정직 성실하여 한문 공부에도 열심하였다. 6, 7세에 을미의병운동이 일어나자 선생의 엄친과 장형이 의병장과 투사로 참여하여 일제와 싸우다가 나주 감영에서 함께 순절하니 8세에 고아가 되었다. 여기에 충격을 받은 선생은 평생 항일독립운동에 몸 바치기로 작정하였다. 망국의 쓰라림을 딛고 10년 을미년 3월 1일 민족항쟁의 대운동이 터지자 선생은 전남 방면 거사의 청책을 맡고 최흥종 국기열 강석봉 한길상 김강 최한영 남궁혁 등 동지들을 규합 도내 각처에서 수천수만의 대중을 동원 조직하고 독립만세를 진두에서 지휘하였다. 왜경에 체포되여 모진 고문과 옥고를 치르면서도 성어 김철의 무쇠처럼 굽힐 줄을 몰랐다. 원래 성품이 강직 견고하고 용감 극렬하신 선생은 초지일관 항일독립의 정도를 추진하였다. 부조의 감화로 장자 재호는 상해에 망명하여 임시정부의 요원으로 활용하였다. 을유년 해방 후에는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하는 등 여생을 조국광복과 통일의 성업에 바치려고 하였지만 남북분단의 불운과 중구 혼란의 시세에 맞지 아니하여 광산군 비학향촌에 묻혀 청빈한 생활을 하시다가 을유년(1969년) 6월 21일 80세로 서거하였다. 유사 이래 우리 민족은 외체의 침략을 많이 받았지만 빛나는 문화민족의 전통과 긍지를 살려 자랑스러운 국토수호에 죽기로서 나선 까닭에 그때마다 고난을 극복해왔다. 근대 제국주의 일본의 침략만 그렇지 못하여 마침내 수십 년 망국의 큰 치욕을 당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이 비상시기에 선생이 걸으신 굳건한 투사로서의 일생은 어떠한 현창보다 값지고 뜻있는 것이며 가장 훌륭한 지도자로 길이 추앙될 것이다.
여기 우리 역사상 가장 침체한 시기에 꿋꿋이 민족을 지키다가 외로이 가신 독립지사 하산 김철 복현 선생이 잠들고 계시다. 선생은 한말 풍운이 일기 시작한 고종 27년 1890년 10월 7일 전라도 나주읍 금성산하 한 농가에서 부 김해 김공 창곤 씨와 모 함평이씨의 5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정직 성실하여 한문 공부에도 열심하였다. 6, 7세에 을미의병운동이 일어나자 선생의 엄친과 장형이 의병장과 투사로 참여하여 일제와 싸우다가 나주 감영에서 함께 순절하니 8세에 고아가 되었다. 여기에 충격을 받은 선생은 평생 항일독립운동에 몸 바치기로 작정하였다. 망국의 쓰라림을 딛고 10년 을미년 3월 1일 민족항쟁의 대운동이 터지자 선생은 전남 방면 거사의 청책을 맡고 최흥종 국기열 강석봉 한길상 김강 최한영 남궁혁 등 동지들을 규합 도내 각처에서 수천수만의 대중을 동원 조직하고 독립만세를 진두에서 지휘하였다. 왜경에 체포되여 모진 고문과 옥고를 치르면서도 성어 김철의 무쇠처럼 굽힐 줄을 몰랐다. 원래 성품이 강직 견고하고 용감 극렬하신 선생은 초지일관 항일독립의 정도를 추진하였다. 부조의 감화로 장자 재호는 상해에 망명하여 임시정부의 요원으로 활용하였다. 을유년 해방 후에는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하는 등 여생을 조국광복과 통일의 성업에 바치려고 하였지만 남북분단의 불운과 중구 혼란의 시세에 맞지 아니하여 광산군 비학향촌에 묻혀 청빈한 생활을 하시다가 을유년(1969년) 6월 21일 80세로 서거하였다. 유사 이래 우리 민족은 외체의 침략을 많이 받았지만 빛나는 문화민족의 전통과 긍지를 살려 자랑스러운 국토수호에 죽기로서 나선 까닭에 그때마다 고난을 극복해왔다. 근대 제국주의 일본의 침략만 그렇지 못하여 마침내 수십 년 망국의 큰 치욕을 당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이 비상시기에 선생이 걸으신 굳건한 투사로서의 일생은 어떠한 현창보다 값지고 뜻있는 것이며 가장 훌륭한 지도자로 길이 추앙될 것이다.
나주북초등학교에서 묘소로 연결되는 문이 있다.
독립운동가
하산 김철 선생 묘소
200m →
나주북초등학교 앞, 김철 묘 안내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