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기보 추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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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전라남도 나주시 세지면 내정리 16-5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항일순국열사 순창 조공기보 추모비
위대하도다. 아름답고 값진 죽음이여 나라의 운명이 흥망의 기로에 처했을 때 분연히 일어서서 목숨을 던진 분이 하나둘뿐이 아니지마는 만일 우리 고장에 그렇게 순국한 분이 있다고 하면 어찌 영원토록 칭송하며 기억하지 않을 수 있으리오. 공(公)의 본디 이름은 양식(陽植)이요. 자(字)는 기보(奇甫)이니 서기 1854년 10월 7일 나주 세지면 내정리에서 순창 조공(淳昌 趙公) 달용(達涌)과 광산 김씨(光山 金氏) 내옥(乃玉) 여사의 삼대독자로 출생하였다. 타고난 기상이 늠름하고 의협심이 강하여 평소에도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품이더니 한말에 이르러 일본 침략자들이 을사 정미 양 조약을 강요하여 국권을 빼앗고 군대마저 해산시켜 버리자 나라를
찾겠다는 일념으로 1908년 2월 부인 양씨(梁氏)와 아들 봉내(奉乃)를 가정에 남겨둔 채 의병장 심남일(沈南一) 막하로 합류하여 3월 7일의 강진 오치동 싸움을 시작으로 4월 15일에는 장흥 곽암 6월 19일의 함평 장담원 6월 25일에는 능주 노구두와 7월 30일의 영암 사촌싸움을 거쳐 같은 해 8월 1일 나주반○에서 왜병 40명과 격돌하여 그 중 과반수를 죽이고 장렬하게 전사하니 향년 54세였다. 그때 막하의 유능한 부장을 잃은 심 장군은 비통함을 이기지 못해 일기에 기록하기를 우리 장수 조기보도 전사하였다. 아! 그는 죽을 자리를 얻어 순절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런 사실들은 독립운동사에 뚜렷하게 기록되어 있고 1991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 받았거니와 돌이켜보매 오늘의 우리가 있음이 어찌 이런 열사들의 희생의 은덕이 아니리오. 가슴 미어지는 감격과 슬픔을 가눌 길이 없도다. 공께서 순절한 지 백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고향의 후진들은 추모하는 마음이야 간절하였지만 어지럽고 어려운 세태로 말미암아 고귀한 희생을 기리는 표석 하나 세우지 못하고 있다가 오늘에 와서야 비로소 뜻과 힘을 모은 다음 나주시장의 찬동과 후원을 얻어 여기에 이 빗돌을 세우게 되니 이것이 어찌 열사의 죽음에 대한 만분의 일에라도 해당하는 보답에 되리요마는 만감이 교차하는 감회를 누를 길이 없도다.
2008년 8월 일 리명한 글을 짓고 리규형 글씨를 쓰다.
항일순국열사 순창 조공기보 추모비
순창 조공기보 추모비

이 비는 1908년 8월 1일 심남일 의병장의진에 참여하여 활동하던 중 이곳 나주군에서 일본 병사와 접전을 벌이다 순국하신 조기보 애국지사님의 공적을 기리기 위한 추모비입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습니다.

이곳을 찾아주신 분들께서는 일제 강점기 때 나라를 되찾기 위하여 목숨을 바치신 순국선열의 나라 사랑 정신을 되새기고 보존과 청결에 협조하여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