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식 집(영랑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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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전라남도 강진군 강진읍 남성리 211-1
탐방로그
금서당 탐방 후 입구 방향에 있었던 영랑 김윤식 선생의 생가를 돌아보기로
GPS 상의 주소는 강진군 강진읍 남성리 211-1이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영랑생가(永郞生家) / 국가지정문화재(중요민속자료 제252호) / 강진군 강진읍 남성리 211-1
이곳은 우리나라의 대표 서정시인이자 항일 민족지사였던 영랑 김윤식 선생(1903~1950)의 생가이다. 선생은 이곳에서 1903년 1월 16일 부친 김종호와 모친 김경무 사이에 2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15년 3월 강진보통학교를 졸업한 선생은 이듬해 상경하여 기독청년회관에서 영어를 수확한 후 휘문의숙에 진학하였다. 휘문의숙 재학시절이던 1919년 3월 1일 기미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선생은 자신의 구두 안창에 독립선언문을 숨겨 넣고 강진에 내려와 독립운동(강진 4.4운동)을 주도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대구형무소 등에서 6개월간의 옥고를 치렀다. 1920년 일본으로 건너가 청산학원(靑山學院)에서 수학한 선생은 용아 박용철 선생 등과 친교를 맺었다. 1923년 관동 대지진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구한 후에는 시 창작활동에 몰두하였다. 영랑은 1930년 3월 창간한 「시문학」지를 중심으로 박용철, 정지용, 이하윤, 정인보, 변영로, 김현구, 신석정, 허보 등 당대 최고의 작가들과 더불어 우리 현대상의 새 장을 열었다. 1934년 4월 「문학」지 제3호에 불후의 「모란이 피기까지는」을 발표하였으며, 1935년 「영랑시집」을, 1949년에는 「영랑시선」을 출간하였다. 선생은 조국 해방이 이루어질 때까지 창씨개명과 신사참배 및 삭발령을 거부한 채 흠결 없는 '대조선인'으로 외롭고 의롭게 살았다. 광복 후 신생 조국 정부에 참여하였던 선생은 1950년 한국전쟁 때 부상당하여 9월 29일 서울 자택에서 47세를 일기로 타계하였다. 선생은 생에 87편의 시를 남겼다. 영랑생가는 1948년 선생이 서울로 이사한 후 몇 차례 전매되었으나, 1985년 12월 강진군이 매입하였고, 1986년 2월 전라남도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2007년 10월 국가지정문화재로 승격되었다. 정부는 2008년 선생에게 금관묵학훈장을 추서하였다.
영랑생가 종합안내 - ① 안채 ② 문간채 ③ 사랑채 ④ 관리소 ⑤ 시비 ⑥ 은행나무 ⑦ 장독대 ⑧ 샘 ⑨ 화장실
모란이 피기까지는 /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 모란이 뚝뚝 떨어져버린 날 /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 모란이 피기까지는 /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 찬란한 슬픔의 봄을.
- 모란이 피기까지는 전문
금서당 탐방 후 입구 방향에 있었던 영랑 김윤식 선생의 생가를 돌아보기로
GPS 상의 주소는 강진군 강진읍 남성리 211-1이었다.
영랑 생가(永郞 生家)
영랑 생가(永郞 生家)
이곳은 「시문학」 동인으로 참여하여 〈모란이 피기까지는〉.〈가늘한 내음〉 등 남도의 정서를 전통적 운율로 읊어 낸 주옥 같은 서정시를 남김으로써 한국 시문학의 수준을 한 차원 높인 영랑 김윤식(永郞 金允植 1903~1950) 시인이 태어나 성장하고 그의 예술혼이 감돌았던 유서 깊은 곳이다. 문학의 해를 맞아 선생의 높은 업적으로 기리고자 한국문인협회가 현대문학 표징사업의 일환으로 이 글을 새긴다.
1996년 6월 14일 사단법인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황명 / SBS문화재단 이사장 윤세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