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 역사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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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인천광역시 중구 내동 83-5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노역현장에서의 회고
노역현장에서의 회고
백범 김구 선생은 1914년 인천 감옥에 이감되면서 인천항 축항 공사현장에 투입되었다. 조선인들의 피와 땀으로 지어진 축항 공사는 7년에 걸친 1918년에 마무리되었다.
'인천은 내 일생에 있어 뜻깊은 곳이다. 21살에 인천 감옥에서 사형선고를 받아 23살에 탈옥 도주했고, 39살에 17년 징역수로 다시 이 감옥으로 이감되었었다'
- 백범일지 -
▲ 인천 축항 공사 현장 모습 / 출처 : 인천축항도록
청년 김창수에서 민족지도자 김구로 단련되다.
청년 김창수에서 민족지도자 김구로 단련되다.
명성황후 시해에 따른 원수를 갚고자 1896년 황해도 안악 해안 지역인 치하포에 있는 주막에서 당시 20세 청년이었던 김창수가 일본인 스치다 조스케를 처단하였다.
청년 김창수는 두 차례에 걸쳐 인천에서 겪은 수감생활로 인해, 민중과 고통을 함께하는 불굴의 민족 지도자로 단련되었고 역사적인 사건의 순간에 함께했던 민중들이 있었으며, 그의 용기의 원천은 민중이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가행정수반 초대 경무국장 김구
1919년 3·1운동 직후 탄생한 임시정부는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우리 민족 최초로 민주공화제를 채택하였으며 독립운동의 중추기구 역할을 수행하였다.
상하이에 도착한 김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임시정부의 '문지기'라도 되기를 원하였으나 경무국장에 임명되어 교민 보호와 임시정부를 지키는 업무를 맡았다. 이후 김구는 내무총장 등 국무위원으로, 또 국무령과 주석을 역임하면서 27년 동안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이끌었다.
'청년 백범 김구 역사거리'를 알려주는 큰 아치 간판이 서 있다.
청년 백범 김구 역사거리
김구와 교감하다
청년 김구, 감옥으로부터의 탈출
첫번째 수감
인천의 조력자들
노역의 현장
노역현장에서의 회고
그리운 어머니

김구와 교감하다
청년 김구, 감옥으로부터의 탈출
첫번째 수감, 인천의 조력자들
노역의 현장
노역현장에서의 회고
그리운 어머니

무슨 뜻일까 궁금했었는데, 모두 탐방을 마친 후에 그 의미를 알게 되었다.
광장 동상에서 시작한 '청년 백범 김구 역사거리'에 '신포로' 좌우에 설치된 각각의 조형물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바닥에는 '백범일지'의 구절들이 새겨져 있었다.
인천은, 내 일생에 뜻깊은 곳이었다. 스물 두 살에 인천 감옥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스무 세 살에 탈옥 도주하였고 마흔한 살에 17년 징역수로 다시 이 감옥에 수감되었다. 저 인천 축항은 내 피와 땀이 배어있는 것이다.
- 백범일지 -
나는 내가 못났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못났다 하더라도 나는 한 명의 국민이자 민족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쉬지 않고 해 온 것이다.
- 백범일지 -
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하느님이 내게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면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오." 할 것이요. 또 그 다음에 소원이 무엇이냐 하는 세 번째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 백범일지 -
첫번째 조형물 '김구와 교감하다'. 광장에서 보이던 건물 옆면에 설치되어 있었다.
김구와 교감하다.
우리의 작은 목소리를 모아 김구에게 전달하다.

네 소원(所願)이 무었이냐 하고 하느님이 내게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독립(大韓獨立)이오.”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이 무었이냐 하면,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오.” 할 것이요.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었이냐 하는 세 번째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自主獨立)이오”하고 대답할 것이다.
- 백범일지 -

김구는 독립이라는 소원에 일생을 바쳐 살았습니다. 당신이 간직하고 있는 소원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소원을 김구에게 말해보세요.
앞 바닥에 새겨진 내용과 조금 다르다.

1. 김구와 교감하다
2. 청년 김구, 감옥으로 부터의 탈출
3. 첫번째 수감, 인천의 조역자들
4. 노역의 현장
5. 노역현장에서의 회고
6. 그리운 어머니

1. 백범 김구, 일대기를 돌아본다.
2. 청년 김구와 인천의 만남
3. 김구와 교감하다
4. 첫번째 수감, 인천의 조력자들
5. 청년 김구, 감옥으로부터의 탈출
6. 노역의 현장
7. 노역 현장에서의 회고
8. 그리운 어머니
첫번째 수감, 인천의 조력자들
첫번째 수감, 인천의 조력자들

脫籠眞好鳥 조롱을 박차고 나가야 진실로 좋은 새이며
拔扈豈常鱗 그물을 떨치고 나가야 예사스런 물고기가 아니리
求忠必於孝 충은 반드시 효에서 비롯되니
請看依閭人 그대여, 자식 기다리는 어머니를 생각하소서
- 김주경이 보낸 탈옥을 권유하는 5언 절구 -
■ 김주경 - 강화 출신 김주경은 무관 출신으로 청년 김구의 열렬한 지지자이자 후원자였다. 법무대신 한규설을 만나 김구의 석방을 위해 노력하다가 가산을 탕진하고 청년 김구에세 탈주를 권유하는 위문편지를 보낸다.
■ 유완무 - 유완무는 인천 지역에 용감한 청년 몇 사람을 모아 청년 김구를 감옥에서 구출해내는 계획을 세웠으나 거사 사흘 전에 김구가 다른 죄수들과 탈옥하는 바람에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다. 그는 후에 김창수라는 이름을 김구로 고쳐주었다.
■ 박영문·안호연 - 인천 신상협회 창립 멤버로 인천항의 유명한 물상객주였던 박영문은 청년 김구의 어머니가 옥바라지를 할 수 있도록 거처와 일을 마련해 주었다. 안호연 역시 김구와 모친을 극진한 정성으로 대하였다.
조력자들 조형물 바로 위쪽에 탈옥에 관련된 벽화가 있었다. 탐방을 마친 후 비문을 입력할 때, 탈옥에 관련된 것이 없어서 다음날 다시 촬영하여 추가하였다. 당시에는 주차된 차량에 가려서 볼 수 없었다.
김창수(백범 김구)는 결국 나를 죽이려 애쓰는 놈은 왜구들 뿐인데 내가 그놈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 옥에서 죽는다면 과연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라는 생각으로 탈옥을 결심하고 실행에 옮기기에 이른다. 명성황후 시해에 참여한 일본 군인을 살해한 죄목으로 인천감리서에 수감된 김창수 스스로도 「국모보수」의 대의를 무시당한 채 기약없는 사형수 생활을 언제까지나 감내하고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여 탈옥을 계획하기에 이른다. 탈옥을 계획한 인천감리서에는 소리를 배운 기생서방 조덕근과 절도 재범으로 10년형을 받고 몇 달이 되지 않은 열예닐곱 살의 강백석과 3년형을 받은 양봉구 등이 있었다. 그밖에 절도죄로 3년형을 받았다가 만기를 거의 채우고 출옥일이 보름밖에 남지 않은 강화 출신의 황순용이란 자도 있었다. 김창수는 이 네명을 데리고 함께 탈옥하기로 결심했다.
- 백범 김구 탈옥기(脫獄記) -
청년 김구, 감옥으로부터의 탈출
청년 김구, 감옥으로부터의 탈출
"하늘이 밝아오고 천주교당 뾰족집이 보였다. 그것이 동쪽이라고 짐작하고 걸어갔다."
- 백범일지 -
이곳의 위치는 인천중부교회(인천 중구 송학동3가 5-1) 담벼락이다.
처음 찾았었던 '감리서 터' 바로 옆이다.
인천 축항과 노역, 노역의 현장
인천 축항과 노역
● 인천항 : 인천항은 조수간만의 차가 커서 큰 배가 드나들기 어렵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이러한 자연적 조건을 개선하고자 추진된 것이 이중갑문식 선거이다.
인천 감옥으로 옮겨진 김구는 인천항 건설 공사장에 끌려가 강제로 일을 하였다. 백범일지에 당시 노역에 대해 '힘들어서 바다에 떨어져 죽고 싶었다'고 기억할 만큼 인천항 공사 노동은 고된 일이었다.
'아침저녁 쇠사슬로 허리를 마주 매고 축항 공사장에 일을 나갔다. 흙 지게를 등에 지고 10여 장의 높은 사다리를 밟고 오르내렸다. 여기서 서대문 감옥 생활을 회고한다면 소감의 '누워서 팥떡 먹기라.' 불과 반일에 어깨가 붓고 등창이 나고 발이 부어서 운신을 못 하게 되었다. 그러나 면할 도리가 없었다. 무거운 짐을 지고 사다리를 올라갈 때 여러 번 떨어져 죽을 결심을 했다.'
- 백범일지 -
노역의 현장
노역의 현장
'아침저녁 쇠사슬로 허리를 마주 매고 축항 공사장에 일을 나갔다. 흙 지게를 등에 지고 10여 장의 높은 사다리를 밟고 오르내렸다. 여기서 서대문 감옥생활을 회고한다면 소감의 '누워서 팥떡 먹기라.' 불과 반일에 어깨가 붓고 등창이 나고 발이 부어서 운신을 못 하게 되었다. 그러나 면할 도리가 없었다. 무거운 짐을 지고 사다리를 올라갈 때 여러 번 떨어져 죽을 결심을 했다.'
- 백범일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