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어장터 3.1만세운동 기념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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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인천광역시 계양구 장기동 139-3
탐방로그
인천 계양구 장기동 139-3에 있는 황어장터 3.1만세운동 기념관을 찾아가는 길이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황어장터 3·1만세운동의 내용과 역사적 의의
1919년 3월 1일을 기하여 한민족은 국내외에서 조선의 독립을 외치는 거족적인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에 계양주민들도 3월 24일 오후 2시경 오류리 심혁성의 주도하에 장기리 황어장터 장날을 이용하여 600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구한국기를 흔들며 조선독립만세를 힘껏 외쳤다. 황어장터의 만세운동은 인천지역에서 전개된 가장 대규모적인 만세운동이었으므로 당황한 일제는 심혁성을 체포하는 한편 이의 진압에 적극 나섰다. 이에 장기리의 임성춘 등 주 민 200여명은 만세운동과 더불어 일제에 체포되어 가는 심혁성의 탈환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자 부내 경찰관 주재소 일본순사는 칼을 빼어 휘둘러 선봉에 섰던 선주지리의 이은선을 즉사케 하고 윤해영에게 부상을 입히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은선의 피살 소식이 전해지자 계양주민들은 분연히 떨쳐 일어났다. 다남리의 이담(이은선 의 6촌)을 중심으로 통문을 돌려 주민들을 규합하여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는 한편 진실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촉구하고자 하였다. 소식에 접한 주민 200여명이 밤 12시 계양면사무소 앞에 모였다. 이담, 최성옥, 전원순, 이공우 등 다남리, 이화리, 선주지리, 오류리, 장기리 주민들과 천도교인, 선주지리 기독교인, 일반 농민 등이 주축을 이루었다. 성난 계양주민 100여명은 우 선 선주지리에 있는 면사무소 서기 이경응이 친일적인 혐의가 있다고 인정하고 그의 집으로 달려가 집을 파손하여 민족정기가 살아 있음을 보여주고자 하였다. 아울러 친일자의 말로가 어떤가를 보여줌으로서 민족적 단결을 추구하고자 하였다. 또한 주민들을 억압 탄압하던 면사무소도 파괴하여 친일기관을 응징하고자 하였다.
만세운동에 적극적이었던 계양주민 40여명은 3·1운동을 전개하였다는 혐의로 일경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 심문을 당하였으며, 일부 인사들은 김포 등 타 지역으로 피신하였다. 결국 만세운동의 중심인물들은 1919년 10월 2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유죄판결을 받았으며, 11월 19일에 형량이 최종 결정되었다. 이담 징역 2년, 심혁성 징역 8월, 임성춘 징역 1년, 최성옥 징역 10월, 전원순 징역 10월 등이었다.
황어장터의 만세운동은 계양지역 주민들의 민족적 자부심과 자긍심을 널리 알리는 데 크게 기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인천지역, 나아가 전국의 만세운동 전개에도 견인차 역할을 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인천 계양구 장기동 139-3에 있는 황어장터 3.1만세운동 기념관을 찾아가는 길이다.
황어장터 3.1만세운동 기념관
황어장터 3.1만세운동 기념관 설명도
잉어가 많이 난다고 하여 붙여진 이곳 황어장터에서 기미년 3월 24일 오후 2시경 장이 파하는 시간에 심혁성 지사의 주도로 계양주민 600여명이 일제에 항거하여 대대적인 독립만세를 불렀다. 강서지방에서 최초이자 인천지역 만세 운동의 도화선이 된 이 의거는 이은선 지사의 순국, 그리고 40여명이 일경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과 심문을 당했으며, 중심인물로 지목된 인사들은 혹독한 옥고를 치루었다. 아직도 이 지역에 많은 후손들이 거주하고 있으며 황어장터에서의 만세운동은 계양주민들의 민족적 자부심과 자긍심을 널리 알리는데 크게 기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인천지역, 나아가서는 전국의 만세운동에도 견인차 역할을 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 기념탑 ]
1. 작품의 개요
• 규모 : 가로 13.2m X 세로 4.5m X 높이 13.1m
• 재료 : 포천석 + 상주석 + 마천석 + 청동
• 작품설명 : 수직의 긴장감과 웅장함, 수평의 평안함이 조화를 이루고,
우측의 부조는 황어장터의 역사성과 3.1만세운동의 역정이 표현되고 있으며 좌측의 태극기는 우리 민족의 드높은 독립의지를 상징하고 있다. 또한 수직의 탑신부는 민족의 기개와 미래를 향해 끝없이 뻗어 나가는 의지를 표현하며 우측의 날개에 양각하여 역동적으로 표출하였다. 전면부에 청동상을 위치 하여 당시의 현장감과 긴장감, 민족독립의지를 힘찬 역동감으로 보여주고 있으며 이곳 황어장터에서 일어난 선열들의 투쟁과 얼을 민족정사[正史]로 인식시키며 기상의 표상으로 후세에 가르치고자 의도한 작품이다.
2. 각부의 상징성
• 태극기: 역사적 국난 속에서도 늘 꿋꿋이 이겨낸 우리 민족의 저력과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조선의 주권을 상징한다는 의미로 태극기의 형상을 조형화함
• 조각부 : 민족 독립의 의지를 표현함과 아울러 당시 3.1만세운동의 정신을 진취적인 형상을 빌어 표현함
• 탑신부조 : 우리 민족의 정기와 기상을 표현함
• 탑신부조 : 당시 황어 장터에서의 3.1만세운동을 역동적으로 표현함
• 황어: 휴게공간에 황어 잉어를 재구성하여 등장시킴으로서, 휴식과 감상의 공간뿐 아니라 본 장소의 유래를 관람객에게 인지시키는 역할을 함
황어장터 3.1만세운동 기념탑
비문
1919년 3월 1일을 기하여 한민족은 국내외에서 조선의 독립을 외치는 거족적인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에 계양주민들도 3월 24일 오후 2시경 오류리의 심혁석의 주도하에 장기리 황어장처 장날을 이용하여 600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태극기를 흔들며 조선독립만세를 힘껏 외쳤다. 황어장터의 만세운동은 인천지역에서 전개된 가장 대규모적인 만세운동이었으므로 당황한 일제는 심혁성을 체포하는 한편 이의 진압에 적극 나섰다. 이에 장기리의 임성춘 등 주민 200여명은 만세운동과 더불어 체포되어 가는 심혁성의 탈환운동을 전개하였다. 구내 경찰관 주재소 일본순사는 칼을 빼어 휘둘러 선봉에 섰던 산주리의 이은선을 즉사케하고 윤해연에게 부상을 입히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은선의 피살소식이 전해지자 이담, 최성옥, 전원순, 이공우 등 천도교인, 기독교인, 일반 농민 등이 주축이 되어 분연히 떨쳐 일어나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는 한편 진실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촉구하고자 하였다. 특히 성난 계양주민 100여명은 우선 선주리에 있는 면사무소 서기 이경응이 친일적인 협의가 있다고 보아 그의 집으로 달려가 집을 부수어 민족정기가 살아있음을 보여주고자 하였다. 또한 주민들을 억압 탄압하던 면사무소도 파괴하여 친일기관을 응징하고자 하였다. 만세운동에 적극적이었던 계양주민 40여명은 3.1운동을 전개하였다는 혐의로 일경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였으며, 그 중 이담은 징역2년, 임성춘은 징역 1년, 최성옥과 전원순은 각각 징역 10월, 심혁성은 징역 8월에 처해졌다. 황어장터의 만세운동은 계양 주민들의 민족적 자부심과 자긍심을 널리 알리는 크게 기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인천지역 나아가 전국의 만세운동 전개에도 견인차 역할을 전개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황어장터 만세운동에서 중추적 역할을 한 애국지사들은 다음과 같다(가나다 순)
김영권 김창열 박문칠 배응준 송광현 심혁성 안윤필 유연봉(유석기) 윤해영 이공우 이금산 이담(이태현) 이은선 이태완 임성일 임성춘 임창현 전기순 전봉학 전사삼 전상근 전원순 전천능 정태용 조성칠 채귀현 채규명(채상현) 채봉운 채봉혁 채흥봉 최성옥 최청일 홍여선
2004년 8월 15일 수원대학교 사학과 교수 박환 지음
기념탑 건립 취지문
기미년 3월 1일 독립운동의 불길은 이곳 장기동 황어장터에서도 타올라 3월 24일 오후 2시경 장이 파하는 시각에 600여명의 계양주민들은 일제에 항거하며 독립만세를 외쳐 불렀다.
심혁성이 주도한 황어장터 만세운동에서 일본순사가 휘두른 칼에 희생자와 부상자가 발생하자 이에 더욱 격분한 계양주민들은 분연히 떨쳐 일어나 일제의 발생을 규탄하였다.
적극적으로 만세운동에 가담했던 40여명은 일경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과 심문을 당했으며, 그 가운데 중심인물로 지목된 인사들은 혹독한 옥고를 치루었다.
황어장터 만세운동은 인천지역 만세운동의 도화선이 되었고 강서지방에서 가장 큰 규모의 만세운동으로 발전 전개된 의거 이를 인천시민과 국민에게 널리 알림으로써 계양구의 역사적 전통성을 확인하고 정체성을 제고하며 구민의 자긍심을 고취하여 지역발전에 초석이 되고자 한다.
또한 일제에 항거, 목숨을 바쳐 희생한 애국지사 선대들의 고귀한 정신을 기리고 후대에, 특히 청소년들에게 나라사랑하는 마음의 산 교육의 장으로 삼아 민족의식을 고양하고자 여기 추모 기념탑을 세운다.
2004년 8월 15일
인천광역시 계양구청장 박희룡
인천지역의 대표적인 만세운동

1919년
3월 6일 - 인천공립보통학교 동맹휴학에 돌입, 만세운동 참여
3월 8일 - 인천 시내 독립선언서 다수 배포
3월 9일 - 만국공원(현 자유공원) 만세운동 전개, 경인가도 50여명이 만세를 부르다 주동자 1명 체포됨
3월 13일 - 소래면 주민들이 소래산에서 만세운동 전개
3월 24일 - 부평 황어장터에서 600여명이 만세운동 전개
3월 27일 - 문학동 만세운동
3월 28일 - 용유면 만세운동
3월 30일 - 인천 내리 상가철시운동
4월 1일 - 월미도 만세운동
4월 23일 - 인천 만국공원 13도 국민대표자회의 소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