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촌 당산미 3.1운동 유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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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기도 김포시 고촌읍 신곡리 산57
탐방로그
당산미 3.1운동 유적지 표지판을 찾아가기 위해 김포시 고촌읍 신곡리 산57 (풍곡리 산29-2)에 왔다. 산속의 주소이기 때문에 내비게이션이 엉뚱한 곳으로 안내를 해서, 고촌체육공원을 입력하고 왔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김포시 고촌읍 신곡리 산57 (풍곡리 산29-2) 당산미 3.1운동 유적지 표지판을 찾아가고 있다.
산속의 주소이기 때문에 네비게이터가 엉뚱한 곳으로 안내를 해서, 고촌체육공원을 입력하고 왔다.
경기 꿈의학교 고촌 당산미 우리동네 둘레길 우.동.둘
3.1운동 유적지 당산미 가는 길
당산미산
당산미 3.1운동유적지 정상
고촌 당산미 3.1운동유적지
당산미 내력
이 산의 북동쪽 아래 마을은 안시미. 서쪽과 북쪽은 풍굴 마을로 이 일대가 양천 허씨의 집성촌 이었으며, 당시 허씨 집안에 허장사가 태어났다 전한다. 양천 허씨들은 이 산 남쪽 골짜기에 당집을 짓고 매년 제사를 지내왔다. 또한 이 산에 아가위(한약초의 일종)가 많이 자생하였다고 전한다. 그 후 양천허씨들은 떠나고 지금은 백천 조씨가 집성촌을 이루었다. 1919년 3월 25일 고촌면민들이 이곳에서 3.1독립만세운동을 펼친 곳이기도 하다. 그 후 매년 정월대보름 날이면 인근 동네 사람들이 모여 달맞이 하던 곳이기도 하다.
이 산은 당집이 있어 당산미(堂山尾), 당살뫼(堂薩山)라 불렸다는 설도 있고, 배천 조씨들의 족보 기록에는 아가위 당(棠)자를 써 당산미(棠山尾)로 기록되어 있고, 현재는 당산미라 부른다. 일부 지도에 이 산을 옥녀봉이라 표기 된 것은 잘못 표기된 것으로 이를 알리기 위하여 인근에 살던 주민들이 이글을 이 돌에 새긴다.
※ 아가위의 효능
배과 식물로 성질이 따뜻하며, 열매는 히고 달다.
관절염, 류미티스(뿌리), 건위, 혈액순환촉진, 해독, 복통, 위궤양, 생리통(잎, 꽃, 열매)
2010년 2월 9일 당산미 표지석 설립 위원회
당산미
찾는 이 하나 없고 갈 곳 없고 갈 곳 없는 중눍은이
오동지 긴긴 밤을 뜬눈으로 지새우고
석양에 막대집고 당산에 올라서니,
매서운 칼바람이 귓불을 에이누나.
서산마루 지는 해가 왜 이다지도 서럽던가.
산 새알 꺼내먹고 칡뿌리로 배 체우던
모금산골짜기는 간데없고 당산미만 홀로 서 있네.
울긋불긋 진달래꽃 다박솔 가득하던 옥녀봉은
덤프트럭에 실려 어디로 가버렸나.
청솔연기 자욱하면 어 양쪽동네 젊은이들,
정월대보름 참나무 화라지에 불 질러놓고
이 봉우리 먼저 차지하려 무던히도 싸웠는데.
웅어 배 넘나덜던 저 석굴 나루터,
여인네 웃음소리 가득하던 니나노 영사옥
철따라 연분홍 다홍치마 휘날리던 백마섬 물놀이.
황금물결 출렁이던 광활한 황금벌판
벌거벗고 뛰놀며 고기 잡던 저기 저 중앙 뚝,
붕어랑, 메기랑 대야 가득 잡았었지.
참게가 지천이던 저 가마 논 골짜기,
저 - 아래 게막 치고 참게 잡던 젊은이들
좋은 자리 차지하려, 자리다툼 치열했지.
동네 사람들, 논 한 가운데 샘터에선
사흘 들이로 웅덩이 퍼 장어깨나 잡았는데.
반백년 지난 세월 이다지도 길었던가.
해만지면 이 산에 올라 청솔불로 달맞이하던
그 벗들은 어데 가고 낙엽만이 뒹구느냐?
이제 날이 저무니 저 세상에서나 만나려나.
석양에 홀로 서서 임 그리워하노라.
기축년 섣달 스므이틀 당산미에서 촌노(村老) 英經
남쪽 고촌중학교 일대가 모금 산골짜기로, 6.25직후 배고픈 아이들에 배를 채워주던 칡뿌리가 많이 자생하던 곳이며, 그 앞에 (지금의 대우아파트 옆) 옥녀봉이 있었으며 옥녀봉에는 장차 부락 사람들이 달맞이를 하던 곳으로 김포공항 제2청사 준공시 활주로 확장공사장을 매립하는데 사용되었으며 아직도 일부자리에 단단한 화강암이 있어 완전 채굴하지 못하고 흙으로 덮어놓았다. 동남쪽 멀리 영사정 뒷산에는 영사정과 은행정 사람들이 달맞이 하던 곳으로, 6.25직후 미군이 몇년간 주둔하였다가 부평으로 이전하였다. 또한 1919년 3월 24일 고촌면민이 최초로 3.1독립만세운동을 펼친곳 이기도 하다. 영사정에는 여인들이 들끓는 술집들이 많았으며, 백마섬에 경치가 수려하여 주말리면 서울에서 찾아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남쪽 벌판은 한강변에서 계양산 아래까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은 곡창지대 이었다. 글쓴이 김영경
옥녀봉(玉女峰)
남쪽에서 이곳 당산미와 마주보던 봉우리이며 장차부락의 뒷산으로 마을 이름을 옥녀의 비녀자리라 하여 비녀釵(차,채)를 써 장차(長釵)부락이라 이름 지었다 한다.
저 푸른 창공을 바라보며
가슴을 활짝 펴고 이산을
통째로 들여 마셔 버리자.
당산에 영험함이 모든 이에
고통을 덜어주고 이산에 아가위가
너의 몸속을 흐르는 피를
맑게 하여 줄 것 이니라.
일출봉
팔각정 옆에 세워져있는 당산미 1919년 3월, 일제시대 고촌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표지판
당산미 1919년 3월, 일제시대 고촌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대한민국 만세"의 소리가 경성 탑골공원에서 하늘 높게 울려퍼지자 독립운동의 의지를 굳게 갖고 있었던 고촌의 김정의는 마을 사람들에게 독립운동을 독려하였다.
김정의는 김정국, 윤재영, 김남산, 윤주섭, 이흥돌과 함께 밤새도록 태극기를 만들었고 김포 고촌읍의 당산미에서 1919년 3월 24일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후 고촌 당산미에서는 긴 장대에 태극기를 높이 꽂아놓고 계획적으로 산에 모여 일제에 항거하였으며, 지금도 당산미 정상에는 태극기가 펄럭이고 있다.
우리 동네 고촌에서 울려퍼진 독립운동의 숨결을 느끼며 산길을 걸어보는 것은 어떨까?
堂山亭(당산정)
체육공원에서 처음 산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던 곳
제1길 천등고갯길 1919년 3.1만세운동의 근거지, 당산미
당산미(94.5m)는 고촌사람들에게 있어 특별합니다.
1919년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만세운동이 시작되었고, 경성중동고등보통학교에 재학 중인 김정의(당시 20세) 지사도 만세운동에 참여했습니다. 휴교령과 일제의 체포를 피해 고향인 고촌면 신곡리로 돌아와 사촌형 김정국 지사와 만세운동을 상의했습니다.
이후 윤재영, 김남산, 윤주섭, 이흥돌 지사가 동참하였고, 3월 24~25일 주민 50여명과 함께 당산미에서 손수 그린 태극기를 무기삼아 독립만세를 외쳤습니다. 당시 경성지방법원의 판결문에 따르면 보안법 위반을 이유로 그해 5월 22일 김정의를 비롯하여 김정국, 윤재영, 김남산, 이흥돌 지사가 각각 6개월에서 10개월의 옥고를 치르게 되었습니다. 김정의는 옥고를 치른 후 중국 길림성으로 넘어가 독립운동을 이어갔다고 합니다.
이렇듯 당산미는 고촌사람들의 치열한 만세운동의 역사가 서린 현장입니다. 또한 88올림픽을 위한 김포공항 활주로 공사로 사라진 옥녀봉을 천등고개로 잇는 자그만 산이기도 합니다. 예로부터 당집이 있어 당살뫼, 당산이라고도 하였는데, 공식 지도에는 오랫동안 옥녀봉으로 잘못 표기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경기 꿈의 학교 '우리동네 둘레길 만들기(우.동.돌)' 프로그램에 참여한 학생들 덕분에 의해 산이름을 '당산미'로 바로 잡았습니다. 특히 학생들의 자발적 노력으로 조성된 고촌읍 역사길은 <2020년 제2회 김포시마을안길 공모전(부제: 우리동네 별난길)>에 당선되기도 했습니다.
고촌지역 학생들의 보이지 않는 노력과 땀으로 '당산미'의 옛 지명을 바로 잡았고, 고촌 만세운동의 정신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