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제우 유허지 표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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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울산광역시 중구 유곡동 636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최제우 유허지 생활공원
최제우 유허지는 울산시 기념물 제12호로 조선후기 동학의 창시자 최제우가 수도생활을 하다 천서를 받고 도를 깨우친 장소입니다. 이곳에 조성된 생활공원은 개발제한구역 내 지역 주민들이 이용할 수 있는 녹색여가공간으로 국토교통부 공모에 선정된 사업입니다. 자연이 우거진 이곳에서 가족, 친구와 함께 명상과 힐링의 시간을 가져보세요.
울산 중구 유곡동 636 여시바위골 수운 최제우 을묘천서를 받은곳 천도교 유허지를 찾아가고 있다.
수운 최제우 유허지(水雲 崔濟愚 遺墟址) - 울산광역시 기념물 제12호 / 울산광역시 중구 원유곡길 106
최제우(1824~1864)는 외세의 침략과 봉건사회의 모순에 반대한 종교였던 동학(東學)의 교조(敎祖)이다. 호는 수운(水雲)이고, 경주 출신이다. ㅈ비안 살림이 어려워 장사를 하거나, 의술(醫術)과 점술(占術)에 관심을 보이거나 서당에서 글을 가르치기도 하면서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그러나 참된 되를 구하려는 수운의 노력은 양산, 울산, 경주 지방에서의 수련으로 이어졌고, 마침내 1860년 4월 5일 결정적인 종교체험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듬해 포교를 시작하여 1863년에는 경상도.전라도 뿐만 아니라 충청도와 경기도에까지 교세를 펼쳐, 교인 3천여 명, 지방 종교조직은 접소(接所) 13개소를 확보하기에 이르렀으나, 1864년 좌도난정(左道亂正)의 죄목으로 죽임을 당하였다. 울산은 부인 박씨의 고향으로, 수운은 이곳 '여시바윗골'에 초가집을 짓고 수련을 계속하던 중 1855년에 깨달음에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를 천도교에서는 '을묘천서(乙卯天書)'라고 부른다. 현재 이 고세는 1997년에 천도교에서 세운 '천도교 교조 대신사 수운 최제우 유허비(天道敎 敎祖 大神師 水雲 崔濟愚 遺墟碑)’와 1999년에 세운 비각(碑閣)이 있다.
天道敎 敎祖 大神師 水雲 崔濟愚 遺墟碑(천도교 교조 대신사 수운 최제우 유허비)
天道敎 敎祖 大神師 水雲 崔濟愚 遺墟碑(천도교 교조 대신사 수운 최제우 유허비)
이곳은 천도교 제1세 교조이신 대신사(大神師) 수운 최제우(水雲 崔濟愚) 선생꼐서 6년 간 수도하시던 터이다. 대신사께서는 19세(1842년) 때 울산에서 박씨 부인과 결혼하신 후 제세안민의 대도(大道)를 구하기 위해 10년 간 전국을 주유하시다가 31세(1854년) 떄 이곳에 초가를 짓고 수련으로 일관하던 중 을묘(1855년) 3월 3일 비몽사몽간에 기인(奇人)으로부터 천서(天書)를 받는 영험(靈驗)을 체험하셨다. 지극한 정성으로 한울님께 기도하라는 천서의 뜻에 따라 양산(梁山) 천성산(千聖山)에서 두 차례의 49일 기도를 하시는 등 종교적 수행을 계속하시다가 36세(1859년) 되는 10월에 고향인 경주 용담으로 도라가 극진한 기도와 독공 끝에 이듬해인 경신(庚申 : 1860년) 4월 5일 한울님으로부터 후천개벽 운수를 받아 무극대도인 동학 천도교(東學 天道敎)를 창명하셨다. 이에 대신사께서는 사람은 누구나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는 시천주(侍天主) 진리에 따라 인간의 자유 평등과 사회정의를 실현하기 위하여 천도를 펴시다가 포덕 5(1864)년 3월 10일 좌도난정의 누명을 쓰고 대구장대에서 참형을 당하여 순도하셨다. 우리들은 대신사의 위대한 시천주 사상과 보국안민의 덕업을 무궁토록 기리기 위하여 이 비를 세워 후세에 전한다.
포덕 138(1997)년 10월 18일
천도교 중앙총부 건립 / 진성당 최말란 특성 / 문화체육부.울산광역시 후원
제자 김재중 교령
비문 표영삼 상주선도사
민족평화통일의 밀알이 되기 위해 백두산과 한라산의 물과 흙을 가져와 이곳에서 합토합수하여 통일나무를 심었나이다. 민족의 꽃이여! 보국안민의 정신이 혼연히 살아나 통일의 그날까지 겨레의 가슴에 영원히 피어나시라.
- 울산 어울림산악회 일동 -
侍天主(시천주)
최제우 나무 - 회화나무
동학을 널리 펴던 수운 최제우 선생은 유교의 가르침을 어지럽혀 백성들을 현혹시킨다는 '좌도난정(左道亂正)'의 죄목으로경상감영감옥에(현. 대구종로초등학교) 있던 처형장인 관덕당 뜰에서 참형됐다. 1864년 3월 10일 41살의 젊은 나이였다. 감사의 효수형 명령이 떨어지자 수운 선생을 지켜보던 회화나무 잎사귀에서 수액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고, 이를 전해들은 사람들은 그 회화나무를 '최제우 나무'라고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