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항일독립운동기념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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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울산광역시 남구 달동 497-11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의병
∎ 애국장 - 김기준(金基俊), 김선일(金善日), 김치일(金致一), 박선익(朴善益), 이돈성(李敦誠)
∎ 애족장 - 김춘길(金春吉), 장치일(張致一)
3·1운동
∎ 애국장 - 김낙수(金洛綬) 김응룡(金應龍) 문성초(文星超) 엄준(嚴俊) 주사문(周士文)
∎ 애족장 - 고기룡(高基龍) 김장수(金長壽) 이규린(李奎麟) 이무종(李武鍾) 이문조(李文祚) 이성영(李成榮) 이용락(李龍洛) 이종근(李鍾根) 이종욱(李鍾旭) 이종필(李鍾弼) 이현우(李鉉遇) 정지모(鄭智謨) 최윤봉(崔允奉) 최현구(崔鉉玖) 황정달(黃丁達)
∎ 건국포장 - 이규인(李圭寅)
∎ 대통령표창 - 강기형(姜祺馨) 강문필(姜文必) 권석운(權奭運) 김경수(金卿洙) 김송근(金松根) 김영식(金永植) 김운봉(金雲峰) 김재수(金在洙) 김정욱(金正勖) 김정원(金正元) 김충념(金忠念) 김한준(金漢俊) 박규환(朴圭桓) 백봉근(白鳳根) 서무출(徐武出) 서태식(徐泰植) 손수복(孫秀福) 송명진(宋明進) 신종기(申鍾驥) 양석룡(楊錫龍) 윤봉수(尹鳳秀) 윤학이(尹學伊) 이근복(李根復) 이수락(李壽洛) 이종룡(李鍾龍) 이쾌경(李快慶) 이쾌덕(李快德) 이홍준(李洪俊) 이희계(李希季) 정용득(鄭龍得) 정태원(鄭泰源) 최금석(崔金碩) 최원득(崔元得) 최한홍(崔翰鴻) 최현표(崔鉉杓) 허황(許堭) 황학동(黄鹤東)
국내항일
∎ 독립장 – 박상진(朴尙鎭)
∎ 애족장 – 박형관(朴炯瓘) 손학익(孫鶴翼) 손후익(孫孫翼) 신학업(申學業) 이동개(李同介) 이미동(李美柬) 이재락(李在洛) 정진근(鄭鎭根)
∎ 건국포장 – 김장룡(金章龍) 배봉수(裵鳳秀) 손진인(孫晉仁) 이우락(李宇洛) 조형진(曹亨珍)
∎ 대통령표창 – 김길원(金吉元) 윤진옥(尹瑨玉) 이현구(李鉉球) 최을택(崔乙澤)
문화운동
∎ 독립장 – 최현배(崔鉉培) / ∎ 애족장 – 장재술(張在述)
학생운동
∎ 애국장 – 박제민(朴濟敏) / ∎ 애족장 – 안장원(安長遠) 정두열(鄭斗烈) / ∎ 대통령표창 – 이갑술(李甲述)
미주방면
∎ 건국포장 – 윤진오(尹眞五)
만주방면
∎ 애국장 – 신광재(辛光在)
일본방면
∎ 애족장 - 김덕남(金德男) 박근철(朴根澈) 서진문(徐鎮文) 손병주(孫炳柱) 오유환(吳侑煥)
∎ 건국포장 – 송병홍(宋柄虹) 윤수암(尹壽巖) / ∎ 대통령표창 – 장상준(張相俊)
중국방면
∎ 애국장 – 金順坤(김순곤)
광복군
∎ 애국장 – 차영철(車永澈) / ∎ 애족장 – 박영(朴英)
울산의 항일 독립운동을 기억하며
울산 항일 독립운동 기념탑에는 20세기 전반 일본 제국주의의 침탈에 맞섰던 울산 사람들의 고귀한 이름이 새겨져 있다. 울산에서는 일제의 강제 병합 직전에 일어난 의병 항쟁을 시작으로 국권 수호를 위한 항일 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1919년 4월에는 전국에서 일어난 3.1운동에 발맞춰 울산 곳곳에서 만세운동이 벌어졌다. 울산 사람들은 1910년대 국내 항일 투쟁의 상징인 대한광복회를 비롯하여,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하기까지 울산과 국내 각지에서 다양한 항일 운동을 전개하였다. 만주, 중국 관내, 미주, 일본등 국외에서도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고 항일 의식을 복돋았으며, 항일 무장 투쟁에도 참여하였다.
위험을 무릅쓰고 목숨 바쳐 그들이 이루고자 하였던 소망은, 빼앗긴 국권의 회복, 자유와 평등, 인권과 평화가 보장되는 새로운 나라의 건설이었다. 항일 독립운동의 위대한 여정에서 혹독한 고초를 겪은 우리 선열의 넋을 기리고, 그 숭고한 발자취를 기억하며, 미래 세대에 계승할 역사를 기록하고자 이곳에 기념탑을 세운다. 2020.12.31 울산 시민들의 염원을 담아
울산 의병
울산 출신으로 이루어진 김기준 의병 부대는 군대 해산 뒤인 1908년 3월에 언양의 일본 순사 주재소와 우편소, 관청건물을 공격하여 방화하였으며, 울산 각지에서 군자금과 군수품을 모집하였다. 일제 군경의 무자비한 토벌로 많은 울산 의병들이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순국하거나 징역을 살았다.
울산 출신 의병 중에는 1906~1908년에 인접한 경북지역의 의병투쟁에 참가하였다가 순국하거나 옥고를 치른 선열도 있었다. 이 탑에 이름을 올린 의병들 외에도 수많은 울산 사람들이 의병투쟁에 참여하였다. 하지만 울산과 경남지역에서 펼쳤던 의병 운동의 실상을 알려 줄 재판 기록이 대부분 불타 없어져, 울산 의병들의 활약상을 더 자세히 확인하기는 어렵다.
국내 항일운동
1910년대 국내 항일운동을 대표하는 대한광복회를 주도한 사람은 울산 송정 출신 박상진이었다. 그는 전국을 무대로 독립운동 조직화와 자금 마련, 친일파 처단을 주도하다가 1918년 2월 체포되어 1921년 8월에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울산 범서면 입암과 웅촌면 석천의 유림들은 유림계 항일 운동 지도자인 심산 김창숙과 함께 항일 독립운동을 위한 군자금 모금에도 힘썼다.
1920~1930년대에는 울산 지역에서도 청년 운동과 농민운동, 신간회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으며, 여기 참가한 독립운동가들이 치안유지법 위반 등으로 체포되어 고초를 당하였다. 1940년대에는 전시 체제 아래에서도 일제의 황국신민화 정책에 맞선 울산 청년 학생들의 저항이 끊이지 않았다. 울산 출신으로 군내 다른 지역으로 나갔던 청년과 학생들도 일제의 부당한 차별과 강제 동원을 비판하며 시위를 벌였고, 비밀리에 독서회와 청년회를 조직하여 반일 의식을 북돋우다가 갖은 어려움을 겪었다. 울산이 낳은 위대한 한글학자 최현배는 민족 정체성의 뼈대인 한글수호와 연구에 매진하다가 구속, 수감되었으며, 일제가 패전한 뒤에야 함흥형무소에서 풀려났다.
울산 3.1운동
3.1운동이 전국 각지로 들불처럼 번져가던 1919년 4월 초에 울산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4월 2일 언양 장날 남부리의 장터에서 천도교도의 주도로 수많은 사람들이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4월 4일 오전에눈 병영에서 청년들이 앞장서서 만세 시위를 벌였으며, 4월 5일 오후에도 수백 명의 군중이 주재소로 몰려가 전날 검거된 사람들을 석방하라며 만세시위를 이어갔다. 4월 8일 남창장에서는 웅촌면과 온양면의 청년들이 미리 준비한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시위를 이끌었다.
언양과 병영의 만세 온동에서는 일제 군경의 발포로 사망자까지 여러 명 발생하였다. 울산 지역의 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가 사망하거나 옥고를 치른 사람은 알려진 숫자만 51명에 이른다. 부산과 동래군에서 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가 체포된 울산 사람도 여럿 확인되었다. 부산에서 가장 먼저 일어난 3월 11일 밤의 좌천동 일신여학교 의거와, 3월 18일 과 19일에 범어사 승려와 부속학교 학생들이 주도하였던 동래 장처 만세 시위에도 울산출신 승려와 학생들이 참가하였다.
해외 항일운동
고향을 떠나 머나먼 미주와 일본, 만주와 중국 관내로 건너간 많은 울산 사람들도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거나, 비밀결사 조직과 항일 무장투쟁에 참여하였다.
미주 지역에서는 일제 강점기 내내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여 다양한 방법으로 항일 운동으루 지원하였다.
만주에서는 1910년대 신흥무관학교와 서로군정서의 무장 투쟁에, 중국 관내에서는 1930년대 후반 민족혁명당과 광복군 등의 무장 투쟁에 헌신하여 발자취를 남겼다.
일본으로 건너간 울산 사람들은 노동 운동에 참여하여 한국인 노동자의 권익 옹호를 위해 투쟁하였으며, 비밀 결사를 조직하여 항일 의식을 북돋우고 독립운동을 모의하다가 체포되기도 하였다.
울산 남구 달동 497-11 달동문화공원 내 울산항일독립운동기념탑을 찾았다.
울산항일독립운동기념탑
울산항일독립운동기념탑
울산항일독립운동기념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