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서울특별시 중구 장충동2가 197
- 탐방로그
- 중구 장충동 2가 197에 위치한 이한응 열사의 기념비를 찾았다. 이한응 열사는 최초의 순국열사이며, 이한응 열사의 묘는 용인시에 위치해 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殉國烈士 李漢應 先生 紀念碑(순국열사 이한응 선생 기념비)
殉國烈士 李漢應 先生 紀念碑(순국열사 이한응 선생 기념비)
遺書
嗚呼 國無主權, 人失平等, 凡關交涉, 恥辱罔極, 苟有血性, 豈可堪忍乎. 嗚呼 宗社 其將墟矣, 民族 其將奴矣, 苟且偸活, 其辱滋甚, 其若溘然之爲愈乎, 計決於比, 更無他言.
유서
슬프다. 나라는 주권이 없어지고 사람은 평등을 잃어버려 모든 외교에 치욕이 망극하니 진실로 핏기를 가진이면 어찌 이를 참을 수 있으리오. 슬프다. 종묘사직이 폐허가 될 것이요. 민족이 장차 노예가 될 것이라. 구차히 살자 하면 욕됨만 더하리니. 눈 감아 몰라버리는 것이 나으리로다. 이렇게 결단하고 나니 더 할 말이 없노라.
嗚呼 國無主權, 人失平等, 凡關交涉, 恥辱罔極, 苟有血性, 豈可堪忍乎. 嗚呼 宗社 其將墟矣, 民族 其將奴矣, 苟且偸活, 其辱滋甚, 其若溘然之爲愈乎, 計決於比, 更無他言.
유서
슬프다. 나라는 주권이 없어지고 사람은 평등을 잃어버려 모든 외교에 치욕이 망극하니 진실로 핏기를 가진이면 어찌 이를 참을 수 있으리오. 슬프다. 종묘사직이 폐허가 될 것이요. 민족이 장차 노예가 될 것이라. 구차히 살자 하면 욕됨만 더하리니. 눈 감아 몰라버리는 것이 나으리로다. 이렇게 결단하고 나니 더 할 말이 없노라.
사람이 살았다가 죽는 것은 판연한 사실이언만 바르게 살기가 극히 어렵고 옳게 죽기 더욱 드문 것이다. 어떻게 하면 바르게 사는 것인가. 의롭게 사는 것이 바르게 사는 것이요. 어떻게 하면 옳게 죽는 것이 죽을 땅에 꼭 죽어야만 하는 것이니 이러한 사람이 만겁인류 위에 몇 분이나 되는가. 이런 분은 실로 우리 인류 위에 해와 달의 존재다. 한국 근대사상 이런 분이 계시니 대한제국 영국주자 서리공사 이한응 선생이시다. 때마침 동양의 풍운은 사나워 청일노일두 전쟁이 전생이 끝나고 승리는 일본으로 돌아가 일본의 마수는 장차 대한제국을 병탐하려하여 영일동맹을 맺어 교활한 외교진을 영국에 펴고 있으며 선생은 만리이역에 외로운 몸으로 분연히 영국의 조야를 향하여 영일동맹개정을 결사 반대했으나 교환 조건에 눈이 어둔 영국은 마침내 일본을 두둔하고 한국을 저바리고 말았다. 슬프다. 세계대세는 한국이 일본의 마수에 떨어지지 않고는 다른 도리가 없게 되었다. 선생은 사절의 중대한 책임을 뼈아프게 느끼면서 광무 구년 을사 오월 십이일 결연히 독약을 마시어 영국 런던에서 자결하시니 선생의 나이 겨우 삼십 이세이었다. 구슬픈 부음이 전파를 타고 세계에 퍼지니 한국의 조야는 땅을 쳐 통곡했고 세계만인은 눈물을 흘려 의로운 이를 조상했다. 선생은 죽을 땅에 죽었고 의기는 만고에 푸름을 뻗쳤다. 선생이 가신 뒤 광무 구년 십일월 십칠일 국치의 을사조약은 이루졌고 민영환
조병세 및 여러분이 선생의 뒤를 이어 자결해 가시니 선생은 최초로 대한제국에 순국하신 선
구자였다. 선생의 유해는 칠월에 고국으로 돌아오시어 용인에 안장해 모시고 나라에서는 내부 합판을 증직하여 장충단에 배향케했다. 나라가 광복된 후 대한민국의 뜻있는 사람들은 이에 비석을 세워 선생의 백옥같은 절의를 천측만대에 기리 기념하는 바이다.
단기 사천이백구십삼년 삼월
박종화는 글 짓고 김충현은 글씨 쓰다
이한응열사추모회 세우다
구자였다. 선생의 유해는 칠월에 고국으로 돌아오시어 용인에 안장해 모시고 나라에서는 내부 합판을 증직하여 장충단에 배향케했다. 나라가 광복된 후 대한민국의 뜻있는 사람들은 이에 비석을 세워 선생의 백옥같은 절의를 천측만대에 기리 기념하는 바이다.
단기 사천이백구십삼년 삼월
박종화는 글 짓고 김충현은 글씨 쓰다
이한응열사추모회 세우다
최초의 순국열사이신 이한응 열사의 기념비이다.
이열사의 묘는 용인시에 있다.
이열사의 묘는 용인시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