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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문로1가 58-14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중국인에게 한글을 가르치다
중종 때 전문 통역인 주양우가 중국인에게 한글을 가르친 일이 문제가 된다. 한글이 창제된 뒤 100년이 지났지만 사대부들은 한글을 외면하고, 중국과 주변국은 한글을 알려는 호기심이 커지던 때이다. 언론 담당 기관 사간원은 주양우를 고발한다.
“우리나라의 일은 작은 것이라도 다른 나라에 전하면 안 되는 것인데, 주양우는 우리의 한글을 중국 사람에게 전하여 가르쳤으니 가벼운 일이 아닙니다. 주양우를 심문하여 징계하소서.”
결국 주양우는 심문을 받게 되지만 외국인에게 한글을 가르친 선구라자 할 만하다.
거리의 이야기꾼 전기수가 생겨나다
18~19세기에 소설이 많이 보급되면서 돈을 받고 거리나 가정에서 재미있게 이야기를 읽어주는 '전기수'라는 직업이 생겨났다. 그리고 그에 얽힌 크고 작은 소문이 떠돌았다.
그 중엔 종로 거리에서 전기수의 이야기를 듣고 청중이 실제인 것으로 착각하고 전기수를 죽였다는 소문이 있었다. 이야기 주인공들이 뜻을 이루지 못한 장면을 전기수가 실감나게 읽어주자 청중이 이야기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전기수를 악당으로 착각하고 눈을 부릅뜨고 낫을 들어 주인공을 대신해 죽였다는 것이다. 이처럼 전기수의 생생한 입담은 대중들이 한글 소설을 읽게 만드는데 기여를 했다.
중종 때 전문 통역인 주양우가 중국인에게 한글을 가르친 일이 문제가 된다. 한글이 창제된 뒤 100년이 지났지만 사대부들은 한글을 외면하고, 중국과 주변국은 한글을 알려는 호기심이 커지던 때이다. 언론 담당 기관 사간원은 주양우를 고발한다.
“우리나라의 일은 작은 것이라도 다른 나라에 전하면 안 되는 것인데, 주양우는 우리의 한글을 중국 사람에게 전하여 가르쳤으니 가벼운 일이 아닙니다. 주양우를 심문하여 징계하소서.”
결국 주양우는 심문을 받게 되지만 외국인에게 한글을 가르친 선구라자 할 만하다.
거리의 이야기꾼 전기수가 생겨나다
18~19세기에 소설이 많이 보급되면서 돈을 받고 거리나 가정에서 재미있게 이야기를 읽어주는 '전기수'라는 직업이 생겨났다. 그리고 그에 얽힌 크고 작은 소문이 떠돌았다.
그 중엔 종로 거리에서 전기수의 이야기를 듣고 청중이 실제인 것으로 착각하고 전기수를 죽였다는 소문이 있었다. 이야기 주인공들이 뜻을 이루지 못한 장면을 전기수가 실감나게 읽어주자 청중이 이야기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전기수를 악당으로 착각하고 눈을 부릅뜨고 낫을 들어 주인공을 대신해 죽였다는 것이다. 이처럼 전기수의 생생한 입담은 대중들이 한글 소설을 읽게 만드는데 기여를 했다.
한글 창제는 백성을 위함이니라!
세종이 한글을 창제하려 하자 집현전 학자 최만리는 여섯 개의 이유를 적어 반대하는 상소를 올린다. “글자란 것이 간단한 것도 아니고 수백 수천 년 이어져온 백성의 말이고 글인데 그걸 바꾸려면 써보고 여러 시험도 해 봐야 하거늘 고작 하급관리 몇 명을 데려다 입을 열어 말하게 하고 그걸 반포하려 한다면······.”
그러자 세종이 최만리를 불러 직접 심문한다.
“어려운 한자 대신에 내 나라 백성이 읽고 쓰기에 쉬운 글을 만들려는 것인데 너 최만리는 내가 몇 년 만에 얼렁뚱땅 글을 만들려는 걸로 보이느냐······.”
한글로 권력층을 풍자하다
세종대왕 시절 24년 동안 재상을 지낸 황희는 너그럽고 나라의 여론을 잘 살피는 명재상이었다. 그러나 같은 재상이었던 하연은 까다롭고 나이가 많아 실수하는 일이 잦았다. 어느 날 익명으로 담벼락에 이를 풍자하는 다음과 같은 벽보가 붙었다.
"하 정승아, 망령되지 말라!"
백성들은 한자보다 읽기 쉽고 쓰기 쉬운 한글이 등장하여 정치와 세상일을 비판하고 풍자할 수 있었다.
세종이 한글을 창제하려 하자 집현전 학자 최만리는 여섯 개의 이유를 적어 반대하는 상소를 올린다. “글자란 것이 간단한 것도 아니고 수백 수천 년 이어져온 백성의 말이고 글인데 그걸 바꾸려면 써보고 여러 시험도 해 봐야 하거늘 고작 하급관리 몇 명을 데려다 입을 열어 말하게 하고 그걸 반포하려 한다면······.”
그러자 세종이 최만리를 불러 직접 심문한다.
“어려운 한자 대신에 내 나라 백성이 읽고 쓰기에 쉬운 글을 만들려는 것인데 너 최만리는 내가 몇 년 만에 얼렁뚱땅 글을 만들려는 걸로 보이느냐······.”
한글로 권력층을 풍자하다
세종대왕 시절 24년 동안 재상을 지낸 황희는 너그럽고 나라의 여론을 잘 살피는 명재상이었다. 그러나 같은 재상이었던 하연은 까다롭고 나이가 많아 실수하는 일이 잦았다. 어느 날 익명으로 담벼락에 이를 풍자하는 다음과 같은 벽보가 붙었다.
"하 정승아, 망령되지 말라!"
백성들은 한자보다 읽기 쉽고 쓰기 쉬운 한글이 등장하여 정치와 세상일을 비판하고 풍자할 수 있었다.
서울 종로구 당주동 108 주시경마당
주시경 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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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구 신문로1가 58-14 한글회관
한글가온길
한글가온길 Hangeul Gaon-gil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했던 경복궁을 중심으로 세종대로 일대에는 한글을 널리 알리고, 지켜온 이야기가 가득합니다. 특히, 주요한 이야기와 역사의 흔적들이 모여 있는 이곳이 한글의 중심길인 한글 가온길입니다. 여기서 '가온'은 '가운데'를 뜻하는 순우리말입니다. 가온길에는 일제강점기부터 한글을 지키는데 앞장서 온 한글학회와 한글을 널리 보급하는데 애쓰신 주시경 선생의 집터가 있으며, 2013년에는 이러한 업적을 기리기 위한 상징조형물 등을 조성하여 가온길의 의미를 더하였습니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했던 경복궁을 중심으로 세종대로 일대에는 한글을 널리 알리고, 지켜온 이야기가 가득합니다. 특히, 주요한 이야기와 역사의 흔적들이 모여 있는 이곳이 한글의 중심길인 한글 가온길입니다. 여기서 '가온'은 '가운데'를 뜻하는 순우리말입니다. 가온길에는 일제강점기부터 한글을 지키는데 앞장서 온 한글학회와 한글을 널리 보급하는데 애쓰신 주시경 선생의 집터가 있으며, 2013년에는 이러한 업적을 기리기 위한 상징조형물 등을 조성하여 가온길의 의미를 더하였습니다.
한힌샘 주시경 스승
한글회관 건너편
웃음보따리 국어학자 주시경 선생
주시경 선생은 근대학문을 배운 지식인으로 민족정신을 높이기 위해 계몽운동, 국어운동, 국어연구를 했다. 학교를 돌아다니며 강의를 하느라 여러 교재를 보따리에 넣고 다녀서 별명이 '주보따리'였다. 어느 날, 한창 지리 수업을 하다 학생들이 졸자 주시경 선생은 교실 전체를 웃음바다로 만들어 졸음을 깨웠다. “여기는 고비사막이외다. 날씨는 더운데다가 길이 멀기도 멉니다. 상인들이 낙타를 몰고 지나가는 중이외다. 가도 가도 끝이 없습니다. 상인들은 그만 주저앉아 목을 놓아 울었습니다. 그래서 여기의 지명을 '울가(Urga)'라고 했지요.” 주시경 선생은 한국어와 한글을 과학적으로 연구한 최초의 언어학자이었다. 한국어와 한글의 표준화와 보급 운동을 민족 자주의 차원에서 전개한 불멸의 선각자이다.
주시경 선생은 근대학문을 배운 지식인으로 민족정신을 높이기 위해 계몽운동, 국어운동, 국어연구를 했다. 학교를 돌아다니며 강의를 하느라 여러 교재를 보따리에 넣고 다녀서 별명이 '주보따리'였다. 어느 날, 한창 지리 수업을 하다 학생들이 졸자 주시경 선생은 교실 전체를 웃음바다로 만들어 졸음을 깨웠다. “여기는 고비사막이외다. 날씨는 더운데다가 길이 멀기도 멉니다. 상인들이 낙타를 몰고 지나가는 중이외다. 가도 가도 끝이 없습니다. 상인들은 그만 주저앉아 목을 놓아 울었습니다. 그래서 여기의 지명을 '울가(Urga)'라고 했지요.” 주시경 선생은 한국어와 한글을 과학적으로 연구한 최초의 언어학자이었다. 한국어와 한글의 표준화와 보급 운동을 민족 자주의 차원에서 전개한 불멸의 선각자이다.
국어학자들의 얼로 살려낸 '조선말 큰 사전' 원고!
1908년 8월 31일 창립된 국어연구학회는 우리말과 글의 연구 발전을 목적으로 주시경 선생을 비롯하여 그 뜻을 같이 하는 김정진 등 유지들과 주시경 선생의 제자들이 함께 만들었다.
그 이후로 조선어연구회, 조선어학회, 한글학회로 이름을 바꾸어 지금까지도 한글의 발전을 위해 꾸준히 활동하고 있다. 1921년 조선어연구회는 일제의 조선어 말살 정책에 맞서 한글을 보존하기 위해 '조선어 큰 사전'을 만들었다. “조선말 큰 사전” 원고는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 재판의 증거물로 압수당했다. 하지만 조선어학회 회원들의 노력으로 1945년 9월 8일 경성역(지금의 서울역) 조선통운 창고에서 발견된다. 원고지 2만5천5백여 장 분량, 16만 단어, 13년 동안 손으로 쓴 17권의 원고는 피와 혼이 담긴 국어학자들의 유산이다.
한글, 임진왜란에서 암호로 활약하다.
임진왜란 때 왜군과 명나라가 잘 모르는 한글이 암호처럼 쓰이면서 민중들이 한글을 많이 쓰는 계기가 된다. 군사작전뿐만 아니라 선조 임금이 왜군을 피해 왕자를 피신시키려 할 때도 한글이 암호로 쓰였다. “강원도 중부에 있는 안변에서 비밀문서가 왔는데 금은과 호피 등의 물건을 왜군의 통역인을 통해 보내준다면 왕자의 탈출을 기도할 수 있다고 하니 비변사에게 알려라.”
전쟁 중에 한글로 소식을 주고받으면서 황실과 사대부들도 한글을 자주 사용하게 되었다.
1908년 8월 31일 창립된 국어연구학회는 우리말과 글의 연구 발전을 목적으로 주시경 선생을 비롯하여 그 뜻을 같이 하는 김정진 등 유지들과 주시경 선생의 제자들이 함께 만들었다.
그 이후로 조선어연구회, 조선어학회, 한글학회로 이름을 바꾸어 지금까지도 한글의 발전을 위해 꾸준히 활동하고 있다. 1921년 조선어연구회는 일제의 조선어 말살 정책에 맞서 한글을 보존하기 위해 '조선어 큰 사전'을 만들었다. “조선말 큰 사전” 원고는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 재판의 증거물로 압수당했다. 하지만 조선어학회 회원들의 노력으로 1945년 9월 8일 경성역(지금의 서울역) 조선통운 창고에서 발견된다. 원고지 2만5천5백여 장 분량, 16만 단어, 13년 동안 손으로 쓴 17권의 원고는 피와 혼이 담긴 국어학자들의 유산이다.
한글, 임진왜란에서 암호로 활약하다.
임진왜란 때 왜군과 명나라가 잘 모르는 한글이 암호처럼 쓰이면서 민중들이 한글을 많이 쓰는 계기가 된다. 군사작전뿐만 아니라 선조 임금이 왜군을 피해 왕자를 피신시키려 할 때도 한글이 암호로 쓰였다. “강원도 중부에 있는 안변에서 비밀문서가 왔는데 금은과 호피 등의 물건을 왜군의 통역인을 통해 보내준다면 왕자의 탈출을 기도할 수 있다고 하니 비변사에게 알려라.”
전쟁 중에 한글로 소식을 주고받으면서 황실과 사대부들도 한글을 자주 사용하게 되었다.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호머 헐버트
미국인 호머 헐버트는 최초의 순 한글 교과서를 만들었고 서재필과 최초의 한글신문인 '독립신문'을 창간하였으며 '아리랑'을 악보로 만들어 보급하는 등 한글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다. 그는 고종의 밀사로도 활약했으며 외국인 최초의 사회장(社會葬)으로 양화진 외국인 묘역에 안장되었다. 헐버트의 묘비에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다.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했고 자신의 조국보다 한국을 위한 헌신한······,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히는 것보다 한국 땅에 묻히길 원하노라.'
1896년 4월 7일을 기념하라
개화기에 대다수 신문은 한자로만 기사를 써서 민중들은 세상일을 알기 어려웠다. '독립신문'은 우리나라 최초 순수 한글신문으로 한자를 모르는 민중들을 계몽하고 나라 안팎의 일을 알리는 데에 힘썼다. 독립신문은 서재필이 정부의 지원을 받아 1896년 4월 7일에 창간했고, 자주독립, 애국심, 국가 발전, 교육, 생활 합리화, 민주주의, 남녀평등, 계급타파 등을 강조했다.
이러한 독립신문의 정신을 이어받아 매년 4월 7일을 '신문의 날'로 정해 기념하고 있다.
미국인 호머 헐버트는 최초의 순 한글 교과서를 만들었고 서재필과 최초의 한글신문인 '독립신문'을 창간하였으며 '아리랑'을 악보로 만들어 보급하는 등 한글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다. 그는 고종의 밀사로도 활약했으며 외국인 최초의 사회장(社會葬)으로 양화진 외국인 묘역에 안장되었다. 헐버트의 묘비에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다.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했고 자신의 조국보다 한국을 위한 헌신한······,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히는 것보다 한국 땅에 묻히길 원하노라.'
1896년 4월 7일을 기념하라
개화기에 대다수 신문은 한자로만 기사를 써서 민중들은 세상일을 알기 어려웠다. '독립신문'은 우리나라 최초 순수 한글신문으로 한자를 모르는 민중들을 계몽하고 나라 안팎의 일을 알리는 데에 힘썼다. 독립신문은 서재필이 정부의 지원을 받아 1896년 4월 7일에 창간했고, 자주독립, 애국심, 국가 발전, 교육, 생활 합리화, 민주주의, 남녀평등, 계급타파 등을 강조했다.
이러한 독립신문의 정신을 이어받아 매년 4월 7일을 '신문의 날'로 정해 기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