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서울특별시 용산구 후암동 304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서울 용산구 후암동 304 옛 고봉근 집터 인근 김상옥 의사 항거 터 안내판을 찾아가고 있다.
전생서터(典牲署址) / Site of Jeonsaengseo Office
전생서는 공중의 각종 제사때 쓸 가축을 이르는 일을 맡았던 조선시대의 관아이다. 460년 세조 때 고려시대의 장생서(掌牲署)를 계승한 관아인 전구서(典廐署)의 이름을 전생서로 바꾸고 이곳에 설치하였다. 1894년 갑오개혁 때 폐지되었다.
전생서는 공중의 각종 제사때 쓸 가축을 이르는 일을 맡았던 조선시대의 관아이다. 460년 세조 때 고려시대의 장생서(掌牲署)를 계승한 관아인 전구서(典廐署)의 이름을 전생서로 바꾸고 이곳에 설치하였다. 1894년 갑오개혁 때 폐지되었다.
주소상으로는 저 아래쪽 큰 건물 있는 곳인데...
김상옥 의사 항거 터
김상옥 의사 항거 터/ 金相玉 義士 抗拒 址
일제 강점기 김상옥 의사(金相玉 義士, 1889~1923)가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뒤 일본 경찰의 추격을 피해 몸을 숨기고 항거하였던 곳이다. 김상옥 의사는 야학 설립, 광복단 참여, 백영사 조직, 3.1운동 참여, 혁신단 활동, 암살단 조직 등 다양한 독립운동을 펼치다 암살단의 계획이 발각되자 상해로 망명하였다. 군자금 모집 등 독립운동을 지속하다 의열단에 가입하여 폭탄, 권총 등 무기를 지니고 1922년 12월 서울로 돌아왔다. 1923년 1월 12일 밤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뒤 이곳 후암동*(당시 명칭은 삼판통)에 있던 매제 고봉근의 집에 몸을 숨겼다. 1월 17일 새벽 일본 경찰이 들이닥쳐 홀로 격전을 펼치다 포위망을 뚫고 겨우 탈출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본인 형사부장을 사살하고 일본 경찰들에게 중상을 입혔다. 이후 효제동에 몸을 숨겼으나 1월 22일 다시 들이닥친 일본 경찰과 치열한 접전 끝에 순국하였다. 1962년 의사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 후암(厚岩)동이라는 이름은 마을에 두꺼운 바위가 있었던 데서 유래하였다. 일제 강점기 1914년에 행정구역 개편과 함께 삼판통(三坂通)으로 불렸다가 해방 후 1946년 후암(두텁바위)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일제 강점기 김상옥 의사(金相玉 義士, 1889~1923)가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뒤 일본 경찰의 추격을 피해 몸을 숨기고 항거하였던 곳이다. 김상옥 의사는 야학 설립, 광복단 참여, 백영사 조직, 3.1운동 참여, 혁신단 활동, 암살단 조직 등 다양한 독립운동을 펼치다 암살단의 계획이 발각되자 상해로 망명하였다. 군자금 모집 등 독립운동을 지속하다 의열단에 가입하여 폭탄, 권총 등 무기를 지니고 1922년 12월 서울로 돌아왔다. 1923년 1월 12일 밤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뒤 이곳 후암동*(당시 명칭은 삼판통)에 있던 매제 고봉근의 집에 몸을 숨겼다. 1월 17일 새벽 일본 경찰이 들이닥쳐 홀로 격전을 펼치다 포위망을 뚫고 겨우 탈출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본인 형사부장을 사살하고 일본 경찰들에게 중상을 입혔다. 이후 효제동에 몸을 숨겼으나 1월 22일 다시 들이닥친 일본 경찰과 치열한 접전 끝에 순국하였다. 1962년 의사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 후암(厚岩)동이라는 이름은 마을에 두꺼운 바위가 있었던 데서 유래하였다. 일제 강점기 1914년에 행정구역 개편과 함께 삼판통(三坂通)으로 불렸다가 해방 후 1946년 후암(두텁바위)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김상옥 의사 항거 터 / 金相玉 義士 抗拒 址
일제 강점기 김상옥 의사(金相玉 義士, 1889~1923)가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뒤 일본 경찰의 추격을 피해 몸을 숨기고 항거하였던 곳이다. 김상옥 의사는 야학 설립, 광복단 참여, 백영사 조직, 3.1운동 참여, 혁신단 활동, 암살단 조직 등 다양한 독립운동을 펼치다 암살단의 계획이 발각되자 상해로 망명하였다. 군자금 모집 등 독립운동을 지속하다 의열단에 가입하여 폭탄, 권총 등 무기를 지니고 1922년 12월 서울로 돌아왔다. 1923년 1월 12일 밤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뒤 이곳 후암동*(당시 명칭은 삼판통)에 있던 매제 고봉근의 집에 몸을 숨겼다. 1월 17일 새벽 일본 경찰이 들이닥쳐 홀로 격전을 펼치다 포위망을 뚫고 겨우 탈출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본인 형사부장을 사살하고 일본 경찰들에게 중상을 입혔다. 이후 효제동에 몸을 숨겼으나 1월 22일 다시 들이닥친 일본 경찰과 치열한 접전 끝에 순국하였다. 1962년 의사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 후암(厚岩)동이라는 이름은 마을에 두꺼운 바위가 있었던 데서 유래하였다. 일제 강점기 1914년에 행정구역 개편과 함께 삼판통(三坂通)으로 불렸다가 해방 후 1946년 후암(두텁바위)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일제 강점기 김상옥 의사(金相玉 義士, 1889~1923)가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뒤 일본 경찰의 추격을 피해 몸을 숨기고 항거하였던 곳이다. 김상옥 의사는 야학 설립, 광복단 참여, 백영사 조직, 3.1운동 참여, 혁신단 활동, 암살단 조직 등 다양한 독립운동을 펼치다 암살단의 계획이 발각되자 상해로 망명하였다. 군자금 모집 등 독립운동을 지속하다 의열단에 가입하여 폭탄, 권총 등 무기를 지니고 1922년 12월 서울로 돌아왔다. 1923년 1월 12일 밤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뒤 이곳 후암동*(당시 명칭은 삼판통)에 있던 매제 고봉근의 집에 몸을 숨겼다. 1월 17일 새벽 일본 경찰이 들이닥쳐 홀로 격전을 펼치다 포위망을 뚫고 겨우 탈출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본인 형사부장을 사살하고 일본 경찰들에게 중상을 입혔다. 이후 효제동에 몸을 숨겼으나 1월 22일 다시 들이닥친 일본 경찰과 치열한 접전 끝에 순국하였다. 1962년 의사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 후암(厚岩)동이라는 이름은 마을에 두꺼운 바위가 있었던 데서 유래하였다. 일제 강점기 1914년에 행정구역 개편과 함께 삼판통(三坂通)으로 불렸다가 해방 후 1946년 후암(두텁바위)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김상옥 1889~1923 | 독립운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