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 묘

4

주소
서울특별시 용산구 효창동 255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大韓民國臨時政府 主席 白凡 金九 之墓(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백범 김구 지묘)

이 곳은 조국 독립을 위해 일생을 바친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 김구 선생(1876~1949)의 묘역이다.
선생은 1876년에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나 일찍이 한학을 배웠고, 조선왕조의 부태에 항거하여 동학운동에 참여하였다.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국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 일본군 장교 스치다를 암살하고 이 나라에 충절 있음을 만천하에 알렸으며, 이로 인해 인천 감옥에 투옥되었다. 을사조약이 늑약되자 그 철폐를 위해 투쟁하였고, 신민회에 가입하여 국권 수호에 앞장섰으며, 민중을 계몽하기 위해 교육,강연 등의 애국계몽운동에 투신하였으나, 일제는 안악사건을 꾸며 다시 투옥, 서대문감옥과 인천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상하이로 망명,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경무국장과 내무총장, 국무령 등 주요 요직을 거쳐 주석에 이르렀으며. 한인애국단을 조직, 이봉창,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통해 임정의 위상을 크게 높였으니, 임시정부가 상하이에서 충칭으로 옮기면서 27년간 조국광복을 위한 중추적인 역할을 감당할 수 있었던 김구 선생에 힘입은 바 크다.
한편 한국독립당, 한국국민당을 조직하고 좌우합작운동에 노력하였으며,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여 조국광복을 위한 무장투쟁에도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1945년 해방을 맞아 환국하여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주도하면서 조국의 완전자주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미.소 등 강대국의 한국 분할정책에 맞섰다.
남과 북이 각각 단독정부를 수립을 위하여 1948년 총선거를 실시하려고 하자, 이것이 곧 민족분열과 동족상잔을 가져올 것임을 예견하고, 이를 막아 자주적인 통일국가를 세우고자 남북협상에 앞장섰다. 남북에서 분단정부가 수립된 후에도 민족통일·자주독립 운동을 전개하던 중, 1949년 6월 26일 경교장에서 흉한에 의해 쓰러지니, 7월 5일 온 민족의 존경과 애도를 담아 국민장으로 이곳에 봉안하였다.
1924년 중국에서 먼저 돌아가신 부인 최준례 여사와 1999년 4월 12일 합장하였다.
백범 김구 선생은 사천이백구년 병자 음 칠월 십일일 자시 해주 백운방터꼴 안동 김순영 현풍 곽낙원의 외아들로 나 해주 최준례 맞어 인, 신 형제 두니라. 글을 즐겨 십칠세에 과거보다. 아버님 임종에 살어여 먹이더니 늙어도 어머님 가르침 받더라. 의에 굳음이 인격의 터러라. 갑오동학란에 선봉장으로 해주성치니 십구세라. 선비 고능선께 충의 배우다. 이십일세 치하포의 한 칼로 국모 원수 갚고 사형 받더니 광무황제 분부로 살아 중 되니라. 이십오세 예수 믿어 새교육 이르키며 신민회 하다. 삼십육세 안명근 일과 양긔탁 일에 걸려 십칠년형 지다가 오년만에 나오다. 긔미 삼일운동에 상해 나가 우리 정부 문직이 원하니 사십사세라. 오십이세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되어 끝내 태극긔를 지키다. 오십오세 한국독립당 꾸며 이끌다. 오십육세 한인애국단 만드니 이듬해 이봉창 윤봉길 만나다. 이에 중국 장개석 주석과 알아 국빈 대접받다. 이차대전으로 정부와 동지를 중경 옮기니 육십삼세라. 육십오세 한국광복군 꾸며 훈련하다. 육십칠세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으로 일본에 선전하다. 카이로 회담에 장개석 주석이 우리 독립 말하니라. 을유 팔일오 해방으로 갈린 만세 속에 서울오니 칠십세라. 그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으로 반탁운동 일으키다. 국민의회 이끌어 미소군정 말고 우리 정부 종하다. 칠십삼세 평양 남북 협상에 화평통일 웨치다. 백범일지의 나의 소원은 민족의 말이러라. 긔축 유월 이십육일 오시 서울 경교장 서실에서 총 맞으니 칠십사세라. 항공 중령 신이 이으니 한 간 집 한 뙈기 밭 물림 없더라. 국민장의로 칠월 오일 서울 효창원에 모시니 태백의 정긔가 서리더라.
단긔 사천이백팔십이년 십일월 이십사일 백범 김구 선생 국민장위원회 세움
서기 일천구백십구년 사월 십이일 부인 최준례 여사와 합장
김구 선생 묘소에서 다시 의열사 쪽을 내려와 삼의사 묘소 방향으로 가면서..
백범(白帆) 김구(金九) 선생의 묘(墓) / The Tomb of Kim Koo
이 곳은 조국 독립을 위해 일생을 바친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 김구 선생(1876~1949)의 묘역이다.
선생은 1876년에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나 일찍이 한학을 배웠고, 조선왕조의 부태에 항거하여 동학운동에 참여하였다.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국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 일본군 장교 스치다를 암살하고 이 나라에 충절 있음을 만천하에 알렸으며, 이로 인해 인천 감옥에 투옥되었다. 을사조약이 늑약되자 그 철폐를 위해 투쟁하였고, 신민회에 가입하여 국권 수호에 앞장섰으며, 민중을 계몽하기 위해 교육,강연 등의 애국계몽운동에 투신하였으나, 일제는 안악사건을 꾸며 다시 투옥, 서대문감옥과 인천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상하이로 망명,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경무국장과 내무총장, 국무령 등 주요 요직을 거쳐 주석에 이르렀으며. 한인애국단을 조직, 이봉창,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통해 임정의 위상을 크게 높였으니, 임시정부가 상하이에서 충칭으로 옮기면서 27년간 조국광복을 위한 중추적인 역할을 감당할 수 있었던 김구 선생에 힘입은 바 크다.
한편 한국독립당, 한국국민당을 조직하고 좌우합작운동에 노력하였으며,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여 조국광복을 위한 무장투쟁에도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1945년 해방을 맞아 환국하여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주도하면서 조국의 완전자주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미.소 등 강대국의 한국 분할정책에 맞섰다.
남과 북이 각각 단독정부를 수립을 위하여 1948년 총선거를 실시하려고 하자, 이것이 곧 민족분열과 동족상잔을 가져올 것임을 예견하고, 이를 막아 자주적인 통일국가를 세우고자 남북협상에 앞장섰다. 남북에서 분단정부가 수립된 후에도 민족통일·자주독립 운동을 전개하던 중, 1949년 6월 26일 경교장에서 흉한에 의해 쓰러지니, 7월 5일 온 민족의 존경과 애도를 담아 국민장으로 이곳에 봉안하였다.
1924년 중국에서 먼저 돌아가신 부인 최준례 여사와 1999년 4월 12일 합장하였다.
노 부부가 김구 선생께 예를 드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