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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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서울특별시 용산구 청파동2가 42-8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일제는 왜 한반도를 침략했을까
19세기는 야만의 시대였다. 유럽의 여러 나라는 더 많은 식민지를 갖기 위해 경쟁했다. 문명과 근대라는 이름으로 폭력과 약탈, 학살을 저질렀다. 아프리카 노예의 눈물은 산업혁명을 위한 기름이 되었고, 아메리카의 사탕수수와 면화는 유럽을 살찌우는 거름이 되었다. 그 결과 유럽 제국주의 국가들은 20세기 초 세계 대륙의 4분의 1을 차지했다. 동아시아도 제국주의의 침략을 피하지 못했다. 19세기 중후반 청국은 영국과 아편전쟁을, 프랑스와 청불전쟁을 치른 뒤 서구 열강의 반식민지 상태로 떨어졌다. 반면 일본은 발 빠르게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을 따라 대륙침략의 길을 선택했다.
'메이지유신' 1868을 통해 군사력을 키운 일제는 열도 북쪽 아이누모시리(지금 홋카이도, 사할린 등)와 남쪽 류큐(지금 오키나와)를 강제로 점령해 자국 영토를 늘렸다. 이어 타이완(1874)과 조선을 침략해(운요호사건. 1875) 식민지 지배의 발판을 마련했다. 1895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그 대가로 타이완을 식민지로 삼았고, 막대한 전쟁배상금으로 급속한 근대화를 추진했다. 이후 50년 동안 아시아·태평양 지역은 일제의 침략전쟁과 학살로 붉게 물들었다. 조선은 일제로부터 강제 개항(강화도조약 1876)을 시작으로 서양 여러 나라와 불평등조약을 맺으며 근대세계체제로 휩쓸려 들어갔다. 조선은 일제의 군사적 침략과 서구 열강의 틈새에서 시름하다 20세기에 들어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제국의 전쟁터가 된 한반도

일제는 1894년 동학농민운동을 빌미로 군대를 파병해 경복궁을 무력으로 점령했다. 조선 정부를 제멋대로 주무르기 위해서였다. 곧이어 청국과 전쟁을 일으켰다. 한반도는 두 나라의 전쟁터가 되었고, 동학농민군은 일본군에 맞서 싸웠지만 그들의 신식 무기에 수만 명이 희생당했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청국의 영향력을 조선에서 걷어내고 타이완을 식민지로 차지했다. 조선의 보호국화와 랴오둥 반도의 할양도 원했으나 러시아·프랑스·독일의 삼국 간섭으로 실패했다. 이후 조선 정부가 러시아 를 통해 일제를 견제하려고 하자 그들은 왕후를 암살하는 만행까지 저질렀다.(을미사변, 1895)
일제는 한반도를 둘러싸고 러시아와 날카롭게 대립했다. 조선은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대한제국 성립을 선포(1897)하고 중립국의 지위를 확보하려 했다. 그러나 국민의 생존권과 직결된 각종 이권은 제국주의 국가들의 손에 넘어갔다.
일제는 '동양 평화'를 명분으로 러시아와 전쟁을 감행했다. 그러나 속뜻은 한반도의 독점적 지배와 만주의 이권을 얻기 위해서였다. 한반도는 또다시 외국 군대의 전쟁터가 되었다. 러일전쟁은 영국과 미국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은 일본의 승리로 끝났다. 이미 대한제국을 보호국으로 만들겠다고 결정한 일제는 러일전쟁의 승리로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보호국화를 최종 승인받기에 이른다.
'천황'의 대리자, 조선총독

1910년 8월 22일 일본군이 한성의 각 성문과 왕궁을 에워싸고 삼엄한 경비를 펼치는 가운데, '강제병합조약'이 비밀리에 체결되었다. 8월 29일 「한국병합에 관한 조약」이 공포되면서 한국은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대한제국의 황실과 ‘병합에 공로가 있는’ 친일파는 대한제국의 주권과 영토, 국민을 완전히 그리고 영구히 일본 '천황'에게 넘겨주는 대가로 영예롭고 윤택한 생활을 제공받았다. 일제는 식민지 지배를 인정하고 새로운 지배자의 법을 따르는 자에게 신체와 재산의 보호를 보장했다. 그러나 일제에 맞선 의병전쟁은 1915년까지 계속 이어졌고, 20년간의 항쟁에서 의로운 민중 15만 명 이상이 순국했다. 일제의 한국 강점 과정은 일방적 군사 침략이나 다름없었다.
허수아비나 다름없던 한국 황제가 물러나고 통감에 이어 일본인 총독이 모든 실권을 장악했다. 일본 '천황'이 직접 임명하는 조선총독은 '천황'을 대리해 식민지 조선을 지배하는 최고 지배자였다. 총독의 명령은 곧 법이었고, 일반 정부는 물론 군대 통솔권도 가졌다. 오직 '천황'에게만 책임을 질 뿐 일본 내각의 간섭을 받지 않아 '소천황'이라 불리는 절대군주의 지위를 누렸다.
강제병합에 이른 역사적 장면으로 구성한 주사위놀이판
일본 쿄토의 『히노데신문』에서 1911년 신쳔 특별 부록으로 배포했다. '강제병합'조서를 읽고 있는 데라루치 초대 조선총독 그림에 먼저 도착하면 이기는 놀이다. 고대부터 '강제병합'까지 조선 침략과 관련한 주요 인물과 사건들의 놀이의 소재로 삼아 식민 지배가 자연스러운 역사적 흐름임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고위직은 일본인, 말단직은 조선인
■ 일본인: 79,689명, ■ 조선인 : 80,762명
조선총독은 모두 군인 출신!

◆ 3대 통감. 1대 총독 ··· 육군대장 〉 데라우치 마사타케 〉 총리대신
◆ 2대 총독 ··· 육군원수 〉 하세가와 요시미치 〉 3.1운동으로 해임
◆ 3대·5대 총독 ··· 해군대장 〉 사이토 마코토 〉 총리대신, 외무대신
◆ 4대 총독 ··· 육군대장 〉 야마나시 한조 〉 뇌물사건으로 사임
◆ 6대 총독 ··· 육군대장 〉 우가키 가즈시게 〉 외무대신
◆ 7대 총독 ··· 육군대장 〉 미나미 지로 〉 추밀원 [극동국제군사재판, 종신형]
◆ 8대 총독 ··· 육군대장 〉 고이소 구니아키 〉 총리대신 [극동국제군사재판, 종신형]
◆ 9대 총독 ··· 육군대장, 총리대신 〉 아베 노부유키 〉 패전으로 해임

외솔 최현배선생 기념비

외솔최현배
을사5적, 정미7적, 경술국적
이완용, 박제순, 권중현, 이지용, 이근택, 조중응, 고영희, 이병무, 임선준, 이재곤, 송병준, 민병석, 윤덕영, 김윤식, 이재면
한국병합기념화보
한국병합기념화보?
「병합기념화보」는 강제병합으로부터 한 달 후인 1910년 9월 28일자에 발행된 '오사카신보(大板新報)'의 특별부록으로 제작되었다.
일제의 최고 권력자 '메이지천황' 무쓰히토(1852-1912) 사진을 중앙 상단에 실었다. 그 밑에 고종 태황제(1852-1919)와 순종황제(1874-1926)의 사진을 나란히 게재했다. 고종 태황제는 '이태왕', 순종황제는 '이왕'으로 표기했다. 강제병합과 동시에 한국의 황제·황족을 왕족·공족으로 전락시키고 519년 동안 27대에 걸쳐 이어온 조선왕조를 폐망시켰음을 각인시키기 위한 구도이자 표기라 할 수 있다.
상단 좌우에는 강화도조약을 체결해 조선을 강제 개항시킨 이노우에 가오루를 필두로 주권침탈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와 역대 통감 등 조선 침략의 주범들과 강제병합의 주범들의 사진을 먼저 실었다. 그 밑에 조선황실 종친들과 개화파 김옥균(1851-1894), 박영효(1861-1939), 을사늑약과 병합조약을 주도한 이완용(1858-1926), 이지용(1870-1928) 등 주요 관리들의 사진을 게재했다.
침략, 강제병합의 주범이면서도 상단 사진에 빠진 이들도 있다. 1873년 정한 논쟁 당시 사이고 다카모리, 이타가키 다이스케 등과 대립한 오쿠보 도시미치(1830-1878), 기도 타카요시(1833-1877) 등이다.
조선 침략의 주범들

이노우에 가오루+ 후쿠자와 유키치+ 사이고 다카모리 + 미우라 고로 + 야마가타 아리토모+ 무쓰 미네미쓰 + 하라다카시 +
구로다 기요타카+ 이타가키 다이스케+ 오토리 게이스케+ 다케조에 신이치료+ 하나부사 요시모토+ 이노우에 가쿠고로+
조선 강점의 수행자들

이토 히로부미 + 메가타 다네타로 + 아카시모토지+ 스티븐스 + 데라우치 마사타케+ 하세가와 요시미치+
고무라 쥬타로+ 시부사와 에이이치+ 하야시 곤스케+ 소네 아라스케+ 우치다 료헤이 + 야마가타 이사부로+
한눈에 보는 러일전쟁 지도. 러일전쟁 당시 주요 군사거점을 한눈에 볼 수 있다. 한국을 마치 일본의 영토처럼 같은 색으로 묘사했다. 경부선도 완성과 미완성 구간을 구분해 자세히 표시했다. 이 철도가 일제 침략전쟁을 위한 철도임을 보여준다.
청일전쟁 주사위놀이판.
육군은 히로시마에서, 해군은 나가사키에서 출발해 먼저 베이징에 도착하는 이기는 놀이다. 한반도와 주변 바다가 일제의 전쟁놀이터인 셈이다. 놀이판이 제작된 11월에 일본군은 뤼순을 공격하여 승리를 이어가고 있었다.
청일전쟁의 시작을 알린 일본군의 경복궁 침략
1894년 7월 23일 조선군과 전투를 벌이며 경복궁에 입성하는 오토리(大鳥圭介) 공사를 묘사했다. 조선정부의 철병 요구를 묵살한 일제는 치밀한 작전에 따라 경복궁과 서울 핵심지역을 점령했다. 이후 친일내각을 세우고 내정 개혁에 간섭했다.
안성에서 벌어진 청일 전투
1894년 7월 29일 안성 전투 장면이다. '군신'으로 불린 마쓰자키 대위를 중심으로 근대식 제복을 갖춘 일본군을 쫓기는 청군과 대조적으로 묘사했다. 나부끼는 욱일기와 희미하게 보이는 청국 깃발이 두 나라의 엇갈린 운명을 보여준다.
일제의 침략전쟁, 조선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일제는 1931년 만주 침략에 이어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켰다. 1940년에는 구미의 식민지 지배로부터 동아시아 해방과 일제를 맹주로 한 '대동아공영권 건설을 선언했다. 곧이어 이듬해 태평양전쟁을 일으켜 아시아와 태평양 지역을 죽음의 전쟁터로 만들었다.
일제는 중국을 전면적으로 침략하면서 자국뿐만 아니라 식민지 조선, 타이완까지 침략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총동원체제로 재편했다. 모든 조선인을 대상으로 군대조직과 같은 동원기구를 조선 전역에 배치했다. 사상통제를 강화하여 일제의 저항을 탄압했으며 조선인의 민족정체성을 파괴하기 위한 황국신민화 정책을 추진했다. 그리고 전쟁에 필요한 재정과 물자동원과 함께 부족해진 노동력과 병력을 보충하기 위해 최소 120만 명에 이르는 조선인들을 전쟁터의 총알받이로, 군수공장의 노동자로 끌어갔다.

외솔 최현배선생 기념비

외솔최현배
'천황'을 위해 기쁘게 목숨을 바쳐라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내선일체(일본과 조선의 일체화)'를 통치 목표로 내걸고 조선인들을 침략전쟁에 '자발적으로' 협력시키기 위한 황국 신민화 정책을 밀어붙였다.
일제는 곳곳에 '신사'를 만들어 '천황'을 '신'으로 받들고 '천황'을 위해 기쁘게 목숨을 바치도록 '천황의 백성'이라는 의식을 주입했다. 신사참배와 황국신민서사 암송을 강요했고, 일본식으로 이름을 바꾸는 '창씨개명'도 시행했다. 우리말 사용을 금지하고 한글 잡지와 신문을 폐간시키며 일본어만 쓰도록 강제했다. 우리 역사에 대한 교육과 연구도 하지 못하게 해, 조선 민족의 고유성을 말살하고자 했다.
조선총독부는 학교에서도 국체명징('천황' 중심의 국가체제를 분명히 함)·내선 일체·인고단련(어려움을 참고 단련함)을 앞세워 황국신민화 교육을 추진했다. 학교는 군사훈련장으로 바뀌었고 학생들은 군수물자를 생산하는 일에 동원되었다. 군사교육을 강조하여 교과교육 대신 교련과 근로보국 활동을 중시했다. 1941년 3월에는 소학교를 국민학교로 고치고 조선의 어린이들을 군국주의의 소년전사로 육성하여 미래의 충실한 '황군'으로 육성하려 했다.

외솔 최현배선생 기념비

외솔최현배
황국신민서사

아동용
1. 우리는 대일본제국의 신민입니다.
2. 우리는 마음을 모아 천황폐하에게 충의(忠義)를 다합니다.
3. 우리는 어려움을 참고 단련하여 훌륭하고 강한 국민이 되겠습니다.
일반인용
1. 우리는 황국신민이다. 충성으로써 군국(君國)에 보답한다.
2. 우리들 황국신민은 서로 믿고 아끼고 협력하여 단결을 공고히 한다.
3. 우리들 황국 신민은 어려움을 참고 단련하는 힘을 길러 황도(皇道)를 선양한다.
청춘만장 앞세우고 끌려간 사람들

일제 침략전쟁이 길어지자 조선인 청장년이면 누구나 탄광·토목 노동자나 전쟁터의 총알받이로 끌려가야만 했다. 일본, 중국, 사할린, 남양군도 등에 동원된 노동자들은 최소 72만 명 이상이었다. 조선인 노동자는 차별적이고 폭압적인 대우를 받았다. 항상 감시받았고 도주하다 잡히면 죽을 만큼 맞았다. 대부분 비위생적이고 위험한 현장에 배치되어 일본인보다 사고율· 사망률이 훨씬 높았다. 각종 명목으로 임금을 공제하거나 강제로 저축시켜 집안의 대들보와 같은 아들과 남편을 빼앗긴 가족들은 극심한 생활고를 겪었다.
병력동원은 1938년부터 지원병(육군·해군·학병)이라는 이름으로 시작되었으나 실상은 행정기관에 의한 강제동원이었다. 1944년 8월부터 시행된 징병 대상은 1924년생이었다. '묻지마라 갑자생'이라 불린 이들은 군속 등 징용, 포로감시원, 지원병이 아니면 징병으로 끌려갈 불행한 운명에 처했다. 군인·군속으로 동원된 40만 명 이상의 청년들 가운데 2만 1천여 명이 희생당했다. 널리 알려졌듯이 수 만 명의 여성들도 여자근로정신대와 일본군 '위안부'로 동원되어 강제노동과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당하는 피해를 입었다.
나라를 팔아 부귀영화를 누린 그들

친일파는 부일협력자와 민족반역자 모두를 일컫는다. "을사조약 전후부터 1945년 8월 15일 해방에 이르기까지 일제의 국권 침탈, 식민통치,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함으로써 우리 민족 또는 타 민족에게 신체적·물리적·정신적으로 직간접적 피해를 끼친 자" 『친일인명사전』를 말한다.
이들 중에서도 1910년 8월 일제 강제병합 전후 자신의 출세를 위해 나라를 팔아넘긴 자들이 첫째로 꼽힌다. 이들은 일제 편에 서서 각종 조약 체결에 적극 가담한 자로서, 당시 민중에게 을사5적·정미7적·경술국적으로 비난받았다. 이들을 포함해 68명이 일제로부터 귀족 작위와 막대한 은사공채를 받았고 그 작위와 부는 후손에게 세습되었다. 이들은 일제의 식민통치에 적극 협력하며 각종 이권에 개입해 재물을 축적했다.
강제병합 이후 이들 대부분은 조선총독의 자문기구이자 최고의 대우를 받는 중추원 위원에 임용되었다. 온 민족이 일어나 독립을 외칠 때 이들은 민중을 비웃었다. 일제강점 40여 년 동안 치욕의 망국사에는 이들과 같이 권력을 유지하고 재산을 축적하려던 친일 매국노들이 있었다.
대를 이어 영화를 누린 친일패밀리 윤치호 일가
윤웅렬(1840-1911)*●남작, 군부법부대신
윤치호(1865-1945)*●중추원 고문, 중일전쟁 후 적극적 친일
윤치왕(1895-1982) 영국 글라스고 의대졸. 해방 후 서울대 의대 제2부속병원장
윤치창(1899-1973) 미국 시카고대 졸. 해방 후 초대 주영공사, 터키대사
윤영선(1896-1988) 해방 후 농림부 장관
윤영렬(1854-1939) 안성군수, 육군참장
윤치오(1869-1949)*●중추원 찬의. 중추원 참의. 김윤정의 딸과 혼인
윤치소(1871-1944)*●중추원 참의. '황국신민의십자군'을 기치로 내건 조선기독교연합회 평의원
윤치성(1875-1936) 일본 육사 11기(1899) 졸업
윤치영(1898-1996)* 조선임전보국단 평의원. 해방 후 초대 내무부장관, 국회부의장, 공화당의장, 서울시장
윤일선(1896-1986) 해방 후 서울대 총장
윤명선(1900-1946)*●만주국 젠다오성 차장. 중추원 참의 김갑순의 장녀와 혼인. 만주국 건국공로훈장
윤보선(1897-1990) 해방 후 4대 대통령

* 표시는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 표시는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 발표 친일인사
대를 이어 영화를 누린 친일패밀리 윤치호 일가
한말부터 일제강점기를 거쳐 대한민국에 이르기까지 부귀영화를 누린 가문으로 단연 윤치호 일가가 최고이다. 해평 윤씨 일가의 영화는 윤웅렬에서 시작하였다. 그는 일제로부터 남작 작위와 은사공채를 받았고, 3형제를 모두 유학 보낼 정도로 재력을 갖추었다. 해방 후에도 윤웅렬의 자식들은 대사, 병원장을 지냈다. 동생 윤영렬의 아들은 일제 중추원 찬의와 참의를 지냈고, 각종 친일단체에서 활동했다.
해방 후 그의 아들 중 한 명은 민주공화당 의장을 지냈고, 손자 중에는 대통령, 서울대총장, 국립의료원원장이 나왔다. 대한민국을 주름잡은 로열패밀리라고 할 만하다. 그러나 윤치호 일가에서 독립운동유공자는 단 한 명도 배출되지 않았다.
가만 있으라! '독립불가론'을 주장한 친일파들
3.1운동이 일어나자 친일파들은 신문지상에 앞 다투어 글을 발표했다. 3.1운동 참가자들을 회유하고 협박하여 독립의지를 꺽기 위한 내용이었다. 이들은 친일지주와 유지들을 모아 '자제단(自制團)'을 조직하여 3.1운동을 방해했다.
이완용은 조선총독부와 3.1운동 진압방안을 논의하면서, 해산 권유, 일본군의 증파, 시위자들에 대한 '공격 및 살해' 등을 건의했다.
[이완용] "사리를 분별치 못하고 나라의 정세를 알지 못하는 자의 경거망동으로서 일선동화의 결실을 손실하게 하는 근원이다!"
[윤치호] "약자가 취할 최선의 방책은 강자의 호감을 사는 것이다."
[박중양] "국민이 독립생활의 능력이 없으면 국가가 부강할 도리가 없다. 독립만세를 천번 만번 외친다고 해도 만세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다."
취운정의 빛과 그림자
서울 종로구 가회동에서 삼청동으로 넘어가는 곳에 있던 정자 취운정. 이곳은 갑신정변 주역들이 모여 내외 정세를 토론하던 곳이자,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후에도 많은 지사들이 나라를 걱정하며 모이던 곳이다. 이곳에서 1909년 7월 13일 10시, 전혀 다른 시회(詩會)가 열렸다. 7월 6일 일본정부가 '한국병합' 방침을 결정하고, 7월 12일 사법권마저 강탈한 바로 다음 날 경성 한복판에서 '한국병합'의 기초를 닦은 이토를 찬양하는 시모임이 열린 것이다. 각부 대신과 고위관민들이 모여 전직 통감 이토를 추앙하고 여흥을 즐겼다.

春翁七十氣昻然 춘옹(이토 히로부미)은 칠십 노인이면서도 기세가 높아
活佛身兼到上仙 살아있는 부처요 하늘에 오른 신선이라.
誰識平生勞苦意 평생 수고한 뜻을 누가 알리오
只憂西勢漸東邊 다만 근심하는 것은 서양의 세력이 동쪽으로 밀려옴이라.
時 隆熙三年 七月 於京城翠雲亭 賦別 伊藤公舜 一絶 書爲井上君雅囑 韓國從一品 農相 趙重應
융희 3년 7월, 경성의 취운정에서 이토공과 이별하며 절구 한수를 지었다.
이노우에 군께서 부탁을 해서 썼다.
한국 종1품 농상 조중응
출세길의 으뜸, 일본육군사관학교
식민지 청년이 출세하는 최고의 지름길은 일본군 장교가 되는 것이었다.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마치고 소위가 되면 바로 고등관 8등이었고, 중위로 진급하면 군수와 같은 수준으로 파격적인 대우를 받았다.
일제 강점 35년 동안 일본군 장교로 임관한 조선인은 강제병합 때 입학시킨 한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학생 33명을 합쳐도 67명뿐이다. 만주군관학교 출신 66명을 포함해도 1년 평균 3.8명만이 들어갈 수 있는 출세의 꽃길이었다. 해방 후에는 대한민국 국군 창설을 주도했고, 1961년 5.16군사쿠데타 주역으로서 이후 정부 요직을 차지했다.
망국의 한, 독립의 꿈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애국지사들은 의병전쟁에 나서거나 애국계몽 운동으로 민족의 실력을 키워 국권을 지키고자 했다. 일제의 탄압으로 국내 활동이 불가능해지자 간도와 연해주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고 항쟁을 이어갔다.
1919년 3월 1일 우리 민족은 세계에 독립을 선언하고 만세 시위를 벌였다. 일제가 총칼로 짓밟았지만 극소수 친일파를 제외하고 전 민족이 일어난 만세시위는 3개월이 넘도록 이어졌다. 식민지 조선인들은 민족의식을 자각하고 민주주의를 체험하며 자유와 평등에 대한 열망을 키워나갔다.
3·1운동 결과 입헌공화제를 표방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고, 간도와 연해주의 독립군들은 무장투쟁을 벌였다. '암살과 파괴'로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한 의열단 활동이 본격화 되었다. 사회주의사상의 확산과 함께 노동자, 농민, 청년, 여성단체가 중심이 된 대중운동이 활발해져 민족 해방운동의 열기는 더욱 높아졌다.
일제가 1931년부터 중국대륙을 침략하자 만주의 항일세력들은 중국인들과도 힘을 합쳐 일본군에 맞섰다. 국내에서는 노동자·농민들이 일제의 수탈과 착취에 대항해 파업투쟁과 소작쟁의를 일으켰다.
일제가 아시아태평양전쟁까지 도발하자 애국지사들은 일제의 패망을 예상 하고 최후의 결전을 준비했다. 한국광복군은 미국·영국 등 연합군과 합동 작전을 폈고, 조선의용군은 팔로군과 함께 전투에 나섰다. 다양한 독립운동 진영은 민족의 역량을 하나로 묶어 해방을 준비했다. 독립의 그 순간까지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노예로 살기보다
자유로운 인간으로서 죽는 편이 훨씬 낫다."
- 군대 해산 직후 경기도 양평에서 만난 의병과의 인터뷰
프레드릭 멕켄지, 『한국의 비극 THE TRAGEDY OF KOREA』, 1908

다시 일어나 나라를 되자! 신흥무관학교
1911년 6월 이회영 이동녕 이상룡이 세운 신흥강습소는 일제의 탄압을 피해 서간도로 찾아오는 청년들이 늘어나자 1912년 7월 '신흥무관학교'로 새 출발했다. 1920년 8월까지 신흥무관학교는 3,500명의 독립투사를 배출했다. 봉오동 청산리대첩을 비롯해 일제에 맞선 전투 현장에는 언제나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 있었다. 그들은 조국광복을 위해 누구보다도 앞장서며 독립운동의 주역으로 활동했다.

신흥무관학교를 찾아 국경을 넘다
1919년 가을, 나는 만주에 있는 군관학교를 찾아가 독립군이 되기로 결심하고 몰래 압록강을 건넜다. 내가 학교에 들어가려고 하자 사람 들은 겨우 15살 밖에 안된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나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아서 엉엉 울었다. 학교는 산 속에 있었으며 18개의 교실이 줄지어 있었다. 18살에서 30살까지 학생이 100명 가까이 입학하였다. 일과는 새벽 4시에 시작하여, 취침은 저녁 9시에 하였다. 우리들은 군대전술을 공부하고, 총기 훈련도 받았다. 자유를 위해서라면 무슨 일인들 못할쏘냐? -김산·님 웨일즈, 「아리랑」 중에서
3대에 걸쳐 9명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항일명가
나라가 일제 식민지로 전락하자 이상룡은 1911년 1월 모든 재산을 처분해 일가족을 이끌고 서간도로 망명했다. 각지에서 망명한 애국지사들은 서간도에 모여 자치단체를 만들고 독립군을 길러내는 신흥무관학교의 기틀을 마련했다.

이승목 부친(1837-1873)
이승화 당숙(1876-1927)
경학사, 신흥무관학교, 서로군정서 활동 / 1990 애족장
이상룡(1858-1932)
경학사, 신흥무관학교, 서로군정서 조직,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령 / 1962 독립장
이상동 동생(1865-1951)
안동3·1만세운동 / 1990 애족장
이봉희 동생(1868-1937)
신흥무관학교 교장 / 1990 독립장
이준형 아들(1875-1942)
서로군정서 활동 / 1990 애족장
이형국 조카(1883-1931)
신흥무관학교 졸업 후 군자금 모집 / 1990 애족장
이운형 조카(1892-1972)
서로군정서 활동, 비밀특파원 활동 / 1990 애족장
이광민 조카(1895-1945)
신흥무관학교 졸업 후 정의부 활동, 군자금 모집 / 1990 독립장
이병화 손자(1906-1952)
통의부 활동, 경찰주재소 습격 / 1990 독립장

이상룡 집안의 사위들도 독립유공자

이상룡의 종고모부 - 김도화 애국장(1990)
이상룡의 사위 - 강호석 애족장(2011)
이상룡의 매부 - 박경종 애족장(1990)
동생 이상동의 사위 - 김태동 대통령표창(2003)

이상룡 집안의 여성들도 독립운동가

이상룡의 부인 - 김우락 애족장(2019)
이상룡의 손부 - 허은 애족장(2018)
적에게 배워 적을 이기는 독립군이 되다
일제강점기 일본육군사관학교 출신자 가운데 독립운동에 뛰어든 이들이 있었다.
김경천은 1910년 일본 육사를 졸업한 후 일본 기병장교로 지내다가 1919년 독립 선언이 나오자 지청천과 함께 만주로 망명했다. 신흥 무관학교에서 독립군 양성에 힘을 쏟았던 그는 러시아령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하여 항일독립전쟁에 평생을 바쳐 시베리아의 전설로 남았다.
일본 병서와 군용지도를 가지고 망명한 지청천은 신흥무관학교에서 근대적 군사지식을 활용해 독립군을 키웠다. 서로군정서를 지휘하고, 중국군과 연합작전을 펴 일본군을 격파하는 등 항일무장투쟁의 최전선에서 활용했다. 1940년 한국광복군 창설에 참여하여 총사령관을 맡았다.
島山 先生 略史(도산 선생 약사)
도산 선생 약사
島山 先生 略史, 1932.8
1932년 4월 윤봉길 의거와 관련하여 안창호가 체포되자 임시정부의 국무위원 차리석이 체포 경위와 안창호의 일생을 중국어로 정리해 등사판으로 펴낸 것이다.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의회경과록(大韓民國臨時議政院議會經過錄)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의회경과록
大韓民國臨時議政院議會經過錄, 1943.5
1942년 10월 중국 충칭에서 개최됐던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제34회 의회 소식 등이 담겨 있는 문서이다. 1942년 11월 '우리 통신사'가 발간한 것을 1943년 5월 미국 로스앤젤레스 조선민 족혁명당 미주지부가 다시 발간했다. '미국시민과 조선동포에게' '대한민국임시정부 건국강령' '조선민족혁명당의 기본강령과 활동강령' 등 독립운동의 중요한 문헌이 실려 있다.
조선민족혁명당 미주지부
천재의 변절, 일제의 나팔수가 된 이광수와 최남선
"내가 가야마(香山)라고 씨를 창설하고 미쓰로(光郞)라고 일본적인 이름으로 개명한 동기는 황송한 말쓰이나 천황어명과 독법(읽는 법)을 같이 하는 씨명을 가지자는 것이다. 나는 깊이깊이 내 자손과 조선 민족의 장래를 고려한 끝에 이리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굳음 신념에 도달한 까닭이다. 나는 천황의 신민이다. 내 자손도 천황의 신민으로 살 것이다. 이광수라는 씨명은 천황의 신민이 못 될 것이 아니다. 그러나 가야마 미쓰로(香山光郞)가 조금 더 천황의 신민답다고 하는 믿기 때문이다" - 「창씨와 나」 『매일신보』 1940.2.20.
제군! 대동아의 성전은 이름 비록 동아이지만 이는 실로 신시대 신문화의 창조운동이며 세계 역사의 개조이다. 바라건대 일본 국민으로서의 충성과 조선 남아의 의기를 바로하여 부여된 광영의 이 기회를 분발 용약하여 한사람도 빠짐없이 출진하기를 바라는 바이다. - 최남선, 「가라! 청년학도여」 『매일신보』 1943.11.20.

제자를 전쟁터로 내몬 친일 교육가
의무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라. 우리가 당면한 의무는 새로운 여명을 맞이하여 인류 역사에 위대한 사업을 건설하려는 대동아성전에 대한제국과 우리 반도 동포가 가지고 있는 의무이다. 이 임무를 수행할 절호의 기회가 지금 이 순간 우리 앞에 열린 것이다. - 김성수 「황민됨의 책무는 크다」 『매일신보』 1943.11.6.
싸움이란 반드시 제일선에서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총후에서도 굳은 각오만 있으면 제일선 부럽지 않은 활약을 얼마든지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학교가 앞으로 여자특별연성소 지도원 양성기관으로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인 동시에 생도들도 황국여성으로서 다시없는 특전이라고 감격하고 있습니다. - 김활란 「남자에게 지지않게-황국여성으로서 사명을 완수」 『매일신보』 1943.12.25.
반민특위의 좌절, 친일파의 귀환

해방을 맞았으나 친일파 청산은 쉽지 않았다. 미군정은 좌익척결을 명분으로 일제 경찰과 관료들을 정부 요직에 앉혔고, 1947년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이 제정한 친일파 처벌에 관한 특별법조차 유명무실하게 만들었다, 해방의 감격은 절망으로 바뀌었고 친일파 청산은 정부 수립 이후로 미뤄졌다.
1948년 9월 22일, 드디어 대한민국 법령 제3호로 '반민족행위자처벌법'이 공포되고 이어 반민족행위지특별조사위원회가 출범했다. 그리고 1949년 1월 친일기업가 박흥식을 첫 구속했다. 민족의 심판대에 오른 친일파들은 진정한 반성과 참회 대신 뻔뻔한 궤변을 늘어놓았다.
정권기반이 취약해 친일파와 손잡은 대통령 이승만도 반민특위의 활동을 노골적으로 비난했다. 1949년 5월 법 제정과 반민특위 실행에 앞장섰던 소장파 국회의원을 간첩으로 몰아 구속한 '국회프락치 사건'과 6월 친일 경찰의 반민특위 습격사건은 반민특위 해체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반민특위 습격사건 후 20일 만에 김구가 암살당했다. 친일 청산과 분단 극복, 통일국가 수립이라는 독립운동가들의 간절한 꿈이 이 땅에서 완전히 좌절되었음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반민특위는 활동을 시작한 지 채 1년도 되지 않아 해체의 길을 걸었다. 조사대상 7천 건 가운데 10%도 안 되는 682건만 조사했고, 그 가운데 법정 기소는 221건에 그쳤다. 그나마 감옥에 갇힌 12명도 형집행정지로 모두 풀려났다. 친일청산은 먼 미래의 과제로 남았고, 그 대가로 치른 민중의 고통은 컸다.
반민족행위자 재판 방청기
반민족행위자 처단의 고함은 해방만세와 동시에 일어났다. 민족의 이름으로 심판을 내려 민족의 오욕을 씻고 민족정기를 살려야 하는 것이 절대 요청인 이상 '늦었으되 늦지않았으니 지금이라도'라는 여론은 더 한층 높아갔다. (중략) 지금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것은 그들이야말고 한국판 전범자 군상이라는 점이다. 군국주의자들의 침략행위를 충실히 방조한 친일파들은 히틀러와 같은 조상의 피를 받아 한 솥 밥을 먹어온 혈연들이다. (중략)
친일파들은 모두 궤변, 역설, 변명과 회유에 그칠 뿐이고, 심지어 어떤 피고는 일제 경찰의 찬양론까지 변론하기에 이르렀다. 그들이 어떻게 뼈 속까지 일제의 적자가 되었는가를 말해준다. (중략)
한국의 민주건설은 그대로 세계의 그것과 통하여 이 땅의 평화는 그대로 세계평화로 나아가는 길이다. 파시스트 무리와 그 앞잡이들을 소탕하지 않고는 민주주의와 세계평화의 장래도 위태로울 것이다. 뉘른베르크와 동경은 지금 서울에서 진행되는 특별재판에 그 의무를 넘겨주었다.
- 『주간서울』 제33호, 1949.4.4.
반민특위 김상덕 위원장의 도장
김상덕 위원장은 임시정부 문화부장 겸 의정원 학무위원장을 지낸 독립운동가이다.
김상덕 위원장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시절부터 사용했다.
고백과 성찰을 위한 기록,
친일인명사전

반민특위가 해체된 지 60년만인 2009년 친일인명사전이 출간되었다. 일제 식민통치 압제로 부터 해방된 후 당연히 해결했어야 할 친일청산의 과제를 마침내 시민이 함께 펴낸 '친일인명사전'이라는 이름으로 결실을 맺었다.
일제의 강요에 의한 개항으로 시작한 한국 근대사는 외세의 침탈과 민족의 수난으로 얼룩졌으며, 그 결과 식민지배라는 치욕스런 망국의 기록을 남겼다. 일제의 가혹한 식민통치에 따른 피해는 가늠하기 힘들 정도지만, 오랜 역사와 고유한 문화 전통에 대한 자부심도 씻기 힘든 손상을 입었다. 따라서 민족사의 굴절과 왜곡의 원인을 밖에서만 찾는 피해자 관점이 지배적인 역사인식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외적 원인의 해명에만 치중하고 고백적 자기 성찰에는 소홀하였다는 비판에도 귀 기울여야 한다.
친일인명사전 편찬은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였다. 자랑스러운 항일투쟁의 역사 이면에 부일협력이라는 치욕스런 과거도 엄연히 존재했다. 이러한 부끄러운 역사도 우리의 역사로 정확히 기록하고 용기 있게 대면하는 것이야말로 과거를 극복하고 미래로 나아가는 지름길이 될 것이다.
1공화국에서 3공화국까지 친일파워엘리트
민족문제연구소와 세계일보는 1~3공화국 파워 엘리트 연인원 435명(순인원 301명)의 해방 전 행적을 조사, 분석했다. 김종필(1926년생·총리·3공), 김현옥(1926년생·내무부장관·3공) 등 해방 당시 10대였던 인사 22명은 조사대상에서 제외했다. - 「세계일보」 2009.10.18.
행정부 대통령·장관 300명 / 군·경찰 합참의장,육참총장,경찰총수 48명 / 법조계 대법원장,대법관,검찰총장 55명 / 입법부 국회의장단 32명
간곡한 님의 어록
"우리가 강요에 못이겨 했던 그 일을 역사에 남겨두어야 한다" 김학순
김학순님을 기리는 평화비
김학순님은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에 강제로 끌려가 성노예로 고초를 겪으셨으며 말할 수 없었던 치욕스런 그 사실을 용기를 내어 "나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다"라고 1991년 8월 14일 국내 최초로 공개 증언을 하고 불의한 역사 청산운동에 앞장 서 주셨습니다.
- 우리는 님의 간곡한 어록을 새기어서 수난의 역사 산 증인으로 님의 아픔을 길이 기억합니다 - 2016.8.29
일제 강제동원 소송이란?

1987년 한국 사회의 민주화에 따라 독재정권 아래에서 숨죽였던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자신의 피해회복을 위해 나섰다. 피해자들은 일본 시민사회와 연대하여 일본 정부와 기업을 상대로 사죄와 보상을 요구하는 재판투쟁을 시작했다. 그러나 일본 사법부는 한국 피해자들의 권리가 1965년 한일협정으로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되었다는 판결만 되풀이했다. 이에 피해자들은 한국 법정으로 무대를 옮겨 2000년 5월 미쓰비시중공업, 2005년 2월 신일본제철을 상대로 권리회복을 위한 싸움을 이어갔다.
2012년 5월 24일 한국 대법원은 1·2심 판결을 뒤집고 피해자들의 손해배상청구권을 인정하는 역사적인 판결을 내렸다. 이듬해 7월 파기환송심을 진행한 고등법원은 피해자들에게 1억 원의 위자료를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그러나 최종확정을 해야 할 대법원은 알 수 없는 이유로 판결을 지연했다. 그리고 촛불혁명으로 사법농단의 실체가 드러나면서 강제동원 소송 판결을 두고 재판거래가 있었다는 충격적인 사실이 밝혀졌다.
2018년 10월 30일 한국 대법원은 마침내 강제동원이 '일본정부의 한반도에 대한 불법적인 식민지배 및 침략전쟁의 수행과 직결된 반인도적 붑법행위'라는 것을 인정했으며, 강제동원 피해를 입은 원고들의 위자료 청구권은 1965년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명확히 하여 원고들의 최종 소송을 확정했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은 20여 년이 넘는 투쟁 끝에 역사적인 승소판결을 받아냈지만, 아베 정권은 피고 일본 기업의 배상을 가로막고 있으며 피고 기업은 대화조차 거부하고 있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싸움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응원의 메시지를 남겼다.
서울 용산구 청파동2가 42-8 민족문제연구소 식민지 역사박물관 입구 반민특위터 표지석을 찾았다.
친일한 일제하의 행위가 문제가 아니라 참회와 반성이 없었다는 해방 후의 현실이 문제였다.
이 문제에 대한 발본색원의 광정이 없는 한 민족사회의 기강은 헛말이다.
만족사에서 우리는 부끄러운 조상임을 면할 날이 없게 되는 것이다. - 임종국
식민지 역사 박물관
식민지 역사 박물관
반민특위 터
이 곳은 민족말살에 앞장섰던 친일파들을 조사, 처벌하던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본부가 있던 곳임
제자리를 잃은 반민특위 터 표석

이 표석은 옛 반민특위 터인 서울시 중구 남대문로 84 당시 국민은행 본점자리에 세워졌으나, 건물 신축 공사로 방치되어 2018년 10월 이곳으로 옮겨 보관중이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경찰의 습격으로 반민특위가 와해된 지 50년 되는 해인 1999년, 친일청산이라는 민족사의 교훈을 잊지 않기 위해 시민 성금을 모아 이 표석을 설치했다.
1999.9.20
민족문제연구소 세움
2018년 8월 29일 국치일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발기인
"오욕의 역사도 역사다"
"상처는 드러내야 치료할수있다"
"친일은 결코 은폐의 대상이 될수없다"
"식민지역사박물관 개관" 2018.8.29
임종국 선생 흉상
2005.2.26 기증
조월희(조각가, 민족문제연구소 회원)
15년 걸려서 모은 내 침략, 배족사의 자료들이 그런 일에 작은 보탬을 해줄 것이다.
임종국, 1929~1989
이상호 작가가 2021년 4월, 광주 비엔날레에 출품했던 '일제를 빛낸 사람들'이라는 작품이다. 국권침탈과 민중수탈, 또 일제의 징병, 징용, 일본군 성노예 등 조선인에 대한 강제동원에 앞장선 친일반민족행위자, 이른바 친일파 92인에게 수갑을 채우고 포승줄을 묶은, 실제하지 않은 역사를 그림으로 형상화한 작품이었으니 뒷말이 많았음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불을 지핀 것은 박정희 재단이었다. 광주 비엔날레 재단 측에 그림 전시를 중단, 철거를 요청한 것이었다. 비엔날레 재단 측과 광주, 전남 지역의 예술인 등은 입장문과 성명서를 통해 작가의 창작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고, 또 역사적으로 검증된 친일의 역사를 그림으로 형상화한 작품에 대한 철거 요청은 시대착오적 발상이라고 반박했다.
그림에 수록된 92명은 박정희, 방응모, 김성수, 김활란, 서정주, 안익태, 최남선, 이광수 등 이름만 대면 알만한 거물 친일파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