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서울특별시 용산구 이태원동 190-3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 이태원 부군당의 유래
ㆍ부군당이란?
조선시대 지방 관아 인근에 설치된 제당 또는 현재 서울 한강유역에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마을의 수호신을 모시는 제당의 명칭
ㆍ이태원 부군당
이태원 부군당의 건립시기는 구체적인 기록과 증빙 자료가 부족하여 정확한 시기를 추정하기 어렵다. 다만 부군당 전면에 설치된 비석의 비문으로 건립시기를 추정할 수 있는데 비문에는 단기 3952년인 조선조 광해군11년(1619년)으로 표기되어 있다. 조선시대 이태원 부군당의 위치는 현 위치가 아닌 남산중턱에 있었으며 일제강점기(1917년)에 현 위치로 이전되었다.
□ 이태원 부군당의 의례
ㆍ마을 굿의 계열
마을 굿당의 계열은 불당 계열, 부근 계열, 도당 계열로 구분한다. 이태원부군당의 경우 과거 마을 굿의 행사가 열리던 도당이 변한 것으로 본다. 이에 유교적 제례와 민속신앙적제례가 혼합된 형태로 전승되었다.
ㆍ제례 일시
제례는 일 년에 두 번씩 음력 4월1일과 10월1일 새벽에 열린다.
ㆍ제례의 주최
이태원동부군묘관리위원회 : 부군당의 지속적 관리와 정기적 의례를 총괄하는 마을조직
당주: 당굿 일에 전념하는 무녀를 말하며, 명확하게 알려지는 당주 계보는 다음과 같다.
. 연채 할머니-곰보 만신-금니백이 만신(1900년生)-오토바이 만신(1923년生)-민명숙(1930년生)
ㆍ부군당이란?
조선시대 지방 관아 인근에 설치된 제당 또는 현재 서울 한강유역에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마을의 수호신을 모시는 제당의 명칭
ㆍ이태원 부군당
이태원 부군당의 건립시기는 구체적인 기록과 증빙 자료가 부족하여 정확한 시기를 추정하기 어렵다. 다만 부군당 전면에 설치된 비석의 비문으로 건립시기를 추정할 수 있는데 비문에는 단기 3952년인 조선조 광해군11년(1619년)으로 표기되어 있다. 조선시대 이태원 부군당의 위치는 현 위치가 아닌 남산중턱에 있었으며 일제강점기(1917년)에 현 위치로 이전되었다.
□ 이태원 부군당의 의례
ㆍ마을 굿의 계열
마을 굿당의 계열은 불당 계열, 부근 계열, 도당 계열로 구분한다. 이태원부군당의 경우 과거 마을 굿의 행사가 열리던 도당이 변한 것으로 본다. 이에 유교적 제례와 민속신앙적제례가 혼합된 형태로 전승되었다.
ㆍ제례 일시
제례는 일 년에 두 번씩 음력 4월1일과 10월1일 새벽에 열린다.
ㆍ제례의 주최
이태원동부군묘관리위원회 : 부군당의 지속적 관리와 정기적 의례를 총괄하는 마을조직
당주: 당굿 일에 전념하는 무녀를 말하며, 명확하게 알려지는 당주 계보는 다음과 같다.
. 연채 할머니-곰보 만신-금니백이 만신(1900년生)-오토바이 만신(1923년生)-민명숙(1930년生)
유관순 열사 추모비
유관순 열사 추모비
유관순 열사 추모비
유관순 열사 (출생 1902.12.16.~ 순국 1920.9.28)
건립규모: 주탑 0.8m× 1.9m×0.25m, 보조탑 0.54m×1.38m×0.25m 건립일자 : 2015년 9월 23일
건립주최: 용산구청장 성장현, 용산구의회 의장 박길준 / 건립주관: 유관순 열사 추모비 건립추진위원회
추모비 건립 취지문
유관순 열사는 1919년 3.1독립만세운동에 직접 참여하였고 같은 해 4월 1일 아우내 장터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다 체포되었다. 열사는 이후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어 옥중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도 독립운동의 뜻을 굽히지 않았지만, 결국 1920년 9월 28일에 순국하였다.
열사의 시신은 10월 14일 정동교회에서 김종우 목사의 주례로 장례식이 거행된 후 용산구에 위치한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되었으나, 이태원 공동묘지가 일제하에서 군용기지로 전환됨에 따라 이장되는 과정에서 실전(失傳)되었다.
이에 유관순 열사의 역사적 의의를 되새기고 나라사랑의 정신과 숭고한 넋을 기리고자 당시 시신이 안장된 이태원 공동묘지가 바라다보이는 이 곳에 30만 용산구민의 뜻을 모아 추모비를 세우다.
유관순 열사 (출생 1902.12.16.~ 순국 1920.9.28)
건립규모: 주탑 0.8m× 1.9m×0.25m, 보조탑 0.54m×1.38m×0.25m 건립일자 : 2015년 9월 23일
건립주최: 용산구청장 성장현, 용산구의회 의장 박길준 / 건립주관: 유관순 열사 추모비 건립추진위원회
추모비 건립 취지문
유관순 열사는 1919년 3.1독립만세운동에 직접 참여하였고 같은 해 4월 1일 아우내 장터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다 체포되었다. 열사는 이후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어 옥중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도 독립운동의 뜻을 굽히지 않았지만, 결국 1920년 9월 28일에 순국하였다.
열사의 시신은 10월 14일 정동교회에서 김종우 목사의 주례로 장례식이 거행된 후 용산구에 위치한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되었으나, 이태원 공동묘지가 일제하에서 군용기지로 전환됨에 따라 이장되는 과정에서 실전(失傳)되었다.
이에 유관순 열사의 역사적 의의를 되새기고 나라사랑의 정신과 숭고한 넋을 기리고자 당시 시신이 안장된 이태원 공동묘지가 바라다보이는 이 곳에 30만 용산구민의 뜻을 모아 추모비를 세우다.
유관순 열사 추모비
유관순 열사 추모비
(출생 1902.12.16/순국 1920.9.28)
유관순 열사 유언
내 손톱이 빠져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으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출생 1902.12.16/순국 1920.9.28)
유관순 열사 유언
내 손톱이 빠져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으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추모비 건립 취지문
유관순 열사는 1919년 3.1독립만세운동에 직접 참여하였고 같은 해 4월 1일 아우내 장터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다 체포 되었다. 열사는 이후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어 옥중 독립만세 운동을 전개하다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도 독립운동의 뜻을 굽히지 않았지만, 결국 1920년 9월 28일에 순국하였다.
열사의 시신은 10월 14일 정동교회에서 김종우 목사의 주례 로 장례식이 거행된 후 용산구에 위치한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되었으나, 이태원 공동묘지가 일제하에서 군용기지로 전환됨에 따라 이장되는 과정에서 실전(失傳)되었다.
이에 유관순 열사의 역사적 의의를 되새기고 나라사랑의 정신 과 숭고한 넋을 기리고자 당시 시신이 안장된 이태원 공동 묘지가 바라다보이는 이 곳에 30만 용산구민의 뜻을 모아 추모비를 세우다.
유관순 열사는 1919년 3.1독립만세운동에 직접 참여하였고 같은 해 4월 1일 아우내 장터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다 체포 되었다. 열사는 이후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어 옥중 독립만세 운동을 전개하다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도 독립운동의 뜻을 굽히지 않았지만, 결국 1920년 9월 28일에 순국하였다.
열사의 시신은 10월 14일 정동교회에서 김종우 목사의 주례 로 장례식이 거행된 후 용산구에 위치한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되었으나, 이태원 공동묘지가 일제하에서 군용기지로 전환됨에 따라 이장되는 과정에서 실전(失傳)되었다.
이에 유관순 열사의 역사적 의의를 되새기고 나라사랑의 정신 과 숭고한 넋을 기리고자 당시 시신이 안장된 이태원 공동 묘지가 바라다보이는 이 곳에 30만 용산구민의 뜻을 모아 추모비를 세우다.
유관순 열사 연보
1902년 12월 16일 (음력 11월 17일) 유관순 열사는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용두리에서 아버지 유중권과 어머니 이소제 사이에서 3남 2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1918년 3월 18일 이화학당 보통과를 졸업하고 4월 1일 이화여자 고등보통학교 1학년에 진학하였다.
1919년 3월 1일 당시 이화학당 친구들과 함께 3.1만세운동에 직접 참여하였고, 3월 5일 서울에서 일어난 학생단 시위운동에 참여했다가 경무총감부에 붙잡혔다 풀려났다.
1919년 3월 13일 고향으로 내려가 3월 14일부터 3월 31일까지 아우내장터 만세운동을 준비하고 3월 31일에 매봉산에 봉화를 올렸다.
1919년 4월 1일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이 발발하였고, 유관순 열사는 아우내 [竝川] 장터에서 3,000여 군중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며 시위를 지휘하다가 출동한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었다. 이때 아버지 중권(重權)과 어머니 이씨(李氏)는 일본 헌병에게 피살되었고, 5월 9일 공주지방법원에서 5년형을 언도받았으며 이후 서대문감옥에 수감되었다.
1919년 6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3년형을 선고받았다. 유관순 열사는 감옥에서 독립만세를 부르며 옥중 동료들을 격려했고 그때마다 모진 매와 고문을 당했지만, 끝끝내 대한 독립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나 일제의 계속되는 고문으로 그토록 목놓아 외치던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한 채 1920년 9월 28일 오전 8시 20분 서대문 형무소의 어두운 감방에서 순국하였다.
1920년 10월 14일 유관순 열사의 시신은 이화학당에 인도되어 스승과 동문들의 손에 의하여 정동교회에서 김종우 목사의 주례로 장례식이 거행된 후에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1947년에 유관순 열사 기념사업회가 결성되었으며, 1951년에는 순국열사 심사위원회에서 순국열사로 선정되었다. 그리고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1902년 12월 16일 (음력 11월 17일) 유관순 열사는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용두리에서 아버지 유중권과 어머니 이소제 사이에서 3남 2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1918년 3월 18일 이화학당 보통과를 졸업하고 4월 1일 이화여자 고등보통학교 1학년에 진학하였다.
1919년 3월 1일 당시 이화학당 친구들과 함께 3.1만세운동에 직접 참여하였고, 3월 5일 서울에서 일어난 학생단 시위운동에 참여했다가 경무총감부에 붙잡혔다 풀려났다.
1919년 3월 13일 고향으로 내려가 3월 14일부터 3월 31일까지 아우내장터 만세운동을 준비하고 3월 31일에 매봉산에 봉화를 올렸다.
1919년 4월 1일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이 발발하였고, 유관순 열사는 아우내 [竝川] 장터에서 3,000여 군중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며 시위를 지휘하다가 출동한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었다. 이때 아버지 중권(重權)과 어머니 이씨(李氏)는 일본 헌병에게 피살되었고, 5월 9일 공주지방법원에서 5년형을 언도받았으며 이후 서대문감옥에 수감되었다.
1919년 6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3년형을 선고받았다. 유관순 열사는 감옥에서 독립만세를 부르며 옥중 동료들을 격려했고 그때마다 모진 매와 고문을 당했지만, 끝끝내 대한 독립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나 일제의 계속되는 고문으로 그토록 목놓아 외치던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한 채 1920년 9월 28일 오전 8시 20분 서대문 형무소의 어두운 감방에서 순국하였다.
1920년 10월 14일 유관순 열사의 시신은 이화학당에 인도되어 스승과 동문들의 손에 의하여 정동교회에서 김종우 목사의 주례로 장례식이 거행된 후에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1947년에 유관순 열사 기념사업회가 결성되었으며, 1951년에는 순국열사 심사위원회에서 순국열사로 선정되었다. 그리고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유관순 열사 추모비 건립
건립 주최: 용산구청장 성장현, 용산구의회 의장 박길준 / 건립주관: 유관순 열사 추모비 건립추진위원회 / 위원장: 이종래 / 부위원장: 한동수, 박삼규
위원: 강성기, 강영애, 김경선, 김근태, 김성곤, 김성조, 김영국 김원묵, 김재덕, 김정생, 김정준, 김정희, 김진국, 김천수 김현숙, 김형갑, 노영희, 문쾌출, 박경목, 박기찬, 박병학, 박용주, 박종승, 박준기, 박창복, 사미자, 서다임, 서연순, 서정윤, 신여진, 신정녀, 양기석, 유오조, 윤미순, 윤배, 윤종일, 이동희, 이문성, 이미희, 이부영, 이상용, 이영석, 이영현, 이옥희, 이춘자, 이회석, 임종대, 장경도, 장영환, 장정호, 정두원, 조윤곤, 조학봉, 지영환, 최기섭, 최희섭, 하태초, 학봉스님, 한대희, 한장영, 한춘경, 한희숙, 허삼 / 자문위원: 하정민, 김성복
2015년 9월 23일
건립 주최: 용산구청장 성장현, 용산구의회 의장 박길준 / 건립주관: 유관순 열사 추모비 건립추진위원회 / 위원장: 이종래 / 부위원장: 한동수, 박삼규
위원: 강성기, 강영애, 김경선, 김근태, 김성곤, 김성조, 김영국 김원묵, 김재덕, 김정생, 김정준, 김정희, 김진국, 김천수 김현숙, 김형갑, 노영희, 문쾌출, 박경목, 박기찬, 박병학, 박용주, 박종승, 박준기, 박창복, 사미자, 서다임, 서연순, 서정윤, 신여진, 신정녀, 양기석, 유오조, 윤미순, 윤배, 윤종일, 이동희, 이문성, 이미희, 이부영, 이상용, 이영석, 이영현, 이옥희, 이춘자, 이회석, 임종대, 장경도, 장영환, 장정호, 정두원, 조윤곤, 조학봉, 지영환, 최기섭, 최희섭, 하태초, 학봉스님, 한대희, 한장영, 한춘경, 한희숙, 허삼 / 자문위원: 하정민, 김성복
2015년 9월 23일
府君廟(부군묘)
단기 3952년 월 일 건립
부군 봉안년 춘추사절 봉사
서기 1967년 11월 1일 보수
이태원 주민 일동
부군 봉안년 춘추사절 봉사
서기 1967년 11월 1일 보수
이태원 주민 일동
□ 이태원 부군당의 유래
ㆍ부군당은 조선시대 지방 관아 인근에 설치된 제당 또는 현재 서울 한강유역에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마을의 수호신을 모시는 제당을 말한다.
ㆍ이태원 부군당의 건립 시기는 정확하게 추정하기 어려우며 비석의 비문에는 단기 3952년인 조선조 광해군 11년(1619년)으로 표기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남산 중턱에 있었으나 일제가 훈련소를 세우면서 1917년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한다.
□ 이태원 부군당의 의례
ㆍ이태원 부군당은 과거 마을 굿의 행사가 열리던 도당이 변한 것으로 유교적, 제례와 민속신앙적 제례가 혼합된 형태로 전승되었다.
ㆍ제례는 음력 4월 1일과 10월 1일 새벽에 일 년에 두 번 지낸다.
ㆍ'이태원동부군묘관리위원회'에서 총괄 관리하고 화주들이 제사를 지내며 마을의 액을 몰아내고 복을 불러들여 동네와 주민들이 평안하기를 기원한다.
ㆍ부군당은 조선시대 지방 관아 인근에 설치된 제당 또는 현재 서울 한강유역에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마을의 수호신을 모시는 제당을 말한다.
ㆍ이태원 부군당의 건립 시기는 정확하게 추정하기 어려우며 비석의 비문에는 단기 3952년인 조선조 광해군 11년(1619년)으로 표기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남산 중턱에 있었으나 일제가 훈련소를 세우면서 1917년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한다.
□ 이태원 부군당의 의례
ㆍ이태원 부군당은 과거 마을 굿의 행사가 열리던 도당이 변한 것으로 유교적, 제례와 민속신앙적 제례가 혼합된 형태로 전승되었다.
ㆍ제례는 음력 4월 1일과 10월 1일 새벽에 일 년에 두 번 지낸다.
ㆍ'이태원동부군묘관리위원회'에서 총괄 관리하고 화주들이 제사를 지내며 마을의 액을 몰아내고 복을 불러들여 동네와 주민들이 평안하기를 기원한다.
府君廟(부군묘)
내 손톱이 빠져 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유관순 열사 유언
유관순 열사 유언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 190-3 부군당 역사공원에 유관순 열사 추모비가 건립되었다고 해서 찾았다.
유관순 열사 추모비 건립 제막식 및 순국 95주기 추모제
■ 일시 : 2015. 9. 23(수) 오후 3시 ■ 장소 : 이태원부군당 역사공원 ■ 주최 : 용산구
■ 일시 : 2015. 9. 23(수) 오후 3시 ■ 장소 : 이태원부군당 역사공원 ■ 주최 : 용산구
□ 이태원 부군당의 유래
ㆍ부군당은 조선시대 지방 관아 인근에 설치된 제당 또는 현재 서울 한강유역에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마을의 수호신을 모시는 제당을 말한다.
ㆍ이태원 부군당의 건립 시기는 정확하게 추정하기 어려우며 비석의 비문에는 단기 3952년인 조선조 광해군 11년(1619년)으로 표기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남산 중턱에 있었으나 일제가 훈련소를 세우면서 1917년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한다.
□ 이태원 부군당의 의례
ㆍ이태원 부군당은 과거 마을 굿의 행사가 열리던 도당이 변한 것으로 유교적 제례와 민속신앙적 제례가 혼합된 형태로 전승되었다.
ㆍ제례는 음력 4월 1일과 10월 1일 새벽에 일 년에 두 번 지낸다.
ㆍ'이태원동부군묘관리위원회'에서 총괄 관리하고 화주들이 제사를 지내며 마을의 액을 몰아내고 복을 불러들여 동네와 주민들이 평안하기를 기원한다.
ㆍ부군당은 조선시대 지방 관아 인근에 설치된 제당 또는 현재 서울 한강유역에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마을의 수호신을 모시는 제당을 말한다.
ㆍ이태원 부군당의 건립 시기는 정확하게 추정하기 어려우며 비석의 비문에는 단기 3952년인 조선조 광해군 11년(1619년)으로 표기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남산 중턱에 있었으나 일제가 훈련소를 세우면서 1917년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한다.
□ 이태원 부군당의 의례
ㆍ이태원 부군당은 과거 마을 굿의 행사가 열리던 도당이 변한 것으로 유교적 제례와 민속신앙적 제례가 혼합된 형태로 전승되었다.
ㆍ제례는 음력 4월 1일과 10월 1일 새벽에 일 년에 두 번 지낸다.
ㆍ'이태원동부군묘관리위원회'에서 총괄 관리하고 화주들이 제사를 지내며 마을의 액을 몰아내고 복을 불러들여 동네와 주민들이 평안하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