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맹선, 조천일, 조창선, 조만선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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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광동리 70-1
탐방로그
조맹선 호국기념비, 조천일 공적기념비, 조창선 영모기념비, 조만선 공로추모비 총 4개의 비석을 찾기 위해 광주시 퇴촌면 광동리 70-1을 찾았다. 비석들은 서로 매우 근접해 있고 이외에도 다양한 비석이 함꼐 존재한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한양조씨 대종회 통합에 힘쓰고 부회장이며 본 종회 고문이다. 자부 이천서씨 정순은 이북에 있고 또 자부 청주곽씨는 선분인데 덕이 있다. 장손자에 태준이고 손부는 원주이씨 3자이다. 차손자 태흥이고 손부는 성산배씨 애임이다. 손녀 정렬은 이북에 있고 차손녀는 정난이다. 증손자는 현동이고 진동이다. 거룩한 충혼들이시어. 편안히 쉬시며 이나라의 자손들을 축복하시어 우리 땅에서 남북이 통일되고 밝은 미래에 번영할 수 있도록 도우소서.
단기 4348년 서기 2015년 10월 일

해유령전승보국충신숭모사업회 회장 족손 태훈 근찬
애국지사 독립운동기념비 건립위원회 립
애국지사 한양조공 창선 영모기념비
애국지사 한양조공 창선영모기념비
지난 비운에 역사에서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제국주의는 단기4238년 서기 1905년에 한국과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우리나라를 반식민지로 만들었다. 그리고 조선통감부를 설치하였고 일제는 우리군대를 강제로 해산시키자 한민족은 이를 물리치기 위하여 의병전쟁을 일으키였으나 일제는
잔인무도하게 토벌하였다. 그후에는 한국을 강제로 점령하고 조선총독부를 설치하고 데라우찌를 총독으로 임명하여 헌병 경찰에 의한 무단통치를 감행하였다. 우리민족은 국권회복을 위하여 해외인 만주 중국 러시아 와 연해주 미주등지로 망명하고 일부는 국내에서 악조건을 무릅쓰고 애국계몽운동과 의병전쟁및 군자금을 보내어 돕는등 여러갈래의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조창선의사는 황해도 평산군 적암면 출신으로 1919년 8월 애국지사 유상열과 서의배와 함께 주비단에 가입했다. 1921년 4월 서의배와 같이 고지면 부호 조치훈등으로부터 군자금을 조달 임시정부에 송금하였다. 그후 일제의 밀정을 사살한후 이만석의 집에 은신중이었다. 이때 일본경찰들이 습격하여 교전끝에 체포되어 무거운 체형으로 구타와 물고문을 당하다가 1923년 4월 7일 사형이 집행되어 오직 나라을 위하여 순국하였다. 대한민국수립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이곳 퇴촌은 충무공 조영무선생의 보국충정의 역사가 있는 유서깊은 곳이다. 여기
에 자손들의 애국지사 기념비를 세우는것은 가문의 영광이요 호국정신을 계승시는데 큰 의미가 있다. 우리모두는 기념비앞에서 엄숙히 머리숙여 선열들의 애국충심을 돼새기고 가문에 문화유산을 수호하며 종중이 활기차게 발전할것을 다짐한다.
단기 4348년 서기 2015년 10월 일
한양조씨 세마공파 종회 회장 인천보훈공사 대표이사 족질 태룡 삼가 지음
애국지사 한양조공 효산 만선 공로추모비
애국지사 한양조공 효산 만선 공로추모비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독립정신이 투철한 애국지사이다. 공의 휘는 만선이요 호는 효산이며 한양조씨다. 애국지사 조선생은 단기 4252년 서기 1919년 음력 1월 27일 충북 괴산군에서 태너았다. 어려서부터 재능이 뛰어나서 7세에 경서(논어 맹자)를 읽었으며 서예에 재능이 잇어 신동이 쓴 입춘글씨를 대문에 붙이면 온갖 잡귀가 범접을 못한다고 하여 주민들이 앞을 다투어 글씨를 받아갈 만큼 명필이었다. 성장시기가 일제의 강점기로 나라없는
민족의 고통이 너무 크므로 국권을 회복하는 것이 절실한 소망이었다. 공은 1943년에 한국에서 오래된 유기그릇을 많이 모아서 군자금을 지원하려고 직접 가지고 상해 임시정부를 향해 떠났다. 그러나 가던 도중 기차로선 신의주역에서 갑자기 일본경찰에 발각되어 유기그릇을 압수당하고 체포되었다. 이때 물고문과 심한 구타로 신체가 망가지고 뼈를 깍는 고통을 겪고 함흥감옥에 수감되었다. 이 당시 서울 신당동 자택에는 일본경찰이 수색을 하여 가족들에게 엄청난 해악을 끼쳤다. 그 후 복역 중에 1945년 조국광복이 되어 풀려나서 고향인 괴산군 자택으로 왔다. 그러나 체포 당시 구타로 인한 하반신이 마비되어 외부 거동을 전못하였다. 이때 부인의 간호와 친척들이 사냥을 하여 도와준 산돼지 피와 여러가지 산짐승의 고기를 많이 장복하고 10여년 만에 건강이 회복되었다. 이내 용은공의 동생 기선씨와 장남 태홍이 실지 목격하고 겪은 사실이다. 부인은 의성김씨 정순인데 1919년 음 3월 3일 출생하여 1976년 음 12월 28일 졸하였는데 애국지사 남편을 내조하는데 공이 매우 컸다. 장남은 태홍이고 효성이 극진하였으며 자부는 전주이씨 옥주인데 후덕하였고 손녀는 희숙 이동 옥이 경아이다. 태성은 덕이 있고 자부는 연일정씨 정주인데 후덕하고 손녀는 미애이다. 태흥은 덕망이 있고 자부는 전주이씨 영희인데 후덕하고 손자에 동수 동규이다. 애국지사 효산의
일생은 진실로 뜻이 컸으며 그 애국정신은 지역주민들의 귀감이 되었다. 서기 1979년 음 9월 20일 60세를 일기로 중원군 노운면 신허리에서 일생을 마치였다. 평생을 나라를 위하는 구국정신이 투철하여 민족정기 선양에 이바지한 공적이 컸으므로 건립위원회의 뜻을 모아 비를 세워 추모한다.
단기 4348년 서기 2015년 10월 일
한양조씨 판도공파 종회회장 가래비 3.1운동 순국사업회 회장 조태훈 삼가 지음
광주시 퇴촌면 광동리에 있는 대한독립단장 의사 원석 조맹선호국기념비, 애국지사 한양조공 창선 영모기념비 등을 찾아가는 중이다.
이곳의 GPS상의 주소는 광주시 퇴촌면 광동리 70-1이다
대한독립단장 의사 원석 조맹선 호국기념비
대한독립단장 의사 원석 조맹선 호국기념비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우리 민족은 국권 회복을 하고자 해외 여러나라로 망명하고 일부는 국내에서 일제의 탄압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애국계몽운동과 의병전쟁 및 군자금을 모아 보내며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선생은 여기 선봉에 나섰던 인물이다. 공의 휘는 맹선이요 호는 원석이고 한양조씨다. 단기 4202년 정묘년 서기 1869년 황해도 평산군 고지면 대용리에서 태어났는데 본시 천품이 뛰어나서 불의를 보면 분개하는 의협심이 있어 대절의를 지녔다. 또한 투철한 재능이 있어 유학의 지식이 높았으며 한편으로
는 1890년 경술년 21세 약관에 무과에 급제하였다. 그리고 손오병서를 외우는데 열의를 가졌다. 비운의 1905년 일제 을사조약에 이르러 이것을 물리칠 계책을 조정에 상소하였으나 반송되고 올라가지 않아서 의분을 품고 퇴궐하였다. 그후 국내정세는 고종의 양위와 군대해산등으로 국민들의 가슴아픈 일이 많이 벌어졌다. 평산지방에서는 박정빈 이진룡 등 애국인사 10명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항일투쟁을 계속하였으나 끝내 경술합방으로 국내 투쟁의 한계를 느끼게하였다. 여기서 의사 원석 조맹선은 정든 고국산하를 떠나서 압록강을 건너갔다. 그리고 이진용 박장호 등과 장백 무송 집안 임강현 등지로 옮겨다니며 군사기지를 마련하고 독립군의 징모와 훈련에 힘을 기울이었다. 신해년에 부친상을 당하여 환국했다가 왜경에게 체포되었으나 다행히 석방되었다. 이후 상복을 입은 채 유하현으로 들어가 김정섭과 군인을 모아 독립단으로 하고 교련에 열중하였다. 1919년에는 여러 애국단체를 통합한 단일기관으로 대한독립단이 조직되었는데 여기 단장으로 추대되어 실제 지도자가 되었다. 이로부터 더욱 병력을 증강하는 한편 국내외로 조직망을 확대하여 그해 12월까지 지단 지부가 100여개소에 이르렀다. 또한 간부들을 국내로 파견하여 조직강화와 군자금 모금과 전투활동의 전개를 실시하였다. 더욱이 임시정부 군무부 직할 광복군사령관으로 만주의 군사활동을 통솔지도하는 중책을 맞기도 하였다. 이는 그의 신망과 지도력이 독립군 지도자들간에 널리 인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스러운 것은 1920년 겨울에 취봉령 진중에서 군사훈련을 지도하던 중 병을 얻어 음력 10월 24일 51세로 조국 광복을 보지 못하고 타계하였다. 부인 하양허씨와의 사이에 아들 태부가 있으며 손자는 희동 양동 흥동 삼형제가 있다. 해방 후 고향인 평산군 지역
유지들이 태성산록에 원석공 숭모단을 모으고 향사를 드렸다. 조국 광복 후 대한민국 건국훈장이 추서되었다. 이제 열강들의 힘으로 왜구를 격멸하고 대한독립이 되었는데 공의 영혼이 있다면 얼마나 기뻐하리요. 천지는 무너지지 않고 항상 일월이 선명하듯 아아! 의사의 호국정신이여 만대에 위연하소서. 우리는 기념비 앞에서 선열들의 숭고한 뜻을 이어 가문의 번영을 위하여 온 정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하고 삼가 머리 숙여 공의 업적을 길이 되새기며 기념한다.
애국지사 한양조공 천일 공적기념비
애국지사 한양조공 천일 공적기념비

우리나라는 강대국에 인접하여 역사상 수없이 많은 국란을 당하였다. 그러나 굴하지 않고 의연히 일어나서 여기에 맞서 항거하여 막아냈다. 조선 고종때 왜적들은 우리의 임금을 페한 원수이다. 갑오년에 개혁인 갑오경장을 비롯하여 500년의 제도와 문물을 회복하지 못하고 을미조약으로 강토를 다 잃고 말았다. 이때 유생은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가진 재산을 전부 군자금을 받친 애국지사이다. 공의 성은 한양조씨요 휘는 천일이고 자는 문용이다. 단기 4208년 서기 1885년 음력 3월 10일 황해도 평산군 서봉면 당우리에서 출생하였다. 본시 재능이 있어 일찍이 경서를 통달하고 유학을 숭상하였다. 일제는 우리나라 내정을 간섭하고 국모를 살해한 천인공노할 대죄악
을 범하였다. 이에 분개한 유생들이 봉기한 것이 황해도 평산지방 선비들의 의병운동이다. 공은 대의와 용맹이 투철하여 주저함이 없이 의병운동에 참여하였다. 이때에 인격과 용맹이 있는 명장 이진룡 의사와 교분이 두터워서 항시 뜻을 같이하고 진취적으로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왜적과 투쟁하였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적의 대세에 어찌할 수 없이 만주로 떠났다. 여기서 안중근 의사를 비롯한 전국에서 모여든 의사들과 더불어 큰 역활을 펼쳤다. 그리고 군자금을 많이 마련하고자 국내로 들어와서 모금활동을 전개하였다. 조천일 애국지사는 가세가 부유하였으므로 토지 6만여평을 소유하고 농사를 지었었다. 나라의 주권이 없으면 나도 없다는 일념에서 군자금을 내놓기로 결심하였다. 주권회복을 하고자 정의롭게 약 3년간에 있는 토지를 전부 팔아서 군자금으로 보람잇게 받쳤다. 이는 얼마나 갸륵하고 위대한 일인가. 그러나 이 소문이 일경에게 알려져서 당내 친척 한 사람을 가두고 구타 고문을 심하게 하여 할 수 없이 군자금 보낸 사실을 실토하였다. 이때 공이 체포되어 2년간에 옥고를 치렀다. 그 후 가정의 생활은 빈곤이 극심하였고 일제의 박해는 날이 갈수록 더했다. 제국주의에 편승한 일본은 1910년에 한국을 병탄하고 그 후에는 만주와 중국을 침략하였으며 태평양전쟁을 통해 극동 및 아시아 전역에 범죄를 저지른 후 1945년 8월 15일 일황이 항복하고 패망하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태평양전쟁 말기 미영소 3국 수뇌에 얄타회담에서 소련의 참전과 38도선을 경계로 한 한반도 분활점령의 비밀협정은 일본패망이 곧 우리 민족의 광복이 아니라 도리어 국토분단에 사상분열이라는 새로운 비극의 민족적 숙제를 안겨주었다. 공은 일제치하에서 큰 고통에 나날을 지냈다. 단기 4296년 서기 1993년 음 7월 7일 타계하여 황해도 평산군 서봉면 당우리 산 언덕에 모셨다. 부인은 회덕황씨인데 후덕하였으며 1986년 음력 8월 28일 세상을 마치고 묘는 합부이다. 슬하에 장남은 경선이고 자부는 창녕조씨이다. 차남 국선은 공무원 재직할 당시 극빈자 주민을 구제하여 칭송을 받았으며